978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지. (3)
파라라라라락.
허공으로 솟아오른 무언가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이 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은 그것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쉼 없이 회전하며 붉은 피를 사방으로 뿌려 댄 물체가 이내 힘을 잃고 추락했다.
터억!
모두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팔이었다.
단련될 대로 단련된 무인의 팔이 모래톱에 처박혔다. 단면에서 흘러나온 피가 흰 모래를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모두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눈으로 보고도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적막이 짙게 깔리니 마른침 삼키는 소리조차 천둥처럼 들렸다.
푸우우웃!
그때,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흑룡왕이 뒤로 휘청휘청 물러났다.
“끄으…….”
애병을 놓친 흑룡왕은 좌수로 제 어깻죽지를 움켜잡았다. 벌어진 그의 두터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끄으윽…….”
모두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흑룡왕의 오른팔.
거대한 언월도를 들고 장강을 호령했던 그 팔이 어깨 바로 아래에서부터 잘려 나가 있었다. 청명의 검이 제 목을 베어 오는 순간 팔을 들어 올려 목이 잘리는 것만은 막아 냈지만, 팔은 여지없이 잘려 나가고 만 것이다.
불신과 경악. 그리고 공포.
통제할 수 없는 감정으로 뒤범벅되어 엉망진창인 눈으로 그는 뒤로, 또 뒤로 물러났다.
“이, 이놈…….”
그런 흑룡왕을 보며 모두 넋을 놓고 말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장강의 왕처럼 군림했던 신주오패의 수장이었고, 이제는 사패련의 부련주인 이의 팔이 화산 삼대제자의 검에 잘려 나가는 광경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 봐도 보이는 광경이 달라지진 않는다.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자각이 든 순간, 매화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지독한 위화감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단 한 무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역시!”
“빌어먹을!”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억눌린 경탄이 흘러나왔다.
과도한 긴장에서 일시에 해방된 어깨가 쉴 새 없이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환호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 내며 그들은 일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백천 역시 주먹을 꽉 쥔 채 청명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지.”
“그러니까요.”
“음!”
조걸과 윤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유이설의 어깨마저 가볍게 들썩였다.
지난 삼 년간 청명이 어떤 수련을 해 왔는지 지켜본 화산의 제자들이라면 그가 지는 모습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다. 그들이 겪어 온 것이 지옥이라면 청명이 겪어 온 것은 말 그대로 무간지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믿음과는 별개로 화산의 무복을 입은 이들은 지금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는 끝없는 환희에 전율하고 있었다.
보답을 받은 느낌이다.
청명은 그들의 앞에서 똑똑히 증명했다. 지난 시간 그들이 해 온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그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온 것들이 지금 분명 그들의 검과 함께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청명을 잘 알지 못하는 남궁세가의 검수들에게 이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의 얼굴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저럴 순…….”
“세상에…….”
그들은 안다. 흑룡왕이 얼마나 강한지.
가주였던 남궁황마저도 전의를 불태웠던 상대가 바로 흑룡왕이었다. 그가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도기의 위력은 남궁의 이름을 가진 이들이 죽음으로 증명했다.
그런데 지금 그 흑룡왕이 휘청대고 있다. 저 화산의 검수에게 팔이 잘린 채.
승부의 결과는 너무도 명확했다.
“끄으으윽…….”
흑룡왕은 핏발이 선 눈으로 뒤로 비척비척 물러났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수적들은 그를 돕기는커녕 되레 겁에 질린 채 우르르 물러설 뿐이었다.
휘릭.
가볍게 검을 돌려 잡은 청명이 검 끝을 아래로 내렸다.
그그그극.
그리고 검 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천천히 흑룡왕에게로 다가왔다.
모든 이들이 흥분하고 있다. 동시에 경악하고 있다.
하지만 청명의 눈빛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섬뜩하도록 가라앉은 눈빛으로 흑룡왕을 주시하며, 느릿하게 다가갈 뿐이었다.
“으…….”
흑룡왕의 턱이 덜덜 떨렸다.
텅 비어 버린 뇌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대체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에 처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때.
청명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카앙!
바닥에 떨어져 있던 흑룡왕의 언월도를 걷어찬 것이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언월도는 정확히 흑룡왕의 발치에 떨어졌다.
“…….”
흔들리는 눈으로 제 도와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는 흑룡왕의 귀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아.”
청명이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계속해야지.”
당연한 사실을 고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말투에 어린 섬뜩함에 지켜보는 이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팔이 잘렸다?”
“…….”
“그게 뭐 어쨌는데?”
청명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팔 하나 잘렸다고 부들부들 떨어 대는 꼴을 보고 있으니 뱃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병신 같은 놈이.”
이들은 모른다. 평화에 절어 산 이들은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강호를 누가 지켜 왔는지. 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꿰뚫려 죽은 동료의 시신에서 칼을 뽑아내 휘두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잘려 나간 팔을 제 발로 짓밟으며 상대의 목을 물어뜯는 이들이 무슨 생각으로 싸웠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강호의 왕 행세를 하며 거드름 떨어 대고 있다.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니, 사실 굳이 과거를 논할 것도 없다.
청명이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남궁은…….”
청명의 입에서 남궁이라는 말이 나오자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전신의 근육을 팽팽히 당겼다.
“팔이 잘려도 싸웠다. 목이 베이는 그 순간까지도.”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었다.
저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어떤 위로보다 더 강하게.
배가 갈라진 상황에서도 적에게 검을 찔러 넣고,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상대의 발목을 움켜잡던 동료들의 모습이 그들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잡아.”
“으…….”
“잡아, 이 개 같은 새끼야.”
흑룡왕이 이를 악물며 하나 남은 팔로 언월도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아아아아앙!
단번에 달려든 청명의 검이 언월도를 후려친다. 흑룡왕은 속절없이 뒤로 튕겨 나가 수적들 사이에 떨어졌다.
기겁한 수적들이 좌우로 우르르 물러서는 순간, 흑룡왕이 제 곁에서 달아나려는 수적 하나를 붙들었다.
“마, 막아라.”
“흑룡…….”
“막아! 막으라고 이 새끼들아! 저 새끼를 막아아아아!”
광기에 찬 흑룡왕이 악을 썼다. 하지만 누구도 흑룡왕을 위해 청명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흑룡왕의 명을 따랐던 이유는 그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돌아올 보복이 무서워서였다.
하지만 이미 흑룡왕의 끝은 정해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들이 무얼 위해서 흑룡왕을 살리겠다고 사지로 뛰어들며 충성하겠는가?
새파랗게 질린 수적들은 물러서기에 바빴다. 엉덩방아를 찧고도, 엉금엉금 기듯 뒤로 몸을 물렸다. 금세 흑룡왕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 머저리 같은 놈들이! 막으라고 하지 않느냐! 막아아아아!”
흑룡왕이 발악하듯 소리쳐 댔지만, 그 목소리는 공허하게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퉷!”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 낸 청명은 무심한 눈으로 그런 그에게 다가갔다.
악귀 같은 얼굴로 수적들을 노려보던 흑룡왕은 그런 청명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주춤 더 물러섰다. 하나 남은 손끝이 속수무책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으, 으으…….”
언월도를 억지로 움켜잡은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화산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풀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단 말인가?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달려든 청명이 그의 턱을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다.
콰앙!
턱이 부서진 흑룡왕이 물수제비처럼 땅에서 튕기며 날아갔다.
콰아앙!
모래톱에 형편없이 처박힌 그는 고통에 겨워 모래를 움켜잡았다.
“끄으으으…….”
간신히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느릿하고 일정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청명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화산의 검수들이 따르고 있었다. 수적들의 한중간을 걷는 청명을 호위하는 듯이. 그들이 쥔 검에 햇볕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하지만…… 이제 흑룡왕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으……으으…….”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수로채는 다가오는 그의 죽음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 누구 하나 그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 주지 않았다.
“이 배은망덕한 버러지 같은 놈들! 으아아아아아아!”
그는 울분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바로 그때, 검을 든 사신이 그의 앞에 도착했다.
“…….”
흑룡왕이 멍하니 청명을 올려다보았다.
“알 만하군.”
“…….”
“너는 남궁황의 발끝도 못 따라가.”
“으…….”
“수로채?”
청명이 조소했다.
“이게 네가 쌓은 모래성이다, 이 멍청한 새끼야. 힘이 없는 너 따위는 벌레만도 못해. 누구도 너를 위해 싸워 주지 않아.”
“으아아아아악!”
흑룡왕이 손을 뻗어 다시 도를 잡으려는 순간 청명의 검이 그의 손목을 베었다.
서걱!
“아아아아악!”
그의 처절한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든 검이 전신을 난자했다.
서걱! 서걱!
마치 죽어 간 남궁세가 검수의 수만큼 그 몸에 상처를 남겨 주겠다는 듯이.
“으아아아아아악!”
듣는 이마저 눈살을 찌푸릴 법한 비명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평소의 그라면 몸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리 비명을 질러 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무너져 버린 이상, 항거할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아가리 닥쳐!”
하지만 청명은 그런 흑룡왕의 사정을 헤아려 주지 않았다.
푸욱!
검이 흑룡왕의 어깨를 꿰뚫고 비틀렸다. 근육을 모조리 끊는 고통에 흑룡왕의 거대한 몸이 덜덜 떨렸다.
파앗!
그리고 무릎을 베어 내는 순간 거구가 앞으로 쏟아지듯 엎어졌다.
청명은 그의 머리를 짓밟으며 흑룡왕의 목에 검을 겨눴다.
“벌레는 벌레답게, 기면서 죽어야지. 안 그래?”
“으…… 으으…….”
“지옥에나 떨어져라.”
청명이 미련 없이 검을 내리쳤다.
하나 그 순간.
카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금속음과 함께 흑룡왕의 목으로 떨어지던 청명의 검이 옆으로 튕겨 밀려났다.
청명이 흑룡왕의 머리를 밟은 채로 시선을 돌렸다. 그 얼음장 같은 시선 끝에 놓인 건, 섬의 가장자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조각배 한 척이었다.
정확히는, 그 조각배에 타고 있는 한 사내였다.
“벌레라…….”
작은 배 위에 오롯이 선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화산검협.”
호선을 그린 그의 길쭉한 눈이 청명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와는 다르게…… 세상에는 그 벌레가 필요한 사람도 있단다.”
장일소를 싣고 온 조각배가 매화도의 모래톱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