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76화 (977/1,567)

976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지. (1)

‘강이 흘러가는 소리’라는 말은 사실 다소 어색하다.

개울은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깊은 강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강은 그저 도도히 흐를 뿐이다.

하지만 이곳 매화도에 선 이들은, 이 순간 분명 강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물결과 물결이 마주치며 빚어내는 일정한 음률과도 같은 그 소리를.

그만큼 지독한 고요와 침묵이 이 섬에 내려앉아 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화산의 삼대제자. 이제 겨우 약관이나 넘었을 젊은 검수가, 도산검림이라 불리는 강호에 절대적인 입지를 구축한 흑룡왕을 몰아붙이고 있다.

냉정하게 봤을 때, 두 사람이 입은 부상의 정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흑룡왕의 육체 곳곳은 베이고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그 커다란 몸과 강건함을 고려한다면 저 정도의 부상은 절대 치명상이라 말할 수 없다.

반면 청명의 부상은 한 손에 국한되어 있지만, 그 손은 거의 움직임이 불가능할 만큼 망가졌다.

손등은 살점이 거의 뜯겨나가 허연 뼈가 보일 정도고, 손바닥은 마치 저며 낸 것처럼 엉망이 되어 있으니까.

만약 누군가 지금 이곳에 도착하여 두 사람을 살핀다면 우위를 점한 이가 누군지 대답하기 어려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만큼은, 이 승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그 두 눈으로 지켜본 이들만큼은 감히 누구도 이 일합의 승부를 ‘무승부’라 칭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독한 위화감이 모두를 사로잡았다. 당연하다 여겨 왔던 상식이 붕괴하는 그 광경 앞에선 입이 있어도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다.

“…….”

무언가 말하려던 남궁명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의 심정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로 식은땀이 배어나 있었다.

‘대체 저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공포스럽다.

청명의 검은 분명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다. 남궁명 역시 남궁 성씨를 쓰는 이다. 천하제일검가(天下第一劍家)의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쳐 본 적 없는 남궁세가의 직계답게 그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한 번의 휘두름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집념이 담겨 있는지.

아니, 굳이 남궁의 성을 쓰지 않는다 해도 검을 쓰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만으로 이 광경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해도, 자신이 날카로운 검이 된 것처럼 극한까지 갈고닦는다 해도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무리야.’

저건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의지가 있다고 가능한 종류의 것도 아니다.

저 청명이라는 이는 그저 본질적으로 뭔가 다른 것이다.

대체 무엇이 저자를 저렇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검을 날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턱이 잘게 떨리고 피가 싸늘히 식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저 망할 인간이…….”

“쯧.”

그의 옆에 선 오검 사이에서 짜증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짜증이라기보단 노기가 어려 있다 해야 옳을 테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청명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괴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단숨에 남궁명을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사로잡아 버린 청명이 제 옷을 찢어 내고 있었다.

찌이이이이이익!

청명이 찢은 옷자락으로 엉망이 된 좌수를 칭칭 동여맸다.

“쯧.”

한창 적을 몰아치는 와중에 제 몸을 돌본다는 건 본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을 죽이는 것보다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면서도 싸우는 와중에 제 부상을 돌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지금 그는 어설프게나마 옷자락을 붕대 삼아 제 손을 감고 있었다. 그를 죽일 듯 노려보는 눈빛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망할 놈들.’

백천과 조걸, 윤종이 도끼눈을 뜨고 있었고, 유이설은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청명의 목을 졸라 버릴 기세였다. 특히나 그 뒤에서 살기를 뿜어 대는 당소소의 얼굴은 차마 보지도 못할 만큼 무서웠다.

다친 손을 여미며 청명은 피식 웃었다.

남 눈이 무서워서 전투 중에 부상당한 곳을 돌보다니, 당보 놈이 봤으면 거품을 물고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꾸욱!

이로 문 천자락을 당겨 손을 마저 동여맨 청명은 입술에 달라붙은 모래를 뱉어 내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 슬쩍 웃었다.

때맞춰 흑룡왕이 그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노기를 가까스로 참아내는 듯 짓깨문 그의 입술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닥을 찍은 그의 언월도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

순간 흑룡왕의 전신에서 광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수적들 중 혼절하여 쓰러지는 이가 여기저기서 보일 정도였다. 화산의 제자들마저 흠칫할 만큼 어마어마한 기운.

“쥐새끼 같은 놈이!”

흑룡왕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게 다 뭐란 말인가?

저 속도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저 망할 놈과 붙어 입은 부상 중 ‘실력’으로 밀려 입은 부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 부상을 돌보지 않고 억지로 밀어붙이는 담력과 말도 안 되는 임기응변, 그리고 저 미친놈의 광기가 만들어 낸 결과다.

겉으로는 욕을 내뱉었지만, 그의 얼굴은 더없이 신중한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놈은 지독하게 전투에 익숙하다.’

아니, 사실 지독하단 말은 그가 조금 전 겪은 일을 모두 표현하기에 조악했다. 평소 배움을 천시하는 그조차 이 순간 저 광기와 독기를 표현할 단어를 찾아내지 못함을 쓰리게 느낄 정도였다.

보통의 무인은 상대의 틈을 기다린다. 그리고 절정의 무인은 제 힘으로 상대의 빈틈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저놈은 겨우 그런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제로 비틀어 만들어 낸 틈에 손톱과 송곳니를 박아 넣고 상처를 헤집어 벌리는 수준이다.

저벅. 저벅.

그는 손에 두른 옷자락을 이로 다시 한번 단단히 당겨 묶으며 다가오는 청명을 응시했다.

그 발소리조차 위압적이었다.

으득.

흑룡왕은 이를 악물었다.

범에게 먼저 다가가는 토끼는 없다. 적어도 전투 중에 자신이 먼저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우위를 점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흑룡왕의 높고도 높은 자존심이 갈가리 찢길 만한 상황이지만, 그는 평소처럼 소리 높여 욕하고 고함치는 대신에 천천히 언월도를 앞으로 겨눴다.

그 동작은 한없이 신중했다.

그건 인정을 상징했다. 눈앞에 선 작은 검수를,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대적(大敵)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어떠한 강자라도 처음부터 강자일 수는 없다. 그 역시 자신보다 강한 이들의 틈에서 살아남아 이곳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폭풍처럼 주위를 휩쓰는 대신, 이젠 칼날과도 같은 날 선 살기가 그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청명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제야 좀 해볼 만하겠네.”

“건방 떨지 마라. 애송…….”

흑룡왕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입이라도 틀어막은 듯했다. 차마 저 미친 도사 놈을 애송이라 부를 수 없어서였다.

“큭.”

입술을 짓뭉개듯 입을 다문 흑룡왕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알고 있다.

결과는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저자가 강하면 강한 만큼 결국 승리했을 때, 흑룡왕에게 돌아오는 찬사 역시 드높을 것이다.

그러니…….

호흡을 가다듬은 흑룡왕의 발끝이 느릿하게 모래를 밀어 낸다. 호흡에 따라 언월도가 자연스레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던 그의 눈이 무사의 눈으로 천천히 바뀌어 갔다.

촤악!

발끝이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검은 흑룡왕의 인영이 환상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헤집은 모래가 위로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흑룡왕의 몸이 청명의 면전에 도달했다.

휘윅!

짧고 빠른 찌르기가 이어졌다.

패도만을 앞세운 공격이 아니다. 창보다 더 긴 장병, 언월도의 이점을 극도로 활용한 찌르기. 첫 번째 찌르기가 채 끝까지 뻗어지기도 전에 수십으로 갈린 도의 잔영이 청명의 전신을 휩쓸 기세로 쏟아졌다.

청명이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하지만 그 순간 흑룡왕이 내지른 잔영들이 배는 더 길게 뻗어 오며 뒤쫓았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청명은 허공의 한 지점을 향해 날아드는 독사처럼 검을 내뻗었다.

카강!

도기 사이를 정확하게 파고든 청명의 검이 좌우로 크게 튕기며 밀려오는 공격을 좌우로 밀어 냈다. 그렇게 공간을 쥐어짜듯 만들어 낸 틈으로 청명이 검을 날리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잉!

마치 휘파람 소리 같은 파공음과 함께 청명이 만들어 낸 공간 사이로 흑룡왕의 도가 빛살처럼 쇄도했다. 청명은 순간적으로 손을 뒤틀어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카아아아앙!

검과 도의 날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청명의 몸이 뒤쪽으로 튕겨 올랐다.

그 순간 흑룡왕이 도를 고쳐잡았다.

콰앙!

그의 발이 땅을 터뜨릴 듯 진각을 밟음과 동시에, 치켜 올려진 도가 허공을 맹렬히 그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도 끝에서 먹빛 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마치 허공에 거대한 붓으로 일필휘지 선을 그어 낸 것과 같은 광경!

자신을 산산이 부술 듯 날아드는 도기에 맞서, 청명은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검을 등 뒤로 있는 대로 젖혔다.

“흐아아아아압!”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진 청명의 검 끝에서 붉은 반월형 검기가 발출되었다. 저무는 노을의 빛을 닮은 검기가 날아드는 먹빛 도기와 정면에서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 두 기운이 맞붙는 순간, 대포라도 쏜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허공에서 거대한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쿠웅!

그 순간 흑룡왕의 도 끝에 서린 먹빛의 도기가 휘몰아쳤다. 삽시간에 집채만 하게 불어난 도기는 응축되고 또 응축돼 하나의 선으로 화했다. 그러더니 이내 도를 감싸고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후오오오오오오오!”

흑룡왕이 목이 터져라 사자후를 터뜨렸다. 그러자 기운이 더 상승하며 언월도는 이내 폭발적으로 회전하는 검은 도기에 완전히 휘감겼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가 대기를 찢어발기듯 도를 내리그었다. 도에서 뻗어져 나간 도강(刀剛)이 하늘이라는 화폭에 거칠디거친 아홉 줄기의 선을 그어 냈다.

구룡출진(九龍出陣)!

아홉 마리의 검은 용이 청명을 향해 날아드는 것만 같다.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지켜보던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청명아아아아아!”

하지만 그 순간, 허공에 붉은 점 하나가 떠올랐다.

물빛 하늘, 그리고 선명하게 푸르른 강. 그 화폭과도 같은 세상 속에서 붉은 꽃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폭발적인 개화.

수십, 수백을 넘어 수천에 이르기까지 피고 또 핀 매화가 허공에 거대한 벽을 만들어 냈다. 푸르디푸른 하늘에 순식간에 노을이 번져 오는 듯이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아홉 마리의 용이 서로 얽히며 그들을 가로막는 붉은 매화의 벽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산 하나가 무너져 버리는 듯한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붉고 검은 기운들이 폭죽처럼 터지며 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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