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5화. 영광인 줄 알라고, 애송이. (5)
검에 베인 옆구리가 욱신거리더니 이내 끔찍한 격통이 밀려들었다.
흑룡왕은 결코 어리석은 이가 아니다. 그의 행동과 거친 언사는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다. 외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그의 이성은 주로 차갑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마 옆구리의 격통이 아니었다면, 이 상황이 꿈인가 의심했을 것이다.
‘안 보였다.’
그놈의 모습도, 그 검도.
‘방심?’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흑룡왕은 전력을 다하고자 결심했었다. 이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전장의 흐름을 수로채 쪽으로 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과제가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방심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았다. 전혀.
‘어떻게…….’
등을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렇다면 그건 저자의 속도가 정말 그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다는 뜻인데, 이제 겨우 약관이나 넘었을 애송이가?
‘말도 안 돼!’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흑룡왕이 어리석기 않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반드시 그 한계가 존재한다.
집채만 한 곰을 찢어발기고, 바위를 으스러뜨리는 범은 존재할 수 있다. 천 년에 한 번, 만 년에 한 번은 그런 범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범은 이미 ‘범’이라는 말의 범주를 넘어서는 존재이지 않은가? 사람은 산만 한 범은 상상할 수 있어도 하늘을 나는 범은 상상하지 않는다. 그게 ‘상식’이다.
지금 그가 본 청명의 무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하늘을 날며 벼락을 떨어뜨리는 범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으라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욱신! 욱신!
그의 상처와 본능은 상대에게서 물러서라 외친다.
하지만 이성은 결코 이곳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본능과 이성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흑룡왕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휘릭.
검을 돌려 잡은 청명이 흑룡왕을 향해 걸어왔다.
움찔.
흑룡왕은 저도 모르게 뒤로 움직이려는 발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천하의 흑룡왕이 저런 애송이를 상대로 물러선다? 그가 설령 청명을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고 해도 평생 사라지지 않을 수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강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그는 물러설 수 없다. 여기서 물러나는 순간 그는 흑룡왕이라 불릴 자격을 잃게 된다. 수로채는 사분오열될 것이고, 그는 평생 손가락질에 시달리며 살게 될 것이다.
사파는 비열해도 된다. 하지만 결코 웃음거리만은 되지 않아야 한다.
쿠웅!
흑룡왕이 제 마음을 다잡으며 언월도로 강하게 땅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양손으로 도를 잡은 채 청명을 겨누었다.
“후욱!”
모두 잊는다.
과거에 저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어떻게 불과 삼 년이라는 시간 만에 이토록 강해졌는지. 그런 건 이 승부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저놈을 어떻게 죽일지다!
“노오오오오오옴!”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 취할 수 있는 최선은 방어. 하지만 흑룡왕은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었다. 상대의 흐름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거대한 언월도를 든 그가 폭발적으로 질주하는 모습은 그 모습만으로도 상대의 숨을 끊어 버릴 만큼 강렬했다. 도 끝에서 뿜어나오는 먹색 도기가 허공에 그려 내는 선은 모두의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기세는 적어도 청명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맹렬하게 질주해 오는 흑룡왕을 보면서도 청명의 두 눈은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는 그에게 다가가는 걸음걸이에조차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그의 두 눈에는 흑룡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콰아아아앙!
내뻗은 진각이 섬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베인 허리에서 피가 울컥 뿜어져 나올 정도로 강력한 진각과 함께 그 힘을 낭비 없이 모조리 끌어 올린 흑룡왕은 비틀어 쳐 올린 도를 있는 힘을 다해 내리그었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앗!
그 소리에, 모든 이들의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저건 기세나 내력 같은 게 아니다. 그의 내력은 지금 외부로 한 톨도 뿜어지지 않고 온전히 저 도에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저 파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롯이 흑룡왕의 육체였다.
숱하게 단련된 육체가 마치 고무 같은 탄력을 가지고 맹렬하게 회전하며 그 힘을 온전히 도에 담는다. 그 과정만으로도 그의 육체는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육체의 힘과 내력을 모조리 담은 도는 천지를 양단할 것처럼 떨어져 내린다.
보고 있는 백천조차 주먹을 움켜쥐고 전신의 근육을 팽팽히 당겨야 할 정도로 대단한 일도(一刀)가 청명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놈!’
하지만 그 순간 흑룡왕의 두 눈엔 의아함이 차올랐다.
도가 머리를 조각 내 버릴 듯 떨어지고 있건만, 청명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피하려는 움직임도, 막아 내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관조하는 듯한 눈으로 흑룡왕과 떨어지는 도를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래로 늘어져 있던 검이 순간 벼락처럼 솟구쳐 올랐다. 청명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그의 도를 향해서.
흑룡왕은 도로 밀려 들어가는 내력의 양을 반사적으로 증폭시켰다.
쿠웅!
그건 외부가 아닌 흑룡왕의 안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도와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둔중하다는 말이 딱 어울릴 만한 충격이 그의 안을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저 검에 실린 힘은 그의 도를 막기에는 너무도 나약했다.
‘고작!’
그는 청명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번에 쪼개 버릴 기세로 움켜쥔 도에 힘을 실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와 맞붙어 있던 청명의 검이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힘없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파아아아앗!
튕겨 나갔던 검이 다시 빛살처럼 날아들어 흑룡왕의 도와 부딪쳤다.
쿠웅! 쿠웅! 쿠웅!
흑룡왕의 귀 안에서, 밖이 아닌 안에서 둔중하고도 커다란 푹음이 연이어 터졌다.
그 폭음의 근원은 다름 아닌 그가 쥔 도였다. 그의 도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진동하며 그의 몸을 마치 커다란 북처럼 울리게 하고 있었다.
‘이, 이게……!’
흑룡왕은 똑똑히 보았다.
한낱 날붙이에 불과하지만, 결코 날붙이로만 치부할 수 없는 그 검이 도와 청명 사이의 짧은 거리에 수많은 궤적을 그려 내는 광경을 말이다.
그건 마치 유성우 같았다. 땅에서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유성우.
밤하늘을 수놓은 별의 명멸처럼, 환상 같은 궤적을 그린 검기가 흑룡왕의 도를 말 그대로 난타하고 있었다.
일 검 일 검에 실린 힘은 감히 흑룡왕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첫 번째 검격과 충돌한 여력이 채 해소되기도 전에 두 번째 검격이 도를 후려쳤고, 그 힘이 몸에 전해지기도 전에 세 번째 검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수십 번의 연타가 이어졌다.
찰나의 순간을 수십으로 쪼개어 날린 듯한 그 연타의 힘이 도의 중앙에 모인 순간,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흑룡왕의 도가 튕겨 나간 것이다.
구 척에 이르는 언월도. 다른 이도 아니고 흑룡왕이 전력으로 휘두른 언월도가 얇디얇은 검과 맞부딪혀 튕겨 오르는 광경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충격을 가장 극단적으로 겪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흑룡왕일 터.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쾅!
그 충격이 채 머리에 닿기도 전에 흑룡왕이 땅을 박찼다. 도가 그의 통제를 잃은 이상 이자의 거리 안에 있는 것은 위험하단 사실을 본능이 먼저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청명.
그가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청명이 귀신같이 따라붙었다.
서걱!
이윽고 흑룡왕의 두꺼운 대흉근이 청명의 검에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베여 갈라졌다. 가슴이 갈라지는 감각을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소름 끼치는 건 따로 있었다.
일그러진 눈가, 한껏 말려 올라간 입꼬리, 그 입술 새로 드러난 새하얀 이를 보는 순간, 흑룡왕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참아 내지 못한 흑룡왕이 발작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압!”
튕겨 나갔던 도가 날아드는 청명의 머리를 향해 다시금 쇄도했다.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의 검이 언월도의 중앙을 잡은 흑룡왕의 손목으로 단숨에 파고들었다.
콰득!
강철 같은 근육이 찢기고, 날카로운 금속이 뼈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서늘한 감각보다 더욱 지독한 냉기가 흑룡왕의 가슴을 싸늘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오오오오오오!”
흑룡왕은 흑룡왕이다. 제 손목에 파고든 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언월도를 휘둘렀다. 손목이 잘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청명을 쪼개 버리겠다는 듯이.
하지만 그 순간 흑룡왕은 알아야 했다.
세상에는 그보다 미친놈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콰드드득!
채 반도 휘둘러지지 않은 언월도의 날을 무엇인가가 막아 냈다. 자신의 언월도를 막아 세운 것의 정체를 확인한 흑룡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손?’
우수로 휘두른 검을 흑룡왕의 손목에 박아 넣은 청명이 왼쪽 손으로는 흑룡왕의 언월도를 그대로 움켜잡아 버린 것이다.
당연히 손이 쩌억 갈라지고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 피 사이로 보이는 청명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득!
미련 없이 흑룡왕의 손목에서 빠져나온 검은 곧장 수십 개의 검영을 쏟아 내었다.
흑룡왕은 반사적으로 기다란 창대를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도 날에 달라붙은 손은 아교라도 바른 듯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이 개 같은!’
흑룡왕은 내력을 끌어 올려 도기를 발출했다. 도를 잡은 손이 도기에 휩쓸리며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흑룡왕 역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서걱!
상완에 선명한 붉은 선이 새겨졌다.
서걱!
허벅지를 파고든 검영이 그의 근육을 모조리 끊어 놓았다.
푸욱!
옆구리를 파고든 검은 그의 강철과도 같은 복근에 아이 주먹만 한 시커먼 구멍을 뚫어 냈다.
몸 곳곳에서 강렬한 격통이 번지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아악!”
또다시 제 복부를 파고드는 검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흑룡왕의 두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이를 악문 그는 복부에 내력을 집중하고 제 배를 파고든 검을 조였다. 그리고 청명을 향해 언월도를 밀어 쳤다.
‘검만 없으면!’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언월도의 창대를 보며 청명은 비뚜름한 미소를 흘렸다.
잠시 후, 흑룡왕이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청명이 흑룡왕의 배에 꽂힌 제 검을 놓아 버린 것이다.
‘뭐?’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버린 흑룡왕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청명이 너덜너덜해진 손을 뻗어 흑룡왕이 날린 창대를 움켜잡았다. 반쯤 덜렁대던 그의 손등 살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찢겨 흩뿌려지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흑룡왕이 본 것은, 제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청명의 무릎이었다.
콰아아아아앙!
흑룡왕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간 그가 모래톱에 처박힌 순간, 섬 전체에 쥐 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쿨럭!”
짧게 경련한 흑룡왕이 피를 울컥 토해 냈다.
덜덜 떨며 상체를 일으키니 여전히 배에 박혀 있는 청명의 검이 보였다.
“……미친……미친놈이…….”
세상이 이런 놈이 어디에 있는가?
심지어는 사파도 저렇게 싸우지 않는다. 아무리 악독한 놈이라도 제 몸뚱이를 저따위로 던져 가며 싸우지는 않는다.
저건 말 그대로, 미친놈이었다.
충격에 흐릿해진 시야에, 청명이 너덜거리는 제 좌수를 내려다보는 광경이 들어왔다. 말없이 심드렁하게 손을 보던 그는 귀찮다는 듯 손에 흐르는 피를 털었다.
“검.”
청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흰빛 도는 검 한 자루가 날아왔다. 그는 손을 뻗어 날아드는 검을 움켜잡고는 씩 웃었다.
“좋아.”
처음 이 섬으로 던졌던 암향매화검이었다. 조걸이 눈치 좋게 되찾아 온 것이다.
손에 감기는 그 느낌이 마음에 든다는 듯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되찾은 그는 다시 흑룡왕에게 시선을 던지며 발을 옮겼다.
또옥. 또옥.
그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좌수에서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모래 위에 점점이 뿌려졌다. 그건 다른 의미로 섬뜩한 광경이었다.
“일어나.”
청명의 입에서 북풍의 한기보다 더 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에 구멍 좀 뚫린 걸로 엄살 부리지 마.”
전쟁을 안다고? 너희가?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맺혔다.
“내가 알려 주지. 너희가 하는 애들 장난 같은 전쟁이 아니라, 진짜 전쟁이 뭔지.”
순간 청명의 눈빛에 어린 광기를 본 이들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