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4화. 영광인 줄 알라고, 애송이. (4)
상황을 지켜보던 남궁명의 얼굴엔 황망한 기색이 깃들었다.
‘뭐라고?’
누가 누굴 상대한다고?
모두의 앞에 선 한 남자의 등을 응시하며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물론 저자는 그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후기지수와 궤를 달리하는 존재다. 그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남궁명뿐만 아니라 현재의 강호를 통틀어도 저 화산검협을 흔한 후기지수 따위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강호에 아직 그런 이가 남아 있다면, 그는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천치거나 누군가의 빛나는 위명을 질투하는 머저리에 불과하다.
후기지수 중 첫손에 꼽히며, 객관적으로 보아도 남궁세가를 통틀어 손꼽히는 가주가 될 자질을 지닌 남궁도위조차도 비교 대상이 저 화산검협이어서는 초라해질 뿐이다.
화산검협은 그만큼 격이 다른 존재다.
하지만…….
남궁명의 시선이 그 등을 넘어 흑룡왕에게 닿았다.
‘그것도 상대 나름이잖은가?’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남궁도위의 위명과 실력이 저 화산검협 앞에서는 빛이 바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화산검협의 위명도 흑룡왕의 이름 앞에서는 초라해진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화산검협이라는 별호에 담긴 것은, 그저 그가 보여 준 협의에 대한 존중과 훗날 그의 검이 도달할 곳에 대한 기대다. 굳이 하나를 더 논하자면 그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찬사 정도일 터.
하지만 흑룡왕은 아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존중도 받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 실력만으로 천하의 모두가 인정할 만큼 명성을 쌓아 올린 자다.
남궁명이 핏발 선 눈으로 흑룡왕을 노려보았다.
심지어는 남궁세가의 가주였던, 제왕검 남궁황마저도 저 흑룡왕과의 격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저 흑룡왕의 마수에 끝내 명을 달리하지 않았던가?
누구보다 흑룡왕을 증오하는 남궁명이지만 저 흑룡왕이 천하에 손꼽히는 강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 흑룡왕을 화산검협이 상대한다고?
‘이건 미친 짓이야.’
몇 번을 생각해 봐도 흑룡왕의 칼날 아래 찢겨 죽는 화산검협의 모습밖에는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아무도 말리지 않는 건가! 왜!’
삼대제자에 불과한 화산검협이 단신으로 흑룡왕을 상대하러 나섰음에도 화산의 문도 중 누구도 막으려 드는 이가 없다.
그저 검을 아래로 내린 채, 묵묵히 그의 뒤를 지킬 뿐이었다.
“으…….”
남궁명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았다. 이 화산이라는 문파는 더없이 강하고 협의심이 넘치지만, 아직 저 흑룡왕이란 존재의 힘을 이해할 만한 경험이 없다는 것.
절대 고수란 결코 흔한 존재가 아니다. 당연히 있어야 했던, 이전 세대를 상실한 화산이라면 저 흑룡왕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남궁명이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가주께서는 어째서 침묵하시는 겁니까?’
이곳에서 저 흑룡왕을 상대로 나서야 할 이가 있다면, 당연히 당군악이다. 물론 독왕의 위명은 흑룡왕이라는 거대한 이름에 비한다면 살짝 손색이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당가의 가주가 아닌가. 적어도 흑룡왕과 같은 ‘격’을 갖춘 이다.
하지만 남궁명의 시선을 분명히 느꼈을 텐데도, 당군악은 표정 없는 얼굴로 청명과 흑룡왕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궁명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들은 정말 저 화산검협을 흑룡왕의 상대로 내밀 생각인 것이다.
‘안 돼.’
그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된다.
저자는 분명 훗날 강호의 상징이 될 것이다. 그런 이가 이런 곳에서 저런 무도한 자의 도에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적어도 남궁명은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걸어 준 이의 죽음을 방관할 만큼 염치가 없지 않았다.
“나라도…….”
남궁명이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가 흑룡왕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면 뒤집힌 이 전장의 흐름을 조금은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턱.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소, 소가주?”
남궁명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정신을 차린 남궁도위가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남궁도위는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을 열었다.
“안 됩니다.”
“……무슨?”
“그저 지켜보십시오.”
입을 가리고 잔기침을 쏟아 낸 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훔쳤다. 그의 형형한 눈빛이 청명의 등을 향해 쏟아졌다.
남궁명은 멍한 얼굴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 담긴 굳건한 신뢰가 보였다. 멍하니 주위를 돌아보니 그제야 모두의 눈빛이 보였다.
‘방관하는 게 아니야…….’
모두 남궁도위와 같았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눈빛. 모두가 저 등을 신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산의 문도들은 물론이고, 저 당가와, 심지어는 당군악마저도.
“대체…….”
대체 이들은 저 화산검협에게서 무엇을 본 것인가?
무엇을 보았기에 이런 상황에서마저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저자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저 흑룡왕을 상대로.
“……저자가 흑룡왕을 이길 거란 말이냐?”
“예.”
믿기지 않는 대답에 남궁명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너는 저자의 무위를 보았느냐?”
“……정확히는 모릅니다.”
“한데 어찌……?”
남궁도위는 흐릿하게 미소를 흘렸다.
“저들이 지켜보고 있잖습니까.”
그가 말한 건 오검,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짧은 여정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지를.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는 것조차 아까워하지 않을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흔들림 없이 청명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니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남궁도위는 모두의 앞에 굳건히 선 등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언젠가는 저 청명처럼, 검이 아닌 그 뒷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을 이끌 수 있게 될까?
그는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청명의 등을 두 눈에 새겨 넣듯 응시했다.
장강의 바람이 청명과 흑룡왕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둘러싼 곳의 광경은 꽤 괴상하게 변해 있었다.
흑룡왕의 뒤편에 선 이들은 하나같이 그와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지시한 적 없음에도 그들 스스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다 보니 자연히 그런 형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청명이 선 곳은 다르다.
청명의 뒤편에 선 이들은 처음 자신이 자리했던 곳에서 단 한 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함께 싸우기라도 할 것처럼 뒤에서 흑룡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흑룡왕은 도를 꽉 움켜잡았다.
‘마음에 안 드는군.’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한 놈이 그를 상대하겠답시고 나선 꼴이 그의 자존심을 긁어 대고 있었다.
게다가 그 뒤에 선 놈들의 눈빛도 영 못마땅했다.
저들은 정말 이 어린놈이 그의 상대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아무래도 좋다.’
기분 같은 건 둘째 문제였다.
흑룡왕은 전장의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이다. 저 화산의 젊은 검수들은 생각 이상으로 강하고, 당가는 언제나 껄끄러운 적이다.
저들이 기세를 타게 된다면 몰살시킨다 한들, 수로채의 피해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터.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저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아야 했다.
이들 앞에서 그가 얼마나 강한지를 과시하고 대항할 의지를 꺾어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죽이는 걸로는 안 된다.’
흑룡왕의 두 눈에 흉악한 기운이 들어찼다.
감히 나선 저놈을 갈기갈기 찢어 그가 누구인지를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 주리라. 이들은 물론이고, 저 먼 배 위에서 느긋하게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장일소에게도!
“감히 내 앞에 선 것을 지옥에서 후회…….”
그 순간이었다.
검을 겨눈 채 그를 노려보던 청명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
반사적으로 내력을 끌어 올린 흑룡왕이 도를 당겨 제 목을 가렸다. 그건 수많은 실전 경험이 만들어 낸, 본능과도 같은 행위였다.
그리고 그 한 수가 흑룡왕을 살렸다.
카아아아아아아앙!
마치 유령처럼 훅 나타난 청명의 검을 흑룡왕의 언월도가 가까스로 막아 냈다.
카각! 카가가가각! 카각!
얇디얇은 검이 두껍기 짝이 없는 언월도를 밀어붙이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흑룡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한순간만 반응이 늦었다면, 저 검은 분명 그의 목에 틀어박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흑룡왕의 전신을 땀으로 젖게 만드는 것은 목숨이 위험했다는 위기감이 아니었다.
‘뭐냐, 이놈은?’
막아선 도와 흑룡왕의 목을 통째로 갈라 버리겠다는 듯 거칠게 밀고 들어오면서도 청명의 표정은 섬뜩할 만큼 무덤덤했다.
마치 관조하는 듯한 그 시선에, 흑룡왕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카가가가가가각!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검이 도를 찍어 눌렀다. 손목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기함한 흑룡왕의 입에서 짐승 같은 기합이 터져 나왔다.
“흐아아아압!”
반사적으로 내력을 끌어 올린 그는 전력을 다해 도를 앞으로 밀쳐 냈다.
하지만 그 순간 흑룡왕은 보았다.
그가 밀어 내는 순간, 아니 그가 도를 밀어 내기 직전에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정확하게 옆으로 물러서는 청명의 검을 말이다.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듯, 그 모든 것이 똑똑히 보였다.
있는 힘을 다해 밀어 낸 도는 이미 검이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헛되이 밀쳤다.
너무도 간단히 그의 힘을 흘려 버린 청명은, 이번엔 흑룡왕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아서 오히려 더 섬찟한 그 눈을 본 순간, 흑룡왕은 생각을 멈추고 전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날렸다.
쾅!
그 커다란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가공할 속도의 보법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 여장이 넘는 거리를 이동한 그의 턱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그는 멍하니 한 손을 들어 제 왼손을 바라보았다. 흰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다.
몸을 날리던 와중, 바닥을 짚었던 손이었다. 그 손에 배어난 땀이 치욕의 흔적을 손바닥 가득히 잡아 두고 있었다.
홀린 듯 손을 내려다보던 흑룡왕은 이번엔 제 옆구리를 살폈다. 그를 상징하는 흑색 무복과 그 안에 갖춰 입은 철갑이,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반듯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주르르륵.
그 사이로 드러난 옆구리는 손가락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쩍 벌어져 있었다.
고개를 든 흑룡왕의 시야에, 검을 내린 이의 등이 보였다.
그 뒷모습이 주는 위화감과 공포를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청명이 천천히 흑룡왕을 돌아보았다.
“운이 없군.”
싸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뚫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음성보다도 더 싸늘한 건 흑룡왕을 응시하는 청명의 눈빛이었다.
“고통 없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흑룡왕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땅에 고여 있던 피 위로 떨어졌다.
또옥.
그 희미한 소리가 지독한 정적으로 물든 매화도에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