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73화 (974/1,567)

973화. 영광인 줄 알라고, 애송이. (3)

어떤 전략가도 한번 무너진 전장의 흐름을 되돌릴 순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고대로부터 책사들이 최대한 희생 없이 달아나는 법 같은 걸 연구했을 리 있겠는가. 병법에선 상식과도 같은 일이다.

하지만 이곳은 강호. 일반적으로 논하는 병법과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하는 곳이다.

쿠웅!

흑룡왕이 발을 내디뎠다.

그저 한 발을 옮기는 행동에 불과하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마치 흑룡왕이 대지를 짓이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압도적인 패기와 위압감.

절대 고수라는 말을 어떤 이에게 써야 하는지 그 전신으로 증명하는 것과 같은 패도였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바다처럼 소용돌이치던 전장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수적들도, 당가도, 심지어 화산마저도.

이 피에 젖은 땅을 딛고 걸어오는 흑룡왕을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을 연상시키는 외양. 하지만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결코 신장의 그것이 아니었다.

“……머저리 같은 놈들.”

그의 입에서 들끓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수적들이 일제히 목을 움츠렸다.

절대고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전장의 흐름을 뒤틀 수 있다.

수로채란 본디 흑룡왕이 없으면 수적들이 모인 왈패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흑룡왕이라는 존재가 더해진 순간, 신주오패의 일원이 되었고, 사패련의 한 축을 이루는 장강수로십팔채가 된 것이다.

“흥!”

제 수하들을 버러지 보듯 일별한 흑룡왕은 화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 애송이 놈들이 감히…….”

쿠웅!

그 발이 땅을 부술 듯 짓밟았다.

“겁대가리도 없이 내 앞에서 날뛰어?”

그 말투는 삼류 무뢰한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본디 말이 가지는 격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 어조가 아니라 말하는 이 그 자체란 사실을 흑룡왕이 몸소 증명했다.

가공할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모두의 고막을 터뜨릴 기세로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언월도가 위협적으로 흔들리는 순간 화산의 검수들이 움찔하며 검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도 않는다.

그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저 흑룡왕에게서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흑룡왕.’

윤종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미 과거에 흑룡왕을 지척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장일소와 만인방에 모든 신경을 쏟느라 흑룡왕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제대로 눈앞에서 본 흑룡왕은, 뭐라고 해야 할까?

‘거칠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검을 든 이에게는 기본적으로 그런 인식이 있다.

강자에 대한 존중.

하루하루 자신을 갈고닦으며 가파르기 짝이 없는 무학이라는 절벽을 올라가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게 된다.

그만한 무위를 이룩하기 위해서 쏟았을 노력과 땀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심 바라게 된다.

절대고수.

감히 호칭 앞에 ‘절대’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이들은 최소한의 품격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야.’

흑룡왕은 다르다.

이자에게는 절대라는 수식이 붙은 고수들에게 있을 법한 최소한의 품격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위압하는 자이며,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믿는 건달에 가깝다.

하지만…… 윤종은 새삼스레 느꼈다.

도리와 법도를 무시하는 이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말이다.

힘을 과시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남을 위압하는 걸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그 과격한 무도함이 구토감마저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어째서 저자가 존재만으로도 이 많은 수적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잘도 날뛰어 주었구나.”

조소한 흑룡왕이 불을 뿜듯 소리쳤다.

“감히 이 섬에 제 발로 기어 들어온 것을 지옥에서 후회하게 해 주겠다! 한 놈도 남김없이 갈기갈기 찢어 물고기 밥으로 던져 주마!”

그극.

그 순간 땅에 박아 넣었던 검을 지탱하며 백천이 몸을 일으켰다.

“퉷!”

입 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 낸 그는 살기 어린 눈으로 흑룡왕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한 문파의 수장이라면.”

새파랗게 날이 선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지킬 줄 알아야지, 이 개자식아!”

남궁도위는 아직 소가주의 신분임에도 가솔들을 구하기 위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심지어는 그 목숨마저 강에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로채의 수장이라는 자가, 제 수하들의 등을 향해 도기를 날려 댄다?

이건 백천으로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 같은 화가 치밀었다.

사파이기에 맞섰고, 남궁이 위험하기에 도왔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의 원한은 장일소에게 가 있지, 흑룡왕에게로는 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록 옳지 못한 광경을 목도해 버린 이상 백천은 절대로 흑룡왕을 용서할 수 없었다.

“흐하하하하핫!”

하지만 흑룡왕은 크게 비웃고는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래. 꽤 있었지. 너처럼 입바른 소리를 내 앞에서 지껄이는 놈들이 말이다.”

느릿한 말투였지만, 강렬한 목소리와 기세는 그마저도 위압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그놈들이 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이…….”

백천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흑룡왕의 기세에 결코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모조리 저 푸른 강 속에 처박혔다. 그 제왕검인지 뭔지 하는 병신 놈도 마찬가지지.”

남궁황의 이름이 나오자 남궁세가의 생존자들이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여기저기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흑룡왕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커다란 분노에도 그들은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홧김에 흑룡왕에게 달려드는 것은 개죽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개죽음은 오히려 그들을 지키고자 했던 가주의 최후를 욕보이는 일인 것을 알기에.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개들은 제 편한 대로 짖어 대기 마련이지. 와 봐라, 이 애송이 도사 놈아. 그 아가리를 찢어 줄 테니까!”

당군악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좋지 않군.’

냉정하게 말해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제 발로 이 섬에 뛰어 들어와 스스로 포위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끝까지 기세를 이어 갔다면 모를까, 흑룡왕의 등장으로 발이 멈춰 버린 이상은 악전고투밖에 남아 있지 않다.

기세를 다시 끌어올릴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내가 나서야 하는가?’

아직 화산에는 이 짐이 무겁다. 화산이 놀랄 만큼 강해진 것은 사실이나, 홀로 흑룡왕을 상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터.

특히나 패배가 있어선 안 될 이런 전장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승산은?

모른다.

일정 이상의 영역에 이른 이들의 승부는 겨뤄 봐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건 영광 아니면 죽음뿐.

당군악은 결심을 굳혔다. 아직 그의 무학은 완성되지 않았다. 일대일로 이루어지는 승부에 취약점이 있는 당가의 무학 특성상 흑룡왕 정도 되는 이와의 전투는 분명 버거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나서야 할 때다. 대 사천당가의 가주가 이런 상황에서 꼬리를 말 수는 없으니까.

그가 막 발을 떼며 나서려는 그 순간이었다.

“아, 근데 요즘 애새끼들은…….”

어디선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당군악의 시선이 획 돌아갔다.

새파란 빛을 뿜어내는 검을 제 어깨에 걸친 채 청명이 느릿하게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화산검협.”

“아까부터 내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말이야.”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휘적휘적 걸어 백천의 반보 앞에 섰다.

“왜 하나같이 이렇게 주둥아리를 털어 대지? 별것도 아닌 것들이?”

“처, 청명아.”

“…….”

백천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청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상 누가 감히 저 흑룡왕의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이건 소림의 법정도 사패련의 장일소도 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이 새끼는 할 수 있지.’

청명이니까.

그래, 청명이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이놈의 악명은 저 흑룡왕도 들어 본 적 있는 모양이었다.

흑룡왕은 앞으로 나선 청명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군. 그래, 네놈이 분명 그 화산검협이었지.”

“어, 나도 너 알아. 네가 그 흑룡왕이지.”

“…….”

흑룡왕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하하하핫!”

한참을 웃어 대던 그는 고개를 내젓더니 삽시간에 정색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애송아. 허세로 겁을 감추는 건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그런 건 내게 통하지 않는다. 그래도 걱정할 건 없다. 목이 잘려 저 강에 던져지면 오줌 지린 바짓가랑이 정도는 숨길 수 있을 테니까.”

흑룡왕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러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세상 참 좋아졌다.”

“……뭐?”

“사파 새끼가 내 앞에서 아가리도 털고 말이야.”

흑룡왕의 두 눈에 황망함이 어렸다.

수로채의 수장이 되고, 흑룡왕이라는 별호를 얻은 뒤로……. 아니, 그 이전부터도.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있었던가?

“이…….”

흑룡왕의 두 눈이 광포한 살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이…… 주제도 모르는 놈이, 장강에서 장일소 그 샌님과 좀 어울렸다고 제가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이로군.”

“남의 부끄러운 과거는 함부로 지껄여 대는 거 아니야.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 이불을 걷어찬다, 이 새끼야.”

“……뭐라?”

우득. 우득.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려서 언짢은 듯한 모양새였다.

“떠올릴수록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더니 자신도 우습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 설쳐 대는 꼴도.”

“…….”

“그 꼴을 보고 있어야 하는 나도 말이야.”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화산은 오늘 이 장강 위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증명했다. 그들이 이 장강 위에 남긴 것들은 모두의 입을 통해 천하로 전해질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청명이 보여 줄 차례다.

그가 지난 삼 년 동안 무엇을 이루었는지 말이다.

“농담은 거기까지다.”

흑룡왕이 살기를 내뿜으며 청명을 향해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언월도에서 검은 도기가 먹물처럼 흘렀다.

“모두 한꺼번에 덤벼도 상관없다. 내가 어째서 흑룡왕이라 불리는지 똑똑히 알게 해 주마!”

이윽고 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기세에 모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수적들은 목을 조이는 듯한 위압감에 감히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분분히 물러났다.

품격을 갖추었는지는 별개로, 강자로서의 위엄은 확실했다. 마치 그 육체로 패도를 구현한 것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모두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여튼 사파 새끼들은 머리가 나쁜가, 말귀를 영 못 알아 처먹는다니까.”

오직 청명만이 흑룡왕의 맞은편에서 태연히 어깨에 걸친 검을 까딱댔다.

“사파 새끼에게는 과분한 일이겠지만, 내가 특별히 한 수 알려 주지.”

입술이 비틀리며 늑대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영광인 줄 알라고, 애송이.”

청명이 천천히 검을 어깨에서 내려 광포한 기세를 흘리는 흑룡왕을 겨누었다.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