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2화. 영광인 줄 알라고, 애송이. (2)
“이, 이익! 죽어라!”
남궁평의 목을 향해 작살이 쾌속하게 날아들어 왔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남궁평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
카강!
어디선가 빛살처럼 날아온 검이 남궁평의 목을 노리던 작살을 과격하게 쳐 냈다. 그러고도 기세를 잃지 않은 검은 작살을 든 수적의 목을 그대로 꿰뚫었다.
푸우우우웃!
남궁평은 수적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멍하니 보았다.
“뒤로.”
“…….”
“뒤로.”
“예? 아……. 예!”
남궁평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슬쩍 그를 일별한 여검수가 두말없이 남궁평의 앞에 버티고 섰다.
그게 시작이었다.
“오오오오오오!”
마치 산사태 같다.
거칠게 산비탈로 쏟아지는 토사처럼, 검은 물결이 수적들 사이에 난 길을 타고 밀려들었다.
검은 무복과 대비되는 흰빛 검이 바람처럼 허공을 갈랐다.
남궁세가를 몰아치던 수적들에게 있어서는 재앙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남궁세가의 입장에선 공격해 오는 수적들이 맹수나 다름없었지만, 거대한 흐름을 이루며 밀고 들어오는 화산의 앞에서는 그저 쓸려 가는 나뭇잎에 지나지 않았다.
파아아아앗!
앞으로 치고 나온 화산의 검수들이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마치 한 사람이 휘두르는 듯 같은 궤적을 그리는 십여 개의 검이 갈피를 잡지 못하던 수적들의 가슴을 차갑게 파고들었다.
“아아아아아아악!”
“개, 개 같은……. 끄윽…….”
동료들이 순식간에 고혼이 되는 광경을 코앞에서 본 수적들의 두 눈엔 공포가 어렸다.
뜻보다 이익을 좇는 이들은 우세를 잡았을 때 세상 누구보다 잔인하고 과격해지지만, 제 목숨이 위험해지는 순간에는 세상 누구보다 겁쟁이가 되어 버린다.
당연한 일이다. 제 목숨을 가장 중요시하는 이들이 죽을 게 뻔한 전장에서 버텨야 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그들에게는 불행스럽게도, 이곳에는 그런 사파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이가 있었다.
쾅!
누군가가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소리쳤다.
“부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섯 줄기의 검은 인영이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백천, 유이설, 윤종, 혜연. 그리고 전력을 다해 본대를 따라잡은 조걸까지.
그들은 마치 청명이 휘두르는 검이 된 것처럼 그의 의지를 이행한다.
“쳐라!”
백천의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 사람의 검에서 일제히 붉은 매화가 피어났다.
지금까지 보였던 실용적인 검로가 아닌, 더없이 화려한 검로였다.
마치 이 매화도를 붉은 매화로 뒤덮어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네 사람의 검에선 매화가 수도 없이 요사스럽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중앙.
“아—미—타—불!”
장엄한 불호와 함께 황금빛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불광보조(佛光普照)!
남궁세가를 둘러싸듯 피어오른 붉은 매화 사이로 장엄한 불광이 솟구치는 광경은 실로 압도적이기 그지없었다.
파라라락!
휘날리듯 날아오른 매화잎이 수적들을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일선에 선 수적들에게는 황금빛 경기가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아아아아아악!”
불광에 얻어맞은 이들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아악! 내 팔!”
“컥…….”
날카로운 매화 검기에 뒤덮인 이들 역시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꽃잎처럼 가볍게 휘날리는 검기는 그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도 날카로웠다.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지고, 정통으로 얻어맞으면 뼈가 갈라진다.
수많은 이들이 밀집된 이 공간에서 이 지독한 꽃잎들은 그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
다른 이들도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남궁을 지켜라!”
백상의 고함과 함께 화산의 검수들이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섬전처럼 달려든 그들은 겁에 질려 물러나는 수적들을 들이받듯 찔렀다.
“으라차아아아아!”
파아아앗!
내질러진 백상의 검이 수적의 가슴 정중앙을 파고들었다. 단숨에 상대를 무력화시킨 그는 곧장 검을 뽑아내고 다음 수적을 향해 달렸다.
피를 뿜고 쓰러지던 수적이 마지막 발악처럼 작살을 찔렀지만 백상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카강!
뒤따르던 곽회가 그에게 날아드는 작살을 쳐 내 주었으니까.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남은 것은 오직 뒤를 따르는 이에게 맡길 뿐. 그의 뒤를 따르는 그의 사제들과 사질들은 결코 그에 못지않다.
믿지 못할 이유 따위는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는 차가워야지.”
그 순간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백상이 몸을 퍼뜩 떨었다.
“예, 사숙!”
쇄애애애액!
백상을 노리던 수적 하나를 가볍게 처리한 운검이 냉정한 눈으로 주변을 한차례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화산의 제자들이 검을 고쳐잡으며 들끓던 피를 조금씩 가라앉힌다. 눈에 다시 침착함이 돌아왔다.
타악!
그때, 솟아올랐던 오검이 남궁의 사방을 지키듯 내려섰다.
“이, 이 빌어먹을! 겨우 저 숫자에 뭘 겁을 먹고 있는 거야! 당장 저놈들을 짓밟아 버……. 끄윽!”
발악하던 수적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뒤로 스르륵 넘어갔다.
이마에 새파란 비도가 지독할 만큼 깊게 박혀 있었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내 얼굴! 내 얼구우우우우울!”
또다시 쏟아지는 비침과 표창에 포위진의 일각이 와르르 무너졌다. 어깨가 맞닿을 만큼 밀집해 있었으니 암기를 피할 활로 따윈 없었다.
수로채의 자랑이었던 머릿수가 되레 방해 요소가 된 상황. 거꾸로 말하자면 당가의 입장에서 이보다 편한 싸움이 있을 리 없다.
앞에서 달려드는 적들은 화산이 모조리 베어 내 준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암기를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방어가 필요치 않은 전장에서 당가는 최고의 효율을 발휘한다.
“흠.”
과거 청명을 처음 만났던 때처럼 싸늘한 눈으로 수적들을 노려본 당군악이 씹어뱉듯 말했다.
“놈들에게 진정한 고통이 뭔지를 알려 줘라.”
“예!”
가주의 명이 떨어지자 당가의 식솔들은 더욱 쾌속하게 손을 휘둘렀다. 소매 안에 들어갔던 손이 뽑혀 나올 때마다 수적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쏟아졌다.
이 상황을 믿지 못하고 경계를 풀지 못하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멍하니 화산과 당가를 바라보다 마침내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왔……어.”
“정말……. 정말 지원이 왔어…….”
차마 ‘살았다’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제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섬을 점거하는 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 섬을 빠져나가야 진짜 살아남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머리에서 하는 말일 뿐, 그들의 가슴이 하는 말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남궁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남궁명에게 안겨 의식을 잃은 이에게로.
“…….”
축 늘어진 남궁도위를 보고 있으니, 참으려고 해도 자꾸 두 눈이 시큰거리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소가주…….”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가.
몸이 걸레짝이 되도록 혹사를 당한 것은 차라리 작은 일이다. 남궁도위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가주이자 아버지인 남궁황마저 희생시켰다.
그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곳까지 달려왔을지를 생각하면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궁도위가 기어이 이끌고 온 이들이 지금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밀어붙여!”
화산, 그리고 당가.
저들이 남궁을 위해 달려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저 구파마저도 그들을 버렸다. 혈맹이라 믿었던 오대세가는 이곳에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화산과, 오대세가에서 이탈하여 앙숙이 되었던 당가는 그들을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이 매화도에 발을 들였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남궁세가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다.
대체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일어서서 검을 들어라!”
그 순간 남궁명이 남궁도위를 움켜잡은 채 고함을 질렀다.
“아직 검을 잡을 힘이 있다면 악을 써서라도 일어나라! 너희는 남궁의 무사다.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주저앉아 기다리는 머저리가 될 셈이냐! 희생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희생해야 하고, 출혈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피 흘려야 한다! 저들의 의기를 당연히 여기지 마라!”
그 말에 모두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눈에 독기가 다시 들어차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어찌어찌 몸을 일으킨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휘청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화산의 검수들과 합류하기 위해.
그 광경을 본 청명이 피식 웃어 버렸다.
‘여하튼 머저리들이.’
지칠 대로 지쳐 도움은 바라기도 어려운 놈들이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구해 주기만을 기다리진 않는다.
‘하긴, 그래야 남궁이지.’
예전부터 남궁세가는 자존심 하나로는 천하제일이었으니까.
청명의 시선이 차갑게 전장을 관조했다. 뜨거운 전장의 열기는 사람을 집어삼키는 법이다. 우세한 쪽도 열세한 쪽도 결국은 그 흐름에 휩쓸리기 마련.
하지만 청명의 두 눈만은 더없이 날카롭게 전장을 모조리 담아 내고 있었다.
이미 이 전쟁은 끝났다.
아니, 사실 시작부터 끝나 있었다.
절대 매화도에 구원이 오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풀고 있던 놈들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화산과 당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애초에 제대로 된 전력으로 서로의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면 수로채 따위는 남궁세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수로채는 자신에게 유리한 곳으로 남궁세가를 밀어 넣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매화도는 화산과 당가에게 유리한 전장이다.
남은 것은 그저 휩쓸려 나가는 것.
‘그게 아니면…….’
콰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거대한 바위가 산을 구르는 듯한 섬뜩한 파공음이 일었다.
백천의 고개가 격하게 옆으로 돌아갔다.
‘뭐지?’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겁을 집어먹고 주춤주춤 물러나는 수적들뿐이다.
하지만 백천의 본능은 머리보다 빨랐다.
쿵!
그가 다짜고짜 땅을 박차며 몸을 날린 순간, 앞쪽에 있던 수적들의 몸이 갈라지고 튕겨 날아가며 거칠고 검은 도기가 화산의 검수들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흐아아아아아앗!”
알고 있었다는 듯 그 앞을 막아선 백천은 날아드는 도기를 향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도기를 비틀어 쳐 올린 백천의 몸이 쏜살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바닥에 한 번 처박히고도 모자라 다시 허공으로 튀어 오른 그를 보며 화산의 제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사수우우우우욱!”
“사형! 이런 제기랄!”
백천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바닥으로 착지했다.
쿵.
주저앉듯 바닥에 내려선 백천이 검을 땅에 꽂아 넣으며 몸을 지탱했다.
입술 새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백천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자신의 몸 상태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 그는 분노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으니까.
“이 개자식이…….”
어떻게…… 대체 어떻게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의 등에 도기를 날릴 수가 있는가!
“이……!”
백천의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절명한 수적들의 시신과 거기서 흘러나온 피로 만들어진 선명한 핏빛 길.
수적들 사이로 생겨난 그 길 끝에서.
“……이 애송이 놈들이.”
노기로 머리카락마저 치솟은 흑룡왕이 땅을 짓뭉개 버릴 듯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