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71화 (972/1,567)

971화. 영광인 줄 알라고, 애송이. (1)

“버텨라!”

남궁명의 두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섬은 넓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차 있는 수적들은 너무도 많다.

그 상황이 오히려 남궁세가에는 악재로 작용했다.

수적들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섬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은 너무도 강하다. 그게 진짜 실력 때문이든, 기세를 제압당한 것이든 그런 건 상관없다. 밀리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에 비해 남궁세가의 생존자들은 비교적 상대하기 수월하다.

섬으로 밀려드는 화산과 당가를 상대하러 갈 엄두를 내지 못한 수적들은 부상당한 노루를 마무리하려는 늑대처럼 남궁세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남궁세가 역시 순순히 당하지는 않았다.

화산이 도착하기 전에도 목숨을 내어 놓듯 싸웠는데, 바로 앞에 희망까지 도달했으니 새로운 활력이 생긴 것이다.

“버텨라! 소가주께서 오신다!”

남궁명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남궁세가 검수들의 눈에 새파란 독기가 어렸다.

소가주가 어떤 꼴로 이 섬을 다시 밟았는지 이미 두 눈으로 봤다. 혼자 살아남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던 남궁도위가 저들과 함께 이곳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그 검을 꽉 쥔 채로.

오직 이 섬에 있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런 소가주 앞에서 힘들단 말을 하겠는가? 그건 남궁의 이름을 떠나서 검을 든 이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남궁의 검이 변한다.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하나라도 더 죽이고 가기 위해서 악을 써 오던 이들의 검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 일변도의 검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믿고 있으니까.

바로 이곳에서 버티기만 하면 저 화산이, 당가가, 그리고 남궁도위가 그들을 구해 줄 것이라 믿으니까.

무학의 길을 걷는 이들은 때로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는 순간을 느끼고는 한다. 지금 남궁의 검수들이 딱 그랬다. 육체는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지만, 정신이 육체를 강제로 이끌어 적과 맞서게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 있었다.

쇄애애애액!

머리카락만큼 얇은 비침이 숱하게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비침들은 일제히 방향을 바꿔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아아아아아악!”

수적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적’이 존재할 때 그 위력을 발하는 문파.

비무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극독과 치명적인 암기들이 수로채라는 적을 맞아 무려 백 년 만에 햇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쇄애애애액!

백천의 머리 위로 환상 같은 비도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의 앞을 막아섰던 적의 이마를 꿰뚫은 비도는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백천의 뒤로 날아갔다.

‘정말 더럽게 든든하네!’

백천이 검을 꽉 움켜잡았다.

물론 그의 뒤에는 검을 들고 그를 지키는 이들이 있지만, 이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거리라는 제약에 묶이지 않고 그를 도울 이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은 백천의 발을 적어도 반보 이상 더 나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파아아앗!

흙먼지를 흩날리며 앞으로 치고 나간 백천은 겁먹은 얼굴로 앞을 막아서는 수적들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런 눈빛으로 싸우면!’

파아아아아앗!

그의 검이 사선으로 빛살처럼 내리그였다.

“그 망할 놈이 사흘은 욕을 한다고!”

날아드는 작살째 수적들을 갈라 버린 백천의 검 끝이 다시 빙글 회전했다. 그리고 이내 수십 송이의 매화를 피워 냈다.

투창의 형식으로 그에게 날아든 작살들은 피어난 매화들에 가로막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이윽고!

“타앗!”

그가 검을 앞으로 쭉 내미는 순간, 피어났던 꽃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전방의 적들을 휩쓸었다.

화산의 매화검기.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수백 개의 꽃잎이 매화도에 불어오는 강바람을 타듯 나풀대며 수적들에게 밀려들었다.

앞에서는 눈을 의심할 만큼 생생한 검기의 꽃잎이, 그리고 머리 위에서는 우모침(牛毛針)이 비처럼 쏟아지니 설상가상이란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어어어어어!”

처절한 수적들의 비명이 울리는 순간, 백천의 뒤를 따르던 화산의 검수들이 일제히 앞으로 치고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오직 한 길, 저 남궁으로 향하는 길을 뚫기 위해서.

그리고 그 가운데서, 남궁도위는 허덕이며 검을 콱 움켜쥐었다.

‘나,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는 남궁의 소가주다. 이곳에서 이들의 활약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이들은 너무도 강하다. 그리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이 완벽한 흐름 속에서 남궁도위는 이물질에 불과하다. 그가 앞으로 나서는 순간, 절대 지금과 같은 속도는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해야 하는 게 뭐지?’

그럼에도 뛰어들어 남궁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자존심을 버리고 남궁세가를 구원하는 데 우선을 두어야 하는가?

당연히 후자다.

부상으로 제 실력의 반도 내지 못할 그가 자존심 때문에 앞에 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는가?

“…….”

남궁도위는 허탈한 눈으로 저 멀리 있는 생존자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맞아.’

검을 잡은 그의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가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턱!

누군가 남궁도위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화들짝 놀란 그가 돌아보니 얼굴을 무섭도록 굳힌 청명이 보였다.

“도, 도장!”

언제?

분명 저 배들을 처리하기 위해 몸을 날렸었는데, 언제 이 매화도까지 도달했단 말인가.

청명은 남궁도위를 향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그쳤다.

“여기서 뭐 해?”

“저, 저는…….”

남궁도위의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챘다는 듯 청명이 일갈했다.

“병신 같은 새끼가!”

남궁도위는 살면서 이렇게 거친 욕설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를 단순히 화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이 담긴 욕설이란 것을.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청명이 다시 소리쳤다.

“가!”

어깨를 잡은 청명의 손이 강하게 남궁도위를 밀쳤다.

“도, 도장! 저는!”

“알아, 이 새끼야! 네가 지금 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여기 어디 있어!”

통렬한 그 고함에 남궁도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깨를 미는 손은 점점 거세어졌고, 자연히 남궁도위도 점점 더 속도를 높여 갈 수밖에 없었다.

“똑똑히 들어!”

“……예?”

“앞에 설 수 있는 이에게 필요한 건 실력이 아니야.”

귓가에 청명의 목소리가 선명히 파고들었다.

“자격이다!”

“…….”

청명은 차가운 시선으로 남궁세가 쪽을 보았다. 남궁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고, 남궁도위 역시 앞에 설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것은 너무도 명확하다.

“그럼 길은 네가 뚫어라!”

그 순간 세상 다시 없을 든든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뒤는 내가 받친다!”

당군악의 비도가 남궁도위의 머리 위를 스치고 날아가 앞쪽의 수적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가!”

청명의 외침을 신호로 돌아선 남궁도위가 땅을 박차며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앞으로 치고 나가는 순간, 그와 스치는 이들 하나하나 모두가 강건한 시선을 보내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그 눈빛들은, 부상으로 신음하던 남궁도위에게 마지막 힘을 짜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흐아아아아앗!”

백천을 스쳐 앞으로 돌진한 남궁도위의 검 끝에서 백색의 검기가 충천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제왕검형!

오직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제왕의 검. 그의 검은 적을 부수고 뒤따르는 이들을 지키기 위한 검!

남궁황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깨달은 심득은 그의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대가 이룩한 것을 후대가 이어 나가는 것. 가문은 그걸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비켜라!”

콰아아아아아앙!

수직으로 내리그은 검에서 백색의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수적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휩쓸려 나갔다.

“소가주우우우우우!”

남궁명의 입에서 물기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직 남궁의 직계만 익힐 수 있는 검이 이곳에서 보인다는 사실은 너무도 많은 의미를 가졌다.

아직은 감히 남궁황과 비교할 수 없겠으나, 저건 분명히 제왕의 검! 남궁세가의 상징과도 같은 순백의 검기였다.

“쿨럭!”

남궁도위의 몸이 일순 앞으로 휘청였다.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 올린 탓에 시야가 아찔하게 멀어져 가고,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주, 죽여!”

그 틈을 노리고 수적들이 도를 휘둘러 왔다. 전장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어딜!”

그 순간 남궁도위의 머리 위로 검은 인영이 솟아올랐다.

“화, 화산검협!”

그를 알아본 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파아아아앗!

청명이 내지른 검에서 수십 개의 붉은 검기가 쏟아졌다. 그리고 남궁도위를 노리며 달려든 이들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수적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쓰러져 나뒹굴었다.

남궁도위의 바로 옆에 착지한 청명이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손에 채 힘이 들어가기도 전에 남궁도위가 제 힘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고 몸을 가누었다.

쾅!

진각 내리밟는 소리와 함께, 남궁도위의 검이 다시 한번 백색 섬광을 뿜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저기에 있다.

그러니 적어도…….

‘힘들다는 개소리는 지껄일 수 없다!’

콰아아아아앙!

한 번 더 검기를 뿌린 남궁도위가 휘청이며 앞으로 걸었다. 다가오는 이의 목에 검을 박아 넣고, 바닥을 짚어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가며 어떻게든 나아간다.

쿵!

혼자서는 절대 이 발을 내디딜 수 없다. 그를 막아서는 이들에게 절대 맞설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혼자가 아니다. 느껴진다. 그의 등 뒤를 지키고 있는 이가. 그가 나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움직여!’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지만, 남궁도위의 두 눈만은 더욱 확고한 의지를 머금었다.

“나는!”

입에서 피 끓는 외침이 토해져 나왔다.

“남궁세가의 가주다!”

앞을 막아서는 수적들에게 몸을 내던진 남궁도위의 검이 명멸하는 빛무리를 자아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하게 빛나는 검기.

하지만 그 검기는 결코 꺼지지 않고 수적들의 작살과 맞부딪쳤다.

카가아아아앙!

적을 베고 무너뜨려야 할 검기가 작살에 맞아 힘없이 튕겨 나왔다.

“아…….”

남궁도위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때.

“잘했다, 애송아.”

등 뒤에서 폭발적인 검기가 쏟아져 나왔다. 앞으로 뿜어진 붉은 검기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이내 선명한 붉은 매화를 그려 냈다.

매화가 폭풍처럼 휘날리며 전방의 수적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목숨이 끊기며 내지르는 비명이 숱하게 허공을 울려 댔다.

그리고 남궁도위는 보았다.

그와 남궁세가를 가로막고 있던 적들 사이로 확연한 길이 열리는 것을.

더 이상 생각은 필요하지 않았다.

“달려!”

남궁도위가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저 길, 그가 가야 할 길을 향해!

피로 뚫어낸 길을 달려 나간 남궁도위의 시선과 그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맞닿았다.

“소가주우우우우!”

남궁명의 물기 섞인 고함에 남궁도위가 새하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꽈악!

남궁명이 있는 힘을 다해 남궁도위를 끌어안았다.

“잘하셨소, 정말……. 정말 잘하셨소. 소가주……. 아니.”

입술을 질끈 깨문 그는 다시 정정하였다.

“가주.”

그 감격적 상봉은 생판 남의 일인 듯, 청명은 두 사람을 스쳐 지나 어찌할 바 모르고 있던 수적 목 하나를 단숨에 쳐 날렸다. 그리고 고함쳤다.

“모조리 쳐 죽여 버려!”

“우오오오!”

마침내 남궁에 도달한 화산의 검수들이 거친 기세로 수적들을 쓸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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