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6화. 너희가 시작한 싸움이야. (1)
폭풍 같다는 말보단, 돌풍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가라앉다 못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단번에 뒤집혔다. 고요하게 사위를 내리누르던 이들이 타오르는 불꽃으로 화해 내달렸다.
“뭐, 뭐냐!”
“이쪽으로 온다!”
수적들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리 소리를 질러 대는 이들 중 막상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당황했기 때문이다.
매화도를 포위한 채, 섬을 거의 점령한 이상 외부에서 올 공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 해도 이만한 거리를 건너오는 데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 이동 와중에는 장강 위에 포진한 배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받아야 한다. 그 공격을 뚫을 수 있다 해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고, 매화도에 도달한다고 해도 지친 몸으로 섬을 점령한 병력과 전투를 벌여야 한다.
그런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기에 저 소림마저도 쉽사리 이 강 위로 몸을 던지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이 얼마나 그들에게 불리한지는 이미 남궁황이 목숨으로 증명했다. 그러니 최근 날고 긴다는 화산이라 한들, 도리가 없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화산의 대처는 그런 그들의 예상을 대번에 뛰어넘었다.
백천의 발이 목판을 박찼다. 살짝 물속으로 가라앉았던 목판이 금세 다시 솟구쳐 올랐다.
파앗! 파아앗!
물에 떠오른 목판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나아가는 백천의 속도는 평지를 달리는 것에 못지않았다.
강변에서 매화도까지의 거리는 분명 멀다.
하지만 만약 이곳이 강이 아닌 대지라면?
무인에게 이 정도의 거리는 결코 멀다고 할 수 없을 것이었다.
파아아앗!
선두에 나선 백천을 따라 검은 무복을 입은 화산의 제자들이 줄을 지어 달렸다. 멀리서 보면 흡사 물 위를 달리는 듯했다.
생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던 이들 중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 고함을 내질렀다.
“뭐, 뭐 하는 거냐! 이 멍청한 놈들아! 쏴라! 화살을 쏴!”
물론 넋을 놓고 있던 건 잠시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짧았다. 그러나 그사이 화산과 당가는 이미 사분지 일이나 도하한 상태였다.
“쏴라아아아아아아!”
겁을 집어먹은 이들이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 댔다.
제대로 전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다급하게 쏘아 낸 화살들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수로채다. 화살에 실린 내력은 과연 범상치 않았다.
하늘을 꿰뚫을 듯 쏘아 올려진 화살들은 일제히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검은 용처럼 선두에서 달려 나가는 화산을 향해!
쇄애애애액!
마치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는 듯한 광경.
하지만 달려 나가던 화산의 검수들은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일제히 검을 하늘로 치켜세웠다.
카가가가가강!
그러자 떨어져 내리던 화살이 일체의 낭비 없이 휘둘러진 검에 깔끔하게 튕겨 나갔다.
애초에 무인간의 전쟁에서 활이 잘 쓰이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궤도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원거리 병기는 무인들의 방어를 뚫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로채가 활을 애용하는 이유는 단 하나. 물속에 잠긴 이들은 뻔히 알고도 그 공격을 막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강 위를 평지처럼 달려 나가는 화산의 검수들에게 화살의 비 따위는 조금의 장애도 되지 못했다.
“쏴라! 더 쏴! 빌어먹을, 저놈들의 발목을 잡으란 말이다!”
공격이 먹히질 않으니 누군가는 발작하듯 악을 쓰고 고함을 내질렀다.
이 화살로 쓰러뜨리지는 못한다 해도 어떻게든 시간은 벌어야 한다.
그 전략은 분명 타당하다 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놓친 것은 단 하나, 남궁을 구하기 위해 물 위를 달리고 있는 게 화산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 빨리 쏘……. 컥!”
선수에서 고함을 지르던 수적이 돌연 벼락이라도 맞은 듯 퍼드득 경련을 일으켰다.
“끄륵……. 끄르륵.”
“다, 당주!”
“당주님! 왜 그러십…….”
주위에 있던 수적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명을 내리던 당주가 썩은 나무토막처럼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콰당!
눈을 까뒤집은 채 바닥에 쓰러진 그의 이마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비, 비도!”
당주의 이마에 한 자루의 비도가 손잡이까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수적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배의 난간에 도열해 활을 쏘아 대던 이들이 족족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고, 난간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풍덩! 풍덩!
그 대경할 사태에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찰나, 누군가의 발작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암기! 암기다! 당가다! 몸을 낮……. 커억!”
쇄애애애애액!
기겁을 하여 몸을 숙인 이들의 머리 위로 사천당가의 비침이 스치고 지나갔다. 겨우 목숨을 구한 이들의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저 비침에는 분명 사천당가의 독이 듬뿍 발려 있을 터.
그들 정도의 무위로는 저 비침에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모두가 그 비침을 피하는 행운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악!”
날아든 비침에 얼굴을 격중당한 이가 제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악! 아아악! 아아아아악!”
처절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구르다 피거품을 게운 그는 이내 눈을 까뒤집고 온몸을 벌벌 떨었다.
“크륵……. 크르르륵!”
부여잡은 얼굴을 중심으로 시커먼 기운이 점점 번져 가더니 이내 전신이 붉고 검은 반점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으……. 으으…….”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의 입에서 질린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려 왔다.
간질이라도 걸린 듯 경련하던 그의 몸은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머리카락만큼 얇은 비침 몇 개에 맞았을 뿐인데, 숨 몇 번 내쉴 시간조차 벌지 못하고 절명해 버린 것이다.
독의 위력을 절감한 이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평화롭기 짝이 없던 시대. 그렇기에 모두가 잊었던 것.
어째서 사천당가가 대인전에 약하다는 단점을 가지고도 오대세가의 수좌 자리를 노릴 수 있었는가?
바로 이런 문파와 문파가 맞부딪치는 거대한 전투에서는 천하의 그 어떤 문파보다 위험한 곳이 바로 당가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먼 사천 땅에서 칩거하던 독사가 마침내 그 침묵을 깨고, 이 장강의 물 위에서 웅비하기 시작했다.
“이, 이 개자식들아! 대가리 처박고 있지 말고 화살을 날리란 말이다! 내 손에 죽고 싶으냐!”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지휘관들이 악을 썼다. 이대로 난간 아래 숨어 목숨을 부지한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흑룡왕의 분노가 떨어질 것이 뻔하지 않은가?
고개를 들어도, 숙여도 기다리는 건 결국 죽음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한껏 수그러든 그들의 머리 위로 비침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쇄애애애액!
고개를 처박고 있던 수적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위로 향했다.
‘주머니?’
머리 위로 쾌속하게 날아드는 작은 녹색 주머니를 발견한 수적들의 두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퍼어엉! 퍼엉!
날아든 여러 개의 주머니가 일순 터져 나가더니 매캐한 독분과 독 모래가 퍼지며 몸을 낮추고 있던 수적들을 뒤덮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크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이내 꿈에서도 듣고 싶지 않을 만큼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독 모래가 살을 파고들고, 갑판 위를 뒤덮은 검은빛 독분은 코와 입으로 밀려들었다.
“끄르륵…….”
“커억, 크륵.”
갑판 위는 순식간에 죽음의 장으로 화했다.
단번에 가까이 있던 배 하나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은 당군악은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보며 명했다.
“암기를 아껴라! 전투가 길어질 것이다!”
“예!”
그의 뒤를 따라 달리던 당가의 무인들이 작지만 단호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화산은 계속해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섬전이 되어 달리는 이들의 중앙에서 청명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산의 검수들이 검을 허리 위까지 당겨 올렸다. 그리고 발아래 물속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파아아아아아앗!
검 끝에서 발출된 검기가 수면을 뚫고 아래로 쏘아졌다. 분명 수면 아래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텐데도, 검기를 쏘아내는 그들의 동작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청명의 구령과 함께 화산의 검수들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다시 한번 물속으로 검기를 날렸다.
물론 달리는 발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그 공격의 결과는 곧장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강이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물속에서부터 그들을 노리던 수적들이 채 화산의 발치까지 접근하기도 전에, 쏘아진 검기에 꿰뚫려 절명해 버린 것이다.
파앗!
화산의 제자들 중 몇이 목판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동시에 그들이 밟고 있던 목판을 꿰뚫으며 길쭉한 작살이 물 위로 솟구쳤다.
파아아아앗!
새파란 검격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작살을 찌른 수적이 채 피하기도 전에 몸을 난도질했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수적의 작살 끝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의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앞으로, 또 앞으로 내달렸다.
파아아아앗!
그런 그들의 진격을 막아서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선두에서 달리던 백천과 유이설 앞으로 수십의 수적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하지만 백천과 유이설은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탓!
가볍게 목판을 박찬 유이설이 백천의 어깨에 올라섰다. 백천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어 유이설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타아아아앗!
백천의 어깨를 밟은 유이설이 허공에, 말 그대로 날아올랐다. 마치 한 마리 매처럼 날아든 그녀는 아직 수면에 발을 대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는 수적들의 등 뒤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보조를 맞추어 백천이 전면에서 달려들었다.
“하아아아아압!”
백천의 검이 수십 줄기 검영을 만들어 눈앞의 수적들을 일거에 뒤덮었다.
“뭣?”
수적들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단 한 사람의 검에서 뿜어졌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검기였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 검기가 채 그들의 몸에 닿기도 전에 등 뒤로 날아든 유이설의 검에서도 수십 줄기의 검기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검기의 폭풍. 수십의 수적을 상대로 단둘이서 이루어 내는 합격이었다.
그 결과는 실로 참혹했다.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날아든 검기가 기세 좋게 솟아오른 수적들의 몸을 무자비하게 꿰뚫었다.
촤아아아악!
백천의 발이 수면을 긁듯 밀어 내는 동시에 그의 검이 다시 한번 강하게 횡으로 그어졌다.
파아아아아앙!
기다란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기에 꿰뚫린 수적들의 몸이 횡으로 베였고, 이내 옆으로 튕겨 날아갔다.
“길은 내가 뚫는다!”
백천의 입에서 하늘을 뚫을 듯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달려라! 남궁을 구한다!”
“예!”
화산의 검수들이 피로 물든 강 위를 섬전처럼 내달렸다. 점점 매화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