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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65화 (966/1,567)

965화.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 (5)

누군가가 지금 이곳의 광경을 다른 어떤 이에게 전해야 한다면 대체 뭐라 말할 것인가?

제아무리 말을 잘하는 이라고 해도 절대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을 것이다.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워서?

아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이라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이곳에 있는 이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 하나하나가 존재만으로도 강호를 뒤흔들 수 있는 이들이다. 가깝게는 천하제일문파로 불리는 소림이 있고, 멀게는 저 강남의 지배자인 사패련의 패자, 만인방이 있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공동과 장강수로십팔채 역시 천하에 그 드높은 위명을 떨치는 이들이다.

그 위명만으로도 천하를 오시하는 쟁쟁한 이들이 젊은 검수 한 명의 등장과 함께 일제히 침묵해 버린 광경을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하겠는가?

화산검협. 그 이름은 분명 대단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장일소와 사패련에 맞서 쟁취해 낸 그 별호에는 다른 이들이 지닌 별호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

화산검협이라는 이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를 침묵시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그건 화산검협이 아니라 천하의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알게 된다.

사람이 가진 존재감이라는 것은, 결코 그 명성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둑한 청명의 눈이 장강을 천천히 훑었다. 그 시선을 따라 지금 이 장강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하지만 침묵하면서도 그들은 왜 이렇게나 홀린 것처럼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청명의 시선은 이내 한곳에 고정되었다.

매화도.

남궁의 생존자들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바로 그곳으로.

“아…….”

남궁명의 몸이 뒤흔들렸다.

저곳에 있다.

단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들을 위해 달려와 준 이가.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이 거대한 전장은 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누가 온다고 하더라도 이 장강을 넘어 그들을 구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저 화산검협이 그들을 구해 주기를 바라는 건 너무도 지나친 기대이리라.

하지만.

‘……그걸로 됐다.’

천하의 모두가 그들을 버렸다. 그들을 외면했다.

어쩌면 그를 진정으로 절망에 빠뜨린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아니라, 누구 하나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는 처절한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와 준 이가. 그들이 걸어온 길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라도 하듯.

지금의 남궁명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남궁명이 붉어진 눈시울로 청명을 바라보던 바로 그때였다.

“머저리 같은 놈들이.”

흑룡선의 선수에 오른 흑룡왕이 묵직한 목소리로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수적들은 범을 코앞에서 마주친 하룻강아지처럼 몸을 떨었다.

들끓는 눈으로 수적들을 노려본 흑룡왕은 고개를 돌려 청명을 직시했다.

“애송이 놈.”

그리고 이를 갈아붙였다.

한순간이지만, 저 애송이의 존재감이 이곳에 있는 모두를 뛰어넘었다. 바로 이 장강에서 말이다. 그건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장인 흑룡왕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장일소에게 당한 굴욕이 없었다면 넘길 수 있는 일이었을 테지만, 이미 장일소에게 한번 억눌린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참아넘길 수 없었다.

“무얼 하겠다는 거냐!”

노기에 찬 그의 음성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네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곳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것밖에는 없겠지. 네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상대를 짓누르기 위한 발언이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하고도 냉엄한 사실이었다.

이미 상황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니면, 이 섬까지 장강을 헤엄쳐 오기라도 할 텐가? 길은 이미 끊겼다. 멍청한 놈!”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청명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저 냉담한 시선으로 흑룡왕을 빤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무심한 반응이 속을 뒤틀어 놓았다. 이를 악문 흑룡왕이 고함을 내지르려던 순간, 내내 닫혀 있던 청명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 멍청한 머리로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세 가지 정정해 주지.”

세 가지?

“첫 번째. 누가 혼자라고?”

저벅. 저벅.

그 순간 청명이 서 있는 강변의 둔덕 아래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검은 무복, 가슴팍에 수놓인 매화 문양. 그리고 이마에 두른 흰색 영웅건이 인상적인 한 남자가.

화산정검 백천.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천천히 걸어와 청명의 옆에 섰다.

얼음장 같은 차가운 눈빛이 장강의 수적을 모조리 얼려 버릴 듯했다.

백천뿐만이 아니다. 빙검매화 유이설이 청명의 곁에 다가와 섰다.

저벅. 저벅. 저벅.

그 뒤를 이어 하나하나 이곳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하나를 넘어 열, 열을 넘어 일백에 이르는 검수들이 그 단호한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눈빛이 싸늘했다.

“…….”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화산.

이제는 그저 섬서의 검문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이름. 그 화산이 마침내 이 장강에 도착한 것이다.

“소…… 소가주…….”

그리고 남궁명은 보았다.

소름 끼치는 기세를 내뿜으며 도열한 화산파 속에 보이는 한 사내를. 백색 무복이 말라붙은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지만, 그가 어찌 저 사내를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남궁도위.

그가 마치 그 화산의 일원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의복과 안색은 그가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했지만, 그가 내뿜는 형형한 안광만큼은 결코 저 화산에 뒤지지 않는다.

일백에 달하는 검수들이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장강의 수적들을 쏘아본다.

실로 살벌한 광경이었다. 과거 화산이란 문파에선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위압감이 장강의 사파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과거 장강참변에서 저 화산을 보았다. 그렇기에 알고 있다.

저 화산이란 문파가 두려운 이유는,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러서지 않는 문파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뒤로 물러나는 법 없는 문파를 상대하는 건 그만큼 버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달한 건 화산만이 아니었다.

“완전히 늦지는 않은 것 같군.”

녹색 무복을 입은 무리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특유의 소매가 넓은 저 녹색 무복을 보고도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강호를 누릴 자격이 없다.

“사, 사천당가!”

당가를 이끌고 나타난 당군악이 굳은 얼굴로 장강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이곳에서 죽어 간 이들을 똑똑히 기억하겠다는 듯이.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떨리는 눈으로 화산과 사천당가를, 그리고 그들의 곁에 선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남궁의 소가주가 저곳에 있다. 멀리서 보아도 끔찍할 만큼의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는 끝끝내 그들을 살리기 위해 화산과 당가를 이끌고 온 것이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은 몰골로.

그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전의가 치솟았다. 모두가 이를 악물었다. 소가주가 저렇게나 큰 상처를 입고도 끝까지 그들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쉬이 내던지고 포기하겠는가.

“그리고…… 두 번째.”

청명이 흑룡왕을 쏘아보았다. 그 순간 흑룡왕의 몸이 흠칫 떨렸다.

‘무슨, 눈이…….’

그가 청명을 제대로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전쟁에서는 장일소와 싸우는 그를 얼핏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때는 내심 어린 애송이 놈 하나도 곧장 처리하지 못하는 장일소를 비웃었다.

그런데 지금 청명의 눈을 보는 순간, 그 역시 깨닫고 말았다.

저놈은 평범한 자가 아니다.

저런 눈을 가진 자가 평범할 리 없다.

“애송이?”

청명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노골적으로 비웃고, 또는 자조하는 듯 비틀린 웃음이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진짜 애송이 놈이 나오는 대로 지껄여 대는군.”

청명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화산의 제자가 그에게 여분의 검을 넘겼다. 검을 받아 허리에 찬 청명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알려 주지, 애송이.”

청명의 입가가 뒤틀리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진짜 전쟁이 뭔지 말이야.”

그 순간 흑룡왕의 등을 타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뭐지?’

허세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저 말이 왜 이토록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인가?

‘빌어먹을!’

흑룡왕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순간적으로나마 그 기세에 눌렸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청명이 악귀처럼 웃었다.

“길은 찾는 게 아니야, 머저리 놈아. 만드는 거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소매 아래서 손을 뽑아냈다. 그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흑룡왕이 일순 눈을 부릅떴다.

‘목판?’

소매에 감추기에는 과하게 큰 목판들을 든 당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앗!

마치 암기처럼 그들의 손에서 발출된 목판은 장강의 하늘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텅! 터엉! 텅! 텅!

그리고 그 순간 장강의 모두가 보았다. 당가의 무인들이 날린 목판이 장강의 수면 위로 떨어지는 광경을. 그렇게 수면에 안착한 목판들은 바로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올라 발판을 만들어 냈다.

수백 개의 목판이 일렬로 이어져 너른 장강을 가르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그들이 도달할 곳, 매화도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길을!

“사숙! 사고!”

챙!

백천과 유이설이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선두를 뚫어!”

“알았다!”

“응!”

“남궁도위!”

“예!”

“길을 열어라! 남궁으로 가는 길을 네 손으로 연다!”

남궁도위가 비장함마저 서린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을 테니까.

“남궁세가!”

청명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남궁의 검수들이 이를 악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간다.”

“…….”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서라도 버텨라!”

남궁세가 검수들의 가슴에 순간 뜨거운 것이 울컥 차올랐다.

“예!”

채앵!

검을 뽑아 든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자, 그럼…….”

이 장강의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이어질 그의 말을.

“가자. 남궁을 구하러!”

파아아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천과 유이설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그 뒤를 이어 화산과 당가가 긴 열을 이루며 달려들었다.

마치 검은 용과 녹빛 용이 장강을 노니는 듯했다.

땅을 박차고 두 마리의 용의 위로 뛰어오른 청명이 빠르게 몸을 날렸다.

“간다, 이 개자식들아!”

장강에 떠오른 태양을 등진 청명의 검이 장강에 남은 모든 어둠을 몰아낼 듯이 더없이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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