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2화.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 (2)
바다처럼 드넓은 장강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햇살이 장강의 물결을 타고 흘러넘치듯 밀려왔다.
더없이 아름다운 광경이나,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에는 경탄 대신 압박감이 들이차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법계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
어느새 닷새가 지나 버렸고, 약속한 날의 해가 무심하게도 떠오른다. 법계는 삐걱대는 고개를 돌려 법정을 바라보았다.
“바, 방장…….”
하지만 차마 무어라 말을 더 잇질 못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법계는 법정의 심정을 이해한다. 지금 이곳에서 법정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자는 분명 법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법정이 이날의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분명 무언가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법정은 그저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림의 세자들이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 얼굴들에선 온갖 고뇌가 느껴졌다. 요 며칠 사이에 반쯤 삭아 버려서,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낡아 빠진 목불의 얼굴 같기도 했다.
장강으로 올 때의 패기는 이제 아주 옛일처럼 느껴졌다.
본디 불자는 세상의 고뇌를 짊어져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뇌던가?
불자가 고뇌를 짊어지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 누가 구제를 받는단 말인가?
오히려 모두가 지옥으로 이끌려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법계는 핏발이 선 눈으로 다시 법정을 바라보았다.
“방장.”
“…….”
“방장!”
그제야 법정이 느리게 법계를 마주 보았다. 법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법정의 얼굴 역시 뒤에 선 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치 십 년은 늙어 버린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런 법정을 보면서도 이젠 안쓰러운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
“뭐라도!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법정이 초점 없는 눈으로 법계를 마주 보았다.
“방장! 이대로는…….”
“안다.”
“방장…….”
“…….”
법정은 또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장강만 보았다. 매화도를 포위한 선단들이 그들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모를 리가 있는가?’
남궁이 전멸하는 것으로 이 모든 환란이 종결되면 소림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그저 칼에 베인 상처 정도가 아니라 불에 타 뒤틀린 상처를. 소림이라는 문파가 이름을 잃는 그 순간까지도 사라지지 않을 상처를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단 한 발만 내디디면 된다. 저 물을 향해 한 발을 내딛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가 명만 내리면 소림의 제자들은 단 일고의 주저도 없이 저 악적들과 용맹히 싸울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나의 만족에 불과하지 않은가?’
저곳은 함정이다. 준비된 불구덩이다. 저 장일소가 노리는 건 애초에 남궁이 아니었다. 저 남궁의 팔다리를 자르고 인질로 삼아 그 목에 칼을 들이민 뒤, 그들을 구하러 올 이들만을 노리고 있다.
그래, 바로 소림을 말이다.
저 넘실거리는 푸른 물에 대체 어떤 악의가 도사리고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발을 들이는 순간, 장일소가 그들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들이 소림의 목을 조여 올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너무도 뻔하니까.
장일소는 마음만 먹었다면 이 닷새 동안 얼마든지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아직 하오문도, 흑귀보도 이 장강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들만 이곳에 나타났으면 법정의 선택은 훨씬 쉬워졌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뛰어들 순 없는 일 아니던가.
하지만 장일소는 병력을 더 충원하지 않았다.
소림이 가지고 있는 그 미묘한 희망을 절대 꺾어 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교묘하게 병력을 유지만 하면서 언제든 소림이 남궁을 향해 뛰어들 수 있도록 유혹하고 있었다.
우드드득.
법정은 이를 갈아붙였다.
‘겁쟁이라고?’
지금 누구보다 공격하고 싶은 것은 바로 법정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한 비난은 다름 아닌 소림, 그리고 법정에게 돌아올 테니까.
이들에게 공격을 명하고 소림은 협의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렸다 말하는 것이 어려운가? 죽어 간 소림 제자들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고 목놓아 부르짖으며 소림의 협의에 대해 부르짖는 것이 과연 어려운 일이냐 이 말이다!
그럼 법정은 천하에 다시 없는 협의지사로 남을 것이다. 소림은 무너져도 법정의 이름만큼은 이 강호사에 영원토록 회자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는 알지 않는가? 협의를 위해서 문파를 멸망의 위기까지 끌고 갔던 저 화산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천마와 함께 산화했던 그들을 과연 강호가 지켜 주었던가?
청문.
대현검 청문의 이름은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다. 그는 이 강호를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인물이다.
그래서 그 청문이 지금 지하에서 기뻐하고 있겠는가?
천만에!
‘처절하게 통곡하고 있겠지.’
아마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결코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됐다고 말이다.
지금 법정의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화산의 망령이었다.
화산검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가 뜬금없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분명 화산은 완전히 망해 버렸을 것이다. 천하의 누구도 매화검문 화산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독한 희생을 누가 제 문파에 강요할 수 있는가! 누가!
“방장!”
“이…….”
법정이 핏발 선 눈으로 법계를 노려보려던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기!”
“…….”
법계의 다급한 손짓에 그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흑룡선의 거대한 선체 곁에 어느새 작은 조각배 하나가 대어져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흑룡선 위에서 그 조각배로 훌쩍 뛰어내렸다.
“장…일소…….”
모를 수가 없다.
아무리 먼 거리라고 해도 저 복장은 사람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끄니까.
장일소에 이어 한 사람을 더 태운 조각배가 느릿하게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마치 이 장강 위에서 여유롭게 뱃놀이를 즐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으드드득!
누군가가 이를 가는 소리가 법정의 귀에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피까지 말라붙은 듯 고동조차 들리지 않던 심장이 급격히 쿵쾅대며 법정의 머리끝까지 피를 밀어 올렸다.
패군 장일소. 이 모든 일의 원흉!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악귀가 제대로 된 호위도 없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법정의 얼굴에 핏대가 돋았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실핏줄이 터져 두 눈이 붉게 물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분노는 법정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장강의 강변을 점거하고 있는 모두가 자신이 담을 수 있는 모든 악의를 담아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그 살기만으로도 평범한 이는 심장이 멎고도 남았을 테다.
하지만 정작 장일소는 그 지독한 살기 속에서도 그저 여유롭기만 했다.
찰랑.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이 묵직한 물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작은 조각배에 걸터앉은 그는 자신에게 쏘아지는 악의를 즐기며 느긋하게 술을 병째 들이켰다. 입가를 따라 흘러내린 술이 장강의 위로 방울져 떨어졌다.
“끄으…….”
노기를 참지 못한 법정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며 흐른 붉은 핏물이 땅에 점점이 떨어져 스몄다.
‘대체 어디까지……!’
얼마나 더 사람을 농락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여래께서 상대하셨다는 마귀도 저토록 지독하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도 느릿하게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배가 이윽고 천천히 멈춰 섰다. 불과 이십여 장. 법정쯤 되는 이가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달려들어 공격하고도 남을 위치에.
“련주님.”
태연한 얼굴로 장강을 보던 장일소가 슬쩍 호가명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썹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듯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좀 더 가자꾸나. 저 늙은이들이 내 목소리를 더 똑똑히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늙어 귀가 막힌 게 아니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뿐이니, 이 정도가 적당할 듯싶습니다.”
“쯧.”
장일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겁은 많아서는.”
“……련주님이 과하게 없으신 거지요.”
호가명이 작게 웃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련주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겁쟁이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게 제 역할 아닙니까. 그리고 련주님께서도 이제 그 옥체를 좀 더 귀히 여기셔야…….”
“알았어, 알았어. 잔소리는.”
장일소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손을 휘휘 젓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짤랑.
그가 걸친 장신구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의 거리. 무인들에게는 지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 거리를 두고 선 장일소가 자신을 노려봐 오는 구파일방의 무인들을 향해 오만한 시선을 던졌다.
“이…….”
모두의 얼굴은 이제 더 일그러질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제대로 된 호위도 없이 다가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여기서 모를 이가 있겠는가.
달아오른 숯을 통째로 집어삼킨 것처럼 뱃속이 뒤집혔다. 모두가 아귀 같은 얼굴로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장일소가 손에 든 술병을 앞으로 내밀어 보이며 가볍게 흔들었다.
“한잔들 하지?”
나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순간 법정의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법정의 얼굴을 즐겁다는 듯 감상할 뿐이었다.
“어차피 그리 손 놓고 구경만 할 거라면, 이 장강 경치를 안주 삼아 술 한 모금 하는 것도 근사할 텐데 말이야. 그렇지 않으냐, 가명아?”
“정파 놈들이 운치를 알 리가 없지요.”
“그도 그렇구나. 쯧쯧. 안타까워라. 딱딱하기만 해서는.”
장일소가 아쉽다는 듯 술병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모두가 보란 듯이 술을 들이켰다. 붉은 입술 끝에 맺혔던 술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현 구파일방의 최대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사패련의 련주가, 장일소가 바로 지척에 있음에도 이 강변에 있는 누구도 발을 떼어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마치 두 발을 아교로 땅에 붙여 놓은 것처럼 장일소가 그들의 면전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흐음.”
잠시 후 장일소는 술병을 입에서 떼어 내며 만족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피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가 드러나는 모습이 실로 섬뜩했다.
“적어도…….”
그가 강변의 모두를 훑어보며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노골적인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최소한의 무언가는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
“내가 너희를 너무 대단하게 본 모양이지. 아니, 아니지. 이토록 지독할지 몰랐으니 얕봤다고 해야 할까?”
“으…….”
장일소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굳이 정파와 사파를 나눌 필요도 없어 보이는군. 우리도 너희처럼 지독하게 제 살길만 찾지는 못하는데……. 이거, 제가 오히려 한 수 배웠습니다.”
“장일소!”
법정이 목이 터질 듯한 고함을 터뜨리는 그 순간이었다.
“똑똑히 지켜봐라. 주둥이로 협과 의기를 논하는 위선자들아.”
소름 끼치는 장일소의 목소리가 그들을 짓눌렀다.
따악.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장일소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땅에 발을 붙이고 참아 낸 포상을 주지. 지금 이 시간부로 남궁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어…….”
“듣도록 해. 그 비명을. 그 고함을. 그 울분을. 바로 이곳에서…….”
장일소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 양심과 맞바꿔 지켜 낸 목숨을 소중히 부여잡고 말이야.”
잠시 후 그를 태운 조각배가 천천히 뱃머리를 돌렸다. 장일소는 시선을 살짝 뒤로 던지며 말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나를 죽여 보시겠나? 위대하신 정파의 협사님들께서?”
“…….”
“하하하하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핫!”
굴욕감.
패배감.
그리고 죄악감.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지옥 속에서, 떠오르는 해를 짊어진 장일소의 등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그 순간.
구파를 경계하듯 전열을 갖추고 있던 선단들이 일제히 그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매화도, 그곳에 남은 남궁세가의 생존자들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