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61화 (962/1,567)

961화.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 (1)

“관평!”

남궁명이 의식을 잃어 가는 이의 단전에 기운을 밀어 넣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부상자들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육신에 입은 부상도 심각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의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희망’을 잃었으니까.

“소가주께서 반드시 구원을 이끌고 올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남궁명이 악을 쓰듯 말했다.

이미 단전의 기운을 소진했다. 억지로 기운을 조금이라도 더 쥐어짜 내느라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하지만 관평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버티라지 않느냐! 이 빌어먹을 새끼야!”

결국 남궁명의 입에서 악에 받친 외침이 토해져 나왔다.

그는 관평의 단전에서 손을 떼고 그의 멱살을 콱 움켜잡았다.

“그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가주께서 어떻게 가셨는지! 장로들이 왜 목숨을 거셨는지!”

“…….”

풀려 가던 관평의 눈에 얼핏 초점이 돌아왔다.

“그분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 셈이냐! 그분들은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 그럼 적어도 버티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이 개자식들아!”

처절하기 그지없는 남궁명의 외침은 흡사 절규와도 같았다. 의식이 꺼져 가던 부상자들도, 그런 그들을 돌보던 이들도 모두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삼켰다.

초점 없는 눈으로 먼 허공만 바라보던 관평의 시선이 힘겹게 움직여 남궁명에게 닿았다.

“대…주…….”

바싹 말라 부르튼 그의 입술이 달싹이며 열렸다.

“소…가주……. 소가…주는…….”

“그래!”

남궁명이 다급히 관평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반드시 오실 거다!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 돌아오실 거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라! 이를 악물고 버텨!”

확연히 무언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힘없이 벌어져 있던 입술이 단단히 닫힌 것에 불과했다. 여전히 상태는 좋지 않고,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남궁명에게는 이 작은 변화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들이 스스로 생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는 것만으로도.

남궁명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모두 가주께서 왜 목숨을 거셨는지 잊지 마라.”

모두의 눈빛이 형형해진다.

“그 죽음을 두 눈으로 지켜본 이들이라면, 그분이 지키고자 했던 남궁의 이름을 쓰는 이들이라면, 적어도 부끄럽게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가주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악착같이 버텨라!”

“예!”

남궁명은 입술을 깨문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괜히 가솔들과 눈이 마주쳤다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서였다.

가주와 장로들을 잃은 남궁은 구심점을 잃었다. 남궁명 혼자서는 이들을 이끌 수 없었다. 그러니 기댈 곳이라고는 오로지 남궁도위뿐이다.

‘소가주…….’

알고 있다. 아직 어린 그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크고도 가혹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남궁의 가주가 될 이의 숙명과도 같은 것.

‘제발 한시라도 빨리…….’

남궁명의 시선이 강 너머 드넓게 펼쳐진 대지로 향했다. 저 남궁도위가 딛고 있을 대지로.

* * *

파아아아아앗!

한 줄기의 빛살이 울창한 숲을 가르며 나아간다.

이내 그 뒤를 따라 수십 줄기의 빛살이 대지를 갈랐다.

“허억!”

자오개의 입에서 거친 숨이 토해졌다.

개방의 장로치고 그렇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냐마는, 그도 나름 경공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달려 나가는 이들의 뒤를 따르는 게 고작이었다.

그와 함께 왔던 개방의 거지들은 이미 뒤처져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이, 이런…….’

물론 사정은 감안해야 한다. 자오개는 남궁도위를 데리고 전력을 다해 무한까지 달리며 체력을 모조리 소진했으니까.

하지만…….

‘이들 역시 오늘만 해도 구강과 무한을 수없이 왕복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이런 속도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다고?

자오개의 시선이 앞쪽에 한 사내에게로 향한다. 의식을 잃은 남궁도위를 등에 업은 채 달리고 있는 백천이었다.

파앗!

백천의 발이 땅을 강하게 박찰 때마다 몸이 쭉쭉 나아갔지만, 상체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부상이 깊은 남궁도위에게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좀 어떠냐.”

“……안 좋아요.”

백천이 나직이 묻자 남궁도위의 상태를 살피던 당소소가 작게 답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당소소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남궁도위는 지금 당장 안정을 취해야 할 만큼 중한 상처를 몇 군데나 입었다. 그런 이를 전장으로 끌고 간다? 의원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이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나는 못 해.’

당소소는 의원이지만, 또 무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남궁도위의 입장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가족과도 같은 이들이 적의 칼날 아래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을 내버려 두고 이곳에 멈춰 안정을 취한다?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상태가…….’

당소소의 시선이 핏기 하나 없는 남궁도위의 얼굴로 향했다. 맥이 너무도 희미하고 불규칙하다. 당장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쿨럭!”

그때 의식이 없음이 분명한 남궁도위가 크게 피를 토해 냈다. 당소소가 당황하여 백천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사숙! 더는 무리…….”

“비켜 보거라.”

그때,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며 다가왔다. 당소소가 돌아보니 어느새 옆으로 달려온 당군악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도위의 곁을 내주었다.

“음.”

남궁도위를 잠깐 살핀 당군악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화산검협.”

앞쪽에서 무심한 얼굴로 달리던 청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상태가 무척 위중하네. 이대로라면 가는 도중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

“어쩔 텐가?”

청명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전장에 선 무인이…….”

입꼬리가 비틀리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남의 등에 업혀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호사죠.”

소름 끼치도록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당군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의 요상단을 쓰기에 적절치 않은 상황이네. 혹시 챙겨 온 요상단이나 영약이 있는가?”

청명의 고개가 현종 쪽으로 돌아간다. 그러자 현종이 지체없이 입을 열었다.

“현영!”

“예, 장문인!”

“자소단을 내어 주어라.”

“예.”

현재 화산에 남은 자소단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봉문 한 와중에 운남과의 교류가 끊긴 탓에 재료를 수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자소단은 더없이 중요하다. 지금 그들이 달려가는 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이 자소단 한 알이 화산의 제자 하나를 더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을 내린 현종은 물론이고, 그 명을 받는 현영에게도 망설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현영은 품 안에서 자소단을 꺼내 지체 없이 당군악에게 내밀었다.

“음!”

목함을 받아 든 당군악은 곧장 뚜껑을 열었다. 청아한 향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영약이었다. 이건 단순한 요상단으로 치부할 수 없는 귀물(貴物).

고개를 끄덕인 당군악은 자소단을 백천의 등에 업혀 있는 남궁도위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혈을 짚어 강제로 영약을 삼키게 만든 뒤, 업혀 있는 남궁도위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댄 채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달리는 와중에 기운을 운용해 돌본다는 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 까딱 실수라도 했다가는 남궁도위는 물론이고 치료를 시도하는 당군악마저도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군악의 손은 과감했다.

우우우우웅!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솟아났다.

주위에 있는 이들은 그 광경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전장으로 향하는 이가 이렇게 땀을 흘릴 만큼 내력을 소진하는 것도 결코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닐 터.

그만큼 당군악 역시 남궁도위에게 마음을 쏟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대로 얼마를 더 달렸을까?

“후…….”

마침내 당군악의 입에서 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네. 하지만…… 여기서 더 무리한다면 기껏 먹은 영단도 무용지물로 돌아가겠지. 지금은 그저 끊어질 것 같던 맥을 겨우 이어 놓은 것에 불과해.”

그가 청명을 보며 말했다.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더 무리한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청명은 그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도 데려갈 텐가?”

다시 묻는 말엔 그가 피식 웃었다.

“뻔한 말씀을.”

“……못 말리겠군.”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역시 청명과 같은 생각이었다. 의원의 입장에서 예의상 한번 만류해 보기는 했지만, 그가 남궁도위의 입장이라면 마찬가지일 테니까.

‘사지가 잘렸다 해도 기어서 장강으로 가겠지.’

무인에게는 때로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당군악의 시선이 슬쩍 백천에게로 향했다.

자문의 제자가 아닌 이에게 그 귀한 영단을 망설임 없이 내어 놓는 장문이나,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이를 장강으로 끌고 가는 청명이나, 다들 대단하긴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오히려 이쪽이로군.’

백천은 부상으로 의식을 잃은 이를 업고 달리고 있다. 사람을 업은 채 이 속도를 유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그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감탄이 나올 만큼 안정감이 있으니 놀라울 법했다.

그의 어린 나이를 감안한다면 더욱 그랬다. 경악할 만큼 대단한 내력과 섬세한 기의 운용을 동시에 갖춘 셈이다.

백천이 세심하게 남궁도위를 보호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 상황에서의 치료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당군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전력으로 달려 나가는 화산의 제자들에게선 가공할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는 청명의 성장을 이미 그 두 눈으로 확인했다. 비무에서 그가 느낀 것은 청명이 여전히 그를 향해 모든 것을 내보이지 않았다는 확신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화산검협이 아니라, 이들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어느새 화산과 당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가의 정예들이 이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경공이 무공의 고하를 가르는 척도는 아니겠으나, 그래도 분명 의미심장한 광경이었다.

당군악이 이토록 수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오검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은 그저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더 빨리.’

파아아앗!

백천의 발이 땅을 박찼다.

혹여라도 그들이 늦어 남궁이 몰살당하기라도 한다면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절대 그 꼴은 못 본다.’

협의니, 정세니 하는 건 이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닐까.

백천은 그저 등에 업힌 이 무인의 간절함을 지켜 주고 싶었다.

화산이 같은 처지에 처했다면, 백천 역시 남궁도위와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반드시 장강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이를 악문 백천이 포효하듯 소리쳤다.

“속도를 더 높여라! 늦어서는 안 된다!”

“예!”

파아아아앗!

남궁도위를 대동한 화산의 검수들이 더욱더 박차를 가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무정히 흘렀다.

마침내 장일소가 말했던 닷새째의 태양이 장강 너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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