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화. 화산은 어디에 있소? (4)
“……제발.”
본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는 건, 무인이 결코 취해선 안 될 비굴한 자세이다.
하지만 이곳의 누구도 남궁도위를 비굴하다 생각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소가주.”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현종이었다.
“소가주, 이게…….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물으려던 그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정말 모르겠는가.
저 장강에서 남궁이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 몰라 그리 묻는다는 말인가?
현종은 질문 대신 남궁도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덜덜 떨리는 현종의 손이 닿는 순간 남궁도위의 몸도 움찔했다.
“……장문인.”
남궁도위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현종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그의 두 눈을 바라본 현종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매화도에…….”
“…….”
“아직…… 기백의 남궁 식솔들이 갇혀 있습니다.”
“……소가주.”
“부상을 입은 이들은 하루하루 죽어 가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예, 그저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종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장문인. 그들을……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남궁도위가 다시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려 하자 현종이 얼른 그의 어깨를 굳게 움켜잡았다.
“……이러지 마시오, 소가주.”
“부탁드립니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당군악의 시선이 자오개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에 어린 노기를 본 자오개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소림은…….”
하지만 잠시 멈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소림의 탓이던가?
“개방과 공동, 그리고 소림은 남궁을 돕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만인방이 구원을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 강 위에서 수로채와 싸울 순…….”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장로님.”
당군악의 목소리는 스산하다 못해 유부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그의 분노가 큰 것이다.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묻는 것은 어째서 지금까지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느냐는 겁니다.”
“…….”
자오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 진짜 이유가 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당군악이 이를 드러내며 노려보자 자오개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구파가 지키지 못한 이들을 지켜 내기 위해 저 당가가 얼마나 애를 써 왔는지 그가 왜 모르겠는가?
구파끼리 있을 때의 그는 그들을 비웃는 입장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죄인일 뿐이다. 구파의 이름을 쓰는 그 누구도 감히 화산과 당가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남궁황은?”
“…….”
“남궁가주는 어찌 되었소?”
당군악이 이리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아는 남궁황은 제 아들에게 목숨을 건 탈출을 시킬 이가 아니다.
아니, 제 아들을 홀로 사지에 보낼 위인이 아니라는 말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아마도…….”
자오개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뿌득.
당군악이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퍼져 나갔다. 넓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당군악의 주먹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부탁드립니다.”
그때 남궁도위가 고개를 들고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말라붙은 피와 뒤섞여 흘러내렸다.
“그들을……. 그들을 구해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제발…….”
현종은 남궁도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입에선 차마 그러겠노란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의 목숨만 걸어서 될 일이라면 벌써 저 매화도를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는 그뿐만이 아니잖은가?
그는 이들에게 목숨을 걸어 달라 말할 수 없다.
“……미안합니다.”
현종의 어깨가 덜덜 떨린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소가주. 미안……합니다.”
이건 남궁도위에게 하는 사죄가 아니었다.
그건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사죄일지도 모른다. 그 고통스러웠던 나날, 화산이라는 무겁디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저 버티고 또 버텨야 했던 때.
현종은 원망하지 않았던가.
누구 하나 손 내밀어 도와주지 않음을.
누구 하나 그의 절규를 들어 주지 않음을.
수차례 원망하고 울부짖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현종은 지금 차마 남궁도위의 손을 선뜻 맞잡아 줄 수가 없었다. 그 괴로움에 이가 악물릴 지경이었다.
‘나는…….’
바로 그때였다.
스르릉.
등 뒤에서 검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종은 떨리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백천이 뽑은 검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다시금 검집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제 허리에 단단히 동여 묶은 채 한 걸음 앞에 나와 섰다.
말없이 현종을 바라보는 눈에 의기가 가득했다.
“백천아…….”
철컥!
유이설이 검을 뽑아 확인하는 과정은 백천보다 훨씬 재빨랐다. 마찬가지로 검을 단단히 동여 묶은 그녀가 백천의 옆에 섰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윤종이 단단한 눈으로 걸어와 그런 백천의 뒤를 받쳤다. 조걸이 금방이라도 달려갈 듯 성난 얼굴로 그런 윤종의 뒤를 지켰다. 당소소가 말없이 유이설의 뒤에 섰으며, 백상을 비롯한 남은 화산의 제자들도 일제히 제 검을 뽑아 확인하더니 말없이 진영을 갖추었다.
“……너희…….”
현종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누구 하나 나서자 말하는 이는 없다. 이 모든 걸 결정하는 것은 현종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말하고 있다.
그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누구 하나 망설이지 않고 저 장강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저벅. 저벅.
운검이 천천히 걸어와 그런 아이들의 뒤에 선다. 운암 역시 평소와 달리 굳은 얼굴로 그런 그의 곁을 지켰다.
현종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슴속에 격랑이 일었다.
돕고 싶다.
그 역시 당장이라도 저 장강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화산의 장문이다.’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아 버리려는 그때였다.
스릉.
지금껏 내내 침묵을 지키던 청명이 제 검을 반쯤 뽑아 슬쩍 바라보았다.
“청명아…….”
현종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현종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남궁도위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답해.”
“…….”
남궁도위가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우리가 너를 도와야 하지?”
“…….”
“그곳은 사지다. 돕는다면 우리도 목숨을 걸어야 해. 그런데 왜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하지?”
“…….”
“대답해.”
남궁도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고픈 말이야 너무도 많다. 할 수 있는 말은 끝도 없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이들을 완전하게 설득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저는.”
절박함 앞에서 논리가 무너지고, 가진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저, 남궁도위라는 한 명의 인간뿐이었다.
“볼…… 수가 없습니다.”
“…….”
청명의 입매가 더 굳어졌다.
남궁도위는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그들이……. 내 형제들이, 내 가족들이…… 내 동료들이 그렇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청명의 시선이 웅크린 남궁도위의 등에 내려앉았다.
“제발……. 제발.”
형편없이 떨리는 그 등에 실린 감정을, 청명은 알 수 있었다. 저 떨림은 고통에서 오는 것도, 슬픔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두려움.
남궁도위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청명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올까 봐. 반드시 지켜야 할 이들을 끝내 지키지 못한 자신을 마주하게 될까 봐.
모두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다, 최악의 경우 홀로 살아남게 될까 봐.
그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 떨고 있는 것이다.
“…….”
말없이 남궁도위를 노려보던 청명의 시선이 그제야 현종에게로 향했다.
“장문인.”
“…….”
“어찌하시겠습니까?”
그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듯했다. 재촉도, 만류도 없었다. 그저 묻는 것이었다.
선택은 오롯이 현종의 몫이라는 듯.
현종은 입술이 희게 질리도록 꽉 깨물었다.
“나는…….”
본디 그가 하려던 말은 ‘돕지 않는다.’였다.
협의를 모르는 이라 손가락질받아도 좋다. 저 소림과 결국 다르지 않았다 비웃음을 당해도 좋다. 하지만 그는 차마 타인을 위해 생때같은 제자들더러 목숨을 걸라고 명할 수 없었다.
현종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지옥 같은 나날을 지나온 화산의 장문인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돕지 않는단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옅은 신음만 새어 나올 뿐.
그때, 현종을 말없이 바라보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제가 위대하다고 생각한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
“그는 훌륭한 장문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를 믿고 따랐고, 누구나 그를 위해 목숨을 걸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한 문파를 이끌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말이 그의 나약함을 힐난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명이 현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생각에는 장문인도 결코 그에 뒤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청명아…….”
“그저 한 가지가 부족할 뿐입니다.”
청명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현종이 한숨을 내쉬며 먼저 물었다.
“무엇이더냐.”
얼핏 간절함까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더냐?”
청명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는 것입니다.”
청명의 시선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장문인의 손에 들린 검이…….”
잠시 말을 멈춘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스르르릉.
그의 검이 온전히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화산의 모든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가장 어두운 새벽, 아래로 내려진 검들이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났다.
말없이 지켜보던 당군악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온몸에 소름이 내달리는 이 감각을, 아마 전율이라 표현해야 할 것이다.
담담한 청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장문인의 검입니다.”
현종의 몸이 잘게 떨렸다.
“명하십시오.”
이를 드러낸 청명이 새파랗게 날이 선 어조로 힘있게 말했다.
“검은 의지를 행하는 것. 장문인께서 명하신다면, 저는 그 뜻을 이룰 것입니다. 제가, 그리고 저들이!”
현종의 시선이 전열을 갖춘 화산의 제자들을 훑었다.
모두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눈으로 현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어린 것은 굳건하기 짝이 없는 신뢰였다. 그들의 장문이 결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었다.
“저희가 그저 이룰 것입니다.”
현종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고뇌하는 듯, 마음을 다잡는 듯, 혹은 스스로 가야 할 길을 다시금 바라보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눈을 다시 떴을 때, 그 눈빛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남지 않았다.
“화산의 제자들은 들어라.”
“예, 장문인!”
모든 화산의 문도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장강으로 갈 것이다.”
모두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매화도에 갇힌 남궁을 구원하고, 저 사파 무리에게 아직 이 땅에 협의가 있음을 알려라!”
“예!”
마치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은 대답 소리가 울렸다.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궁도위는 크게 흐느꼈다. 긴장 풀린 몸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의 몸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를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일어나.”
“도, 도장.”
청명은 이를 갈아붙이며 남궁도위를 잡아끌었다.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직접 해. 우리가 구해 주는 게 아니야.”
흡사 성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같이 싸운다.”
“…….”
“누군가 대신 이뤄 주는 일 따위는 없어. 선두에 서는 건 너다. 네가 남궁을 구한다.”
흔들리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던 남궁도위의 두 눈에 떨림이 서서히 멎었다. 그리고 새파란 결의가, 독기가 들어찼다.
“예! 그럴 겁니다!”
청명이 뒤를 돌아보니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확신 가득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청명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청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의 의지에 화답했다.
“가자!”
마침내 동쪽의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지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산과 사천당가, 그 두 문파가 천우맹의 이름으로 장강에 진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