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9화. 화산은 어디에 있소? (3)
털썩! 털썩!
수레를 장원 앞에 세운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앞으로 엎어졌다.
“끄으으으…….”
“끄, 끝났다…….”
“드디어……. 드디어 빌어먹을…….”
박수를 받아 마땅한 광경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구강과 무한을 오간 끝에 마침내 사천으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유민들을 모조리 이 장원까지 옮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시는 못 해. 다시는.”
“내 말이.”
화산의 제자들이 진저리를 쳤다.
물론 누군가는 의문을 품을지 모른다. 그렇게 체력이 단련된 무인들이 무한과 구강 좀 왕복하는 게 뭐 그리 힘들겠냐고.
그냥 오가기만 했다면 이리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등 뒤에서 속도를 내라고 악을 써 대는 마귀 놈만 없었다면 말이다.
“쯧!”
마귀가 수레에 실린 짐 위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영 못마땅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뭐가 힘들다고, 쯧.”
“…….”
“한 번쯤은 더 가도 될 것 같은데.”
“끝났다고 이 새끼야!”
“마을이란 마을은 모조리 탈탈 털었다고!”
“심지어 개집에 있던 개까지 실어 날았다! 여기서 더 뭘 옮기라고!”
“죽여! 차라리 죽여!”
화산의 제자들이 거품을 물며 진저리를 치니 청명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조금이라도 여지가 있으면 이 글러 먹은 것들을 한 번은 더 굴려 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청명이 보기에도 더 이상 옮길 것이 없었다.
그때 수레에서 내린 현종이 안쓰러운 얼굴로 제자들을 굽어보았다.
“다들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장문인!”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엎어져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청명의 볼따구니가 부풀어 올랐다.
“와, 다들 사람 차별하는 것 보소.”
“차별 안 하게 생겼냐!”
“당연히 차별해야지!”
“저게 미쳐 가지고 이제는 장문인이랑 같은 대접을 해 달라고 하네!”
“저 위아래도 없는 새끼!”
터져 나오는 불만을 들으며 청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는다.
‘조만간 푸닥거리를 한번 하든 해야지.’
봉문을 하고 한창 두들겨 팰 때는 고분고분하던 것들이, 바깥 물(?)을 좀 먹으니 다시 슬슬 기어오른다. 이럴 때는 그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간에다가 대침을 박아 뻥 터뜨려 버려야 하는데.
“현영.”
“예, 장문인.”
“다 끝난 것이 맞느냐?”
현종의 물음에 현영이 장부를 꺼내 넘기며 확인했다.
“예, 장문인.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주 준비를 마쳤습니다. 추가로 함께 가고 싶다고 한 양민들까지 무한으로 모두 넘어왔고, 남은 이들에게도 확인을 한 번씩 더 했으니 더는 할 것이 없습니다.”
“으음. 그렇구나.”
현종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화산은 최선을 다했고,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했지만, 그럼에도 장강에 남겠다는 이들의 수가 무척이나 많았다. 그러니 제 할 일을 끝냈다고 마냥 기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고생한 제자들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현종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고생했으니, 한동안은 푹 쉬자꾸나.”
“예! 장문인!”
“가, 감사합니다!”
따뜻한 치사에 제자들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하지만 청명은 현종이 그들에게 휴식을 준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구시렁대고 있었다.
“아니, 뭘 했다고 쉰담……. 그동안 수련도 못 했는데, 잡일 다 했으면 이제 수련해야지. 검에 녹슬겠네. 원래 이렇게 진이 빠졌을 때 수련을 해야 나중에 진짜 힘들 때 검이 안 흐트러지는 법…….”
“허허허허허!”
현종은 노련하게 큰 웃음으로 그 구시렁거림을 묻어 버렸다.
청명도 장문인에게 계속 딴죽을 걸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계속 눈치를 살피는 제자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희번덕대는 눈깔에 화산 제자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봐, 저.’
‘저 눈빛 보라고.’
‘저 사갈 같은 놈. 아이고, 조상님. 저 새끼가 도삽니다.’
먹이를 노리는 뱀 같은 눈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힐끔대는 청명을 현종이 쭉 잡아끌었다.
“너도 들어가서 좀 쉬고.”
“끄응.”
청명은 영 아쉽다는 듯 미련을 못 버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 장원에서 나온 당군악이 이젠 익숙해진 화산의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맹주님.”
“아닙니다. 고생이랄 게…….”
현종은 넝마가 된 제자들을 슬쩍 바라보더니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저 꼴을 보고 있자니, 빈말로도 고생이랄 게 없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당군악이 화산의 제자들을 보더니 물었다. 정확히는 청명과 오검을 흘끗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 이제 섬서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글쎄요.”
현종이 조금 심란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본디 당가의 지원 요청을 받아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이곳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이제 끝났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대로 섬서로 돌아가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았다.
“……아무래도 장강에 남은 이들이 걱정되긴 합니다.”
“장문인.”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문인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장문인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게 된다면, 결국 필연적으로 장강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됩니다.”
“으음.”
“그건 저희가 생각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압니다. 압니다만…….”
현종이 슬쩍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엔 남쪽을 보고 선 청명의 뒷모습이 있었다. 최근 들어 청명이 저리 멍하니 장강 쪽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고민이 많겠지.’
사람에겐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과 머리가 움직이는 방향이 상충하는 순간이 있다. 아마 지금 청명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장문인인 그가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장강의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청명의 말에는 어긋남이 없으니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맹주님. 당가도 이곳에 있는 이들을 이끌고 사천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게 옳겠지요.”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그게 순리이리라. 이미 한번 소림과 척진 이상은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뭔가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조금 쉬며 정비를 하고 섬서로 가겠습니다.”
“예, 그리하시지요.”
당군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본디 미련을 가진 것은 오히려 당가 쪽이었지만, 어쨌거나 당가에 호의를 가진 이들을 대거 사천으로 이주시키는 상황이 되자 그 미련이 많이 옅어진 모양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야 그도 다르지 않겠지만, 그냥 손을 떼고 떠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테니까.
“예. 그럼…….”
현종이 제자들을 불러 장원 안으로 향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음?”
당군악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이들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강호인?’
속도와 기세를 봐선 결코 평범한 이들이 아니다.
현종과 화산의 제자들 역시 그 기척을 느꼈는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을 주시했다.
그리고.
파앗!
우거진 수풀을 부러뜨릴 듯 헤치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얼굴을 확인한 당군악은 순간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장로님 아니십니까?”
선두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분명 개방의 장로인 자오개였다. 딱히 왕래가 있던 사이는 아니나, 당가의 가주인 그가 개방의 장로를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여긴 어찌…….”
심지어 행색이 괴이하였다.
누더기는 개방의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지금 자오개는 상의를 걸치지 않고 있었다. 더욱 이상한 건, 그의 뒤를 따라 나타난 다른 개방도들 역시 바지만 입고 있단 점이었다.
“후욱! 후욱!”
자오개는 얼굴에 흘러내린 땀을 한 손으로 훔쳐 내었다.
“……가주님.”
그리고 당군악의 곁에 선 현종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장문인.”
그는 사뭇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두 분을 뵙고자 하는 이를 모셔 왔습니다.”
“예?”
그 말이 끝나자 한 사내가 땀투성이가 된 개방도의 등에서 힘겹게 내려섰다. 몸을 지탱할 힘도 없는 모양으로 들고 있던 검을 지팡이 삼아 짚었다.
그를 본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그 몰골이 처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옷은 온통 검붉은 피로 젖어 달라붙어 있었고. 군데군데 찢긴 옷 사이로 보이는 육체에는 끔찍한 자상이 가득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흘러내렸고, 푸르게 질린 입술은 한껏 말라 비틀어져서 여기저기가 갈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의 모두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 엉망진창인 몰골과, 언제나 화려하고 준수했던 그의 평소 모습을 연결시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모양새를 한참 들여다보던 누군가가 헉 숨을 들이켜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남궁…….”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남궁…도…위.”
뒤늦게 그의 정체를 알게 된 모두가 경악의 시선을 보냈다.
어째서 매화도에 있어야 할 남궁도위가 이곳에 있는지 고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남궁도위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터벅.
그때, 남궁도위가 힘겹게 한 걸음을 떼었다.
터벅.
또 한 걸음.
그가 두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휘청이니 한 개방도가 저도 모르게 부축하려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손을 거두었다. 지금 남궁도위를 도와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턱. 턱.
검수의 목숨과도 같은 검이 흙바닥을 연신 내리찍었지만,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못했다.
지금 남궁도위가 저 한 걸음을 떼기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이겨 내고 있을지 모두가 알 수 있기에.
터벅. 터벅.
끊길 듯 끊이지 않고 이어진 그 걸음은 마침내 누군가의 앞에서 멈추었다.
정적 속에서, 남궁도위와 청명의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를 갈구하듯 쉴 새 없이 일렁이는 남궁도위의 눈과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바라보는 청명의 눈이.
“……도장.”
털썩.
남궁도위는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처음에는 그가 혼절한 줄 알고 달려가려 했던 화산의 제자들이 이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무릎을 꿇은 채 청명을 올려다보던 남궁도위가 천천히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고꾸라질 것 같은 모양새로 위태위태하게 꿇어앉은 그의 입에서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와…….”
“…….”
“……도와주십시오.”
모두가 눈을 감아 버렸다.
백천도, 유이설도, 윤종도, 조걸도, 당소소도. 현종과 장로들, 그리고 운자 배와 다른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저 모습을 태연히 보기엔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남궁을…….”
쇠를 긁어 대는 듯한 목소리가 나직이 이어졌다.
울분을 토하지 않는다. 절규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담담하게 느껴지지만, 그 목소리에 어린 절박함만은 모두에게 똑똑히 전해졌다.
“남궁을…… 도와주십시오.”
머리를 조아린 남궁도위가 바닥의 흙을 긁듯이 움켜쥐었다.
“……제발.”
구부정한 남궁도위의 등을 유일하게 말없이 똑바로 지켜보던 청명도 결국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직 여명이 밝아 오지 않은, 가장 컴컴한 밤하늘이 시야에 쏟아졌다.
‘빌어먹을…….’
청명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