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8화. 화산은 어디에 있소? (2)
지독한 침묵이 강변을 짓눌렀다.
누군가는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저 남궁도위가 그들을 질책하고 욕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 이들은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이곳엔 소림이 있다. 공동이 있고, 개방이 있다. 강호를 수호하고 협의를 지키는 구파일방의 세 문파가 바로 남궁도위의 눈앞에 있지만, 그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가 반드시 구해 내야 할 이들이 여전히 저 섬에 갇혀서 구원만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남궁도위는 마치 이들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이들에게 그 어떠한 기대도 없으니까.
그 사실이 이곳에 선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취급을 받았음에도 한마디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되레 고개를 숙여야 하는 그들의 입장이, 그들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양심을 후벼파고 쥐어뜯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알지 못해 대답할 수 없었고, 설령 안다 해도 염치가 없어 차마 먼저 입을 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남궁도위가 차가운 눈으로 그들 모두를 돌아보았다.
“……묻지 않습니까.”
“……소가주.”
결국 법정이 답답한 신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소가주께는 정말 미안하외다.”
소림승들은 안다. 법정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는 것을.
지금 법정은 진심으로 남궁도위에게 죄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제 곧 팽가가 도착할 것이오. 그럼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매화도에 남아 있는 남궁세가를 구해 내도록…….”
“화산은!”
그 순간 터져 나온 남궁도위의 목소리가 법정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궁도위의 얼굴이 실룩였다.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던 입술이 다시금 힘겹게 열렸다.
“……어디에 있습니까!”
법계의 고개가 천천히 수그러들었다.
남궁도위는 그들을 찾지 않는다. 구원을 청하지 않는다. 그가 구해야 할 이들이 눈에 보이는 곳에 서 있음에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바라고 외치고 원하지 않는다.
‘무슨 자격으로 입을 열 수 있겠는가?’
그저 죄인인 것을.
“소가주…….”
법정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심정은 알겠지만, 지금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소가주께서는 작고하신 선친……. 아니, 남궁의 가주님을 대신하여 저들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법정의 눈과 남궁도위의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
법정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저런 눈을 마주한 적이 있던가?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마치 길가에 널린 돌멩이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눈빛이다. 그 어떤 기대도, 바람도, 희망도 없다. 일말의 감정조차도 느낄 가치가 없다 말하는 듯했다.
“모르십니까?”
“…….”
대답이 돌아오질 않자 남궁도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척대며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소, 소가주!”
터벅. 터벅.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한 남궁도위는 다시 지난한 걸음을 묵묵히 옮겼다.
그러자 소림승들이 하나둘 좌우로 비켜났다.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면서도, 감히 앞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격하게 그의 앞길을 터 주었다.
터벅. 터벅.
열린 길을 따라 힘겹게 걷는 남궁도위는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소가주.”
“…….”
“소가주!”
“…….”
“소가주! 뭘 어쩔 셈이오!”
처음에는 타이르는 듯하던 법정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이내 고함과도 같아졌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저 비틀거리며 걸어갈 뿐이었다.
입술을 꽉 깨문 법정이 다시 외쳤다.
“감정적으로 굴지 마시오! 아무리 화가 났다고는 하나, 섬서에 있는 화산이 뭘 할 수 있다는 말이외까! 남궁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시오!”
남궁도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법정의 말은 그에게 조금도 닿지 못했다.
그 무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은 그 어떤 욕설이나 절규보다 더 처절하게 모두의 가슴에 죄악을 아로새겼다.
“이…….”
붉으락푸르락한 법정의 얼굴이 파들파들 떨렸다.
“소가주!”
“……화산.”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남궁도위가 아니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자오개가 남궁도위 대신에 입을 연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법정이 아닌 남궁도위를 향해 말을 꺼낸 것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소.”
“…….”
드디어 걸음을 멈춘 남궁도위가 천천히 자오개를 돌아보았다.
“……어딥니까?”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소.”
자오개가 결심을 굳힌 듯 담담히 말했다.
“나와 같이 가십시다. 안내해 드릴 테니.”
“…….”
남궁도위가 말없이 자오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장로! 무슨 짓을 하는 것이외까!”
법정이 노기가 등등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오개는 차가운 눈으로 그런 그를 마주 보았다.
“알려 달라고 해서 알려 주는 것뿐입니다. 딱히 대단한 비밀도 아니지요.”
“이곳에 화산이 있을 리가 없거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와 있습니다.”
“……뭐라?”
자오개는 법정을 똑바로 보며 다시 또렷하게 말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법정이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그들은 분명 장강의 일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소! 그런데 어찌…….”
“구파일방을 돕지 않겠다고 한 것이겠지요. 그들은 지금 장강의 유민들을 구호하고 있습니다.”
법정은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화산이 이곳에 와 있다는 건 처음 들어서였다. 당황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자오개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는 것을 묻는데 모른다고 할 수는 없으니, 그냥 가르쳐 주었을 뿐입니다.”
법정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오개의 말에는 틀림이 없다. 묻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리고 화산이 어디에 있는가는 그리 대단한 비밀도 아니다.
하지만 그 뒷일이 문제다.
저 남궁세가가 이 강에 도착해 있는 구파일방을 무시하고 저 화산에 구원을 청했다는 말이 퍼지게 된다면?
그보다 참혹한 일이 또 있겠는가?
“자오개!”
법정이 귀신 같은 얼굴로 자오개를 노려보았다.
“이 행동이 개방의 뜻이오?”
“그럴 리가요.”
자오개는 담담히 고개를 내저었다.
“방주도 아니고, 장로밖에 안 되는 놈이 무슨 수로 개방을 대표하겠습니까. 그냥 제 뜻이지요.”
“개방의 장로에게 자신의 뜻이란 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법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자오개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을 감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현실적으로는 법정의 말이 맞다.
아무리 그가 제 의지로 남궁도위를 안내한다고 한들, 개방의 장로 신분을 지닌 이상, 행하는 모든 일이 결국 개방의 의지가 되는 법. 수많은 개방도를 이끄는 이에게 개인의 감정이란 존재할 수 없다.
“개방의 장로로서 어찌 행동해야 할지 모를 분이 아니시잖소.”
“…….”
“물러서시오.”
자오개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서!”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법정의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하늘을 물끄러미 보던 자오개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럼 별수 없지요.”
“잘 생각하셨…….”
우드득!
법정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자오개가 제 상의를 거칠게 쥐더니 그대로 뜯어 버렸다.
법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 무슨……!”
자오개는 찢겨 버린 누더기 옷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형편없이 나뒹구는 그 천 조각 사이로 개방의 문도임을 상징하는 매듭이 선명히 보였다.
팔결(八結).
오직 개방의 장로만이 여덟 개의 매듭을 묶을 수 있다.
“이깟 게 뭐라고.”
“자, 자오개!”
“이 신분 때문에 제 할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 신분을 벗어 버리는 수밖에요.”
자오개가 홀가분하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법정은 황망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하는 행동은 개방과 관련이 없소이다. 그러니 내게 명령하지 마시오. 그러실 권한이 없으시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린 자오개가 재빨리 남궁도위를 부축했다.
“안내하겠소, 소가주.”
“…….”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남궁도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오개가 막 발을 떼려고 하는 찰나, 몇몇 개방도들이 자오개처럼 제 옷을 뜯어 던지고는 달려와 남궁도위를 부축했다.
“이……. 뭣들 하는 거냐? 이 멍청한 놈들이!”
자오개가 눈을 부라렸지만, 개방도들은 되레 히죽히죽 웃어 댔다.
“장로……. 아니, 노개(老丐: 늙은 거지)는 나이가 들어 사람을 업고 먼 길은 못 갑니다. 비키십쇼. 다친 양반 도착도 하기 전에 비명횡사하게 만들지 말고.”
“퉷. 빌어먹을. 내 살다 살다 개방 거지라는 것도 감투가 되고 있을지는 몰랐네. 이러니 내 맘대로 못 살았지.”
다들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자오개를 개방도들이 밀어 냈다.
“비키십시오. 사람 부상당한 거 안 보이십니까.”
“장팔아. 네가 업어라.”
“예, 분타……. 아니, 형님.”
저들끼리 앞다투어 남궁도위를 부축하고 업어 대는 모양새를 본 자오개가 결국은 피식 웃어 버렸다.
“멍청한 거지새끼들 같으니.”
“노개만 하겠습니까?”
답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자오개는 슬쩍 법정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노기로 두 눈이 들끓고 있었다. 그걸 빤히 보며 히죽 웃은 자오개가 당당히 소리 쳤다.
“가자.”
“예!”
남궁도위를 업어 든 거지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
덩그러니 남겨진 이들은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지는 순간까지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적막이 다시 내려앉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거나 머나먼 곳에 시선을 던졌다.
아는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은 이 중원의 협의를 대표하지 못함을. 도움이 간절한 이들이 찾아올 곳이 될 수 없단 것을.
“하…….”
누군가가 흘린 자조적인 웃음이 모두의 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 짤막한 소리에 억울함, 죄스러움이 한데 뒤섞인 것이 너무 생생하여 입술 끝이 아릴 정도였다.
“하하하핫!”
그때 누군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혜방!”
법계가 질책하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혜방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더 크게 웃어 대었다.
“하하하하하! 꼴 좋지 않습니까? 이게 방장께서 원하던 것입니까?”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제 입을 막으면 뭐가 달라집니까!”
혜방이 지지 않고 버럭 소리쳤다.
“예! 제가 어리석어 그 드높은 뜻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어리석고 멍청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제바알!”
피가 맺힌 듯한 그 통렬한 목소리에 얻어맞은 법정은 힘없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누구 하나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 누구도.
“허허.”
법정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다는 말인가.
어쩌다가…….
“아미……타불.”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으니 몸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듯했다. 끝없는 저 무저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