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4화. 고개 숙이지 마. (4)
“흐으으음.”
장일소가 콧소리를 흘리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옅은 두 눈에 밝은 보름달이 들어찼다.
“늦은 밤, 장강 위에서…….”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달을 벗 삼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니, 어찌 흥취가 일지 않을쏘냐.”
그의 술잔 위로도 달이 가만 내려앉으려던 찰나였다.
“……저도 옆에 있습니다만.”
“쯧.”
순간 장일소가 짜증 어린 얼굴로 건너편에 앉은 호가명을 돌아보았다.
“넌 영영 운치를 모르니.”
“운치는 모르겠지만, 이치는 압니다.”
“됐다.”
장일소가 손을 휘휘 내젓고는 손에 든 잔을 천천히 비웠다. 한 방울 남김없이 들이켠 그는 조금 나른해진 얼굴로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좋지 않으냐?”
흡사 달구경이라도 나온 듯한 양으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장일소를 보며, 호가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련주께서는 흥취가 이시겠지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걱정이라고 하셨습니까?”
호가명이 떨떠름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흑룡선의 갑판 위다.
흑룡왕이 사패련의 부련주이고, 장일소가 련주라고는 하지만…… 흑룡선은 수로채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다. 그 갑판 위에서 제집인 양 구는 건 남의 집 안방을 흙발로 쳐들어간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만일 흑룡왕이 만인방에 쳐들어와 장일소의 옥좌에 앉는 일이 벌어진다면, 당장 호가명부터 흑룡왕을 죽이기 위해 못 할 짓이 없을 것이다.
‘이걸 담대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곳은 강 위다.
그리고 그들이 이끌고 온 만인방도들은 이 흑룡선이 아닌 다른 배에 머물고 있다. 흑룡왕이 헛된 마음을 먹는다면 정말 심각하게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태연하게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쿡쿡쿡쿡.”
불안한 얼굴로 자꾸 주위를 둘러보는 호가명을 보며 장일소가 나지막이 웃었다.
“가명아,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쓰겠니.”
“……제 목숨이 문제였다면 겁 따위는 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련주님의 목숨을 두고 배짱을 부릴 만큼 대단한 인간이 아닙니다.”
“배짱이라…….”
장일소가 검지를 가볍게 좌우로 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이건 배짱이 아니라 계산이란다.”
“…….”
“흑룡왕은 생각보다 똑똑한 인간이야. 그렇기에 지금은 절대로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어째서…….”
“내가 죽으면 사패련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잃어버릴 것이고, 각기 분열하겠지. 그럼 눈이 시뻘게져서 이곳을 노려보고 있는 저 중놈들의 분노를 누가 받아 내야겠느냐?”
“아…….”
호가명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확실히 장일소가 발을 빼 버리면 강남은 몰라도 이 장강만은 초토화가 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 소림의 분노는 무시무시할 테니까.
“흑룡왕은 혹시나 눈먼 화살에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거란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거라. 혼자 마시니 영 적적하구나.”
“……달을 벗 삼아 마신다시더니.”
“뒤끝이 길구나. 나쁜 버릇이란다.”
장일소가 피식 웃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잠긴 매화도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가엾지 않으냐?”
“새삼스레 말입니까?”
호가명은 제 앞에 놓인 술을 천천히 들이켰다.
탁.
그리고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련주님께서 겪어 온 일들에 비한다면 저런 일 따위는 위기라 불릴 만한 것도 못 됩니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지.”
“……?”
“너와 내가 겪은 일이란다.”
장일소의 말에, 내내 무표정하던 호가명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사람들은 장일소의 화려한 면만 본다.
젊은 나이에 만인방의 방주가 되고, 그 만인방을 신주오패의 일원까지 키워 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만인방을 넘어 천하의 사파를 총괄하는 사패련의 련주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더없이 화려한 이력이다.
하지만 그 누가 알겠는가?
그 화려한 일들을 이뤄 내기 위해서 장일소와 호가명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죽을 고비를 넘긴 일 따위는 술안주도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목숨의 위기란 해가 지면 찾아오는 밤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호가명이 술병을 들어 장일소의 빈 잔을 채웠다.
“그리고 앞으로도 겪을 일이겠지요.”
“그렇지. 하하하핫.”
장일소는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술이 차오른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 와중에도 눈은 어둠에 잠긴 매화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흠?”
그때, 장일소의 눈가가 살짝 꿈틀했다. 그 반응에 호가명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하지만 장일소는 이내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피처럼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남궁황이 굳은 얼굴로 남궁도위를 돌아본다. 언제까지고 어릴 것 같던 아들이 무인의 얼굴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황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령 그의 아들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이라면 그가 누구라 해도 목숨을 걸어 볼 가치가 있다.
“장로들은?”
“준비됐습니다, 가주님.”
남궁도위의 뒤에 선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초췌하고 야윈 꼴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행색이었지만 두 눈만큼은 더없이 형형하고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안광 때문에 발각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남궁황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도위.”
“예, 가주님.”
“결심을 굳혔다는 것은 알지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예.”
“돌아보지 마라.”
남궁도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네 어깨에 걸린 것은 이 섬에 있는 남궁의 목숨이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의 목숨 같은 건 더없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남궁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없이 결의에 찬 눈으로 남궁도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그렇게 마지막으로 아들의 모습을 두 눈에 새겨 넣은 남궁황은 미련 한 점 남기지 않았다는 듯 몸을 획 돌렸다.
“남궁명.”
“가, 가주님.”
“이곳을 부탁한다.”
남궁명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에도 이내 단호한 기세가 서렸다.
“예, 맡겨 주십시오.”
“좋아.”
남궁황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힘있게 말했다.
“가자.”
“예!”
“최대한 발각되지 않고 접근한다.”
정확하게 일곱이다. 남궁황과 남궁도위, 그리고 남궁의 핵심과도 다름없는 다섯 명의 장로들까지.
그들은 먹물처럼 검게 물든 장강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물방울 튀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수면 아래로 잠수한 후 천천히 배 쪽으로 접근했다.
남궁도위는 남궁황의 바로 뒤에 따라붙어 최대한 조심스레 자맥질을 해 나갔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물속을 한참 동안 헤엄친 남궁도위의 가슴에 순간적으로 헛된 희망이 파고들었다. 이대로 들키지 않은 채 저 배 아래를 통과해 뭍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바람은 바람에 지나지 않고, 희망은 대체로 깨진다.
그들이 배까지 절반도 채 다가가기 전에 바닥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큭!”
남궁황의 입에서 새하얀 기포가 쏟아졌다.
저 미친 수적 놈들이 강바닥에 붙은 채로 오가는 이들이 없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 밖이었다면, 저들 따위가 남궁황의 기척을 잡아낼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러나 이곳은 물속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몸을 숨길 만한 엄폐물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곳.
제아무리 남궁황이라도 해도 저들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쿠르르르륵!
물속에서 뭔가 커다란 소리가 연이어 몰아치더니, 수십여 개의 기다란 작살이 그들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날아들었다.
남궁황이 이를 악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이내 잔잔했던 장강의 수면 위로 거대한 물보라가 솟구쳤다.
“뭐냐!”
“적습이다! 쥐새끼들이 물속에 있다!”
“쇠뇌대!”
고요하던 장강이 순식간에 고함과 악다구니로 가득 찼다.
쾅!
선실 안에 있던 흑룡왕이 벼락같이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냐!”
“놈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모양입니다.”
“뭐?”
흑룡왕이 획 고개를 돌려 매화도를 살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니 여전히 매화도 중앙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똑똑히 보였다.
‘뭐지?’
인원의 대부분이 여전히 매화도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남궁황!”
흑룡왕이 우렁우렁 고함을 내지르며 갑판을 가로질러 달렸다.
촤아아아악!
이윽고 물 위로 솟아오르는 제왕검 남궁황의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으하하하하하핫!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네놈이라도 살아 보고 싶다는 거냐!”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 흑룡왕이 지체할 것도 없다는 듯 손으로 허공을 내리그었다.
“쏴라! 저 비겁한 놈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줘라!”
수적들이 갑판 한쪽으로 몰려드니 배가 일순 기우뚱 기울어졌다. 어깨가 서로 닿을 만큼 빽빽하게 밀집한 수적들이 일제히 활을 들어 남궁황을 겨눴다.
“발사아아아아아아!”
쇄애애애애애액!
내력을 잔뜩 실은 화살들이 일제히 쏘아졌다. 흑룡선뿐만 아니라 수십여 대의 배에서 동시에 발출된 화살들은 흡사 폭우처럼 남궁황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지금이 밤이 아니라 낮이었다면, 화살이 장강 위에 거대한 그늘을 만들어 내고도 남았을 만한 광경이었다.
“흑룡와아아아아앙!”
하지만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남궁황이 발출한 거대한 검기가 마치 강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며 사위를 밝혔다. 그러자 쏟아지던 화살 비가 충천(衝天)하는 검강에 맞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지켜보는 이들이 오싹할 정도로 가공할 검기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핫!”
하지만 흑룡왕은 그 광경을 보고도 오히려 앙천대소했다.
“물어뜯어라! 감히 장강에 몸을 담근 대가가 무엇인지 놈에게 똑똑히 알려 주어라!”
들고 있던 활을 던지듯 내려놓은 수적들이 일제히 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들이 물로 뛰어들며 피어오른 포말만으로도 강이 순간적으로 희게 물든 듯 보일 정도였다.
촤아아아악!
그 많은 인원이 가공할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남궁황을 비롯한 일곱 명에게로 쇄도했다.
물 밖은 물론이고, 물속까지.
마치 물에 빠진 범을 향해 수백 마리의 상어 떼가 달려드는 광경 같았다.
“가주님!”
“알고 있다!”
남궁황이 크게 외쳤다.
“장로들은 물속에서 접근하는 이들을 막아 내라! 나는 물 위를 맡겠다!”
그는 손마디가 모두 희게 질리도록 검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도위만은 살려 보낸다!’
두 눈에 이제껏 없었던 강렬한 의지가 솟구쳤다.
“와라! 수로채의 개들아! 남궁의 가주가 어떻게 죽는지 알려 주겠다!”
상처 입은 범처럼 포효한 남궁황의 검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수면의 물을 그대로 쳐서 날렸다.
콰아아아아아!
그러자 장강의 수면에 거대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솟구친 파도가 물 위에 떠 있던 배들을 크게 뒤흔들어 댔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아앗!
마치 돌고래처럼 물 위로 몸을 띄운 수적들이 남궁황과 남궁도위를 향해 작살을 날렸다.
“도위!”
“예!”
타앗!
남궁도위는 남궁황의 어깨를 밟고 비조처럼 물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검이 허공에 새하얀 수를 놓았다.
어두운 하늘.
칠흑 같은 장강.
그 가운데 놓인 흰빛의 수는 다소 애처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