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52화 (953/1,567)

952화. 고개 숙이지 마. (2)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이틀이란 시간 동안…… 소림승들은 처음 자리한 곳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누구 하나 자리에 앉는 이도 없었고, 누구 하나 그 자리를 벗어나는 이들도 없었다. 그저 핏발이 선 눈으로 매화도와 그 사이를 가로막은 사패련의 선단을 노려볼 뿐이었다.

움직임 하나 없는 고요함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들의 내심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고뇌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 순간들을 반복하며 자신의 입장을 찾아가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소림승들은 그런 일반적인 과정을 겪지 못했다.

평범한 고뇌를 하기에는 그들을 둘러싼 소림의 문턱은 너무도 높았고, 그들이 배운 이상은 너무도 훌륭했다.

“……방장.”

참다못한 소림승 중 하나가 핏발 선 눈으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혜방(慧訪).

과거 비무대회 배첩을 전달하기 위해 화산을 방문했던 이다. 그의 입에서 짓눌린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것입니까?”

“…….”

법정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혜방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정말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저리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실 것입니까?”

그러자 법정의 목 근육이 살짝 움찔했다. 혜방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방장!”

그제야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노기를 쏟아내는 혜방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하면, 어찌하겠느냐?”

“…….”

“내 거꾸로 물으마. 너는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

“이대로 우리가 저 사패련과 싸워야 한다고 보느냐? 불리하기 짝이 없는 전장과, 밀리는 세력을 모두 무시하고 저 강으로 뛰어들어 산화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냐?”

혜방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법정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다. 지금 그들이 저 강으로 뛰어드는 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혜방은 이내 법정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것이 어리석습니까?”

“혜방!”

“저를 그리 가르치신 것은 바로 방장이 아니십니까?”

그 말에 되레 법정이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소림은 중원을 수호해야 한다. 쫓아야 할 것은 불도(佛道)기도 하지만, 협의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

“이게 불도를 지키는 길입니까? 아니면 협의를 지키는 길입니까?”

“그만…….”

“그저 말뿐이셨습니까? 방장!”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언성을 높인 이는 법정이 아니라 법계였다. 그가 진노한 얼굴로 혜방을 노려보았다.

“너는 그저 울분을 토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방장께서는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목숨을 건 결정을 내리셔야 한다!”

혜방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너라면 그 잘난 협의를 위해서 사형제와 사질들을 모두 죽는 길로 내몰 수 있느냐? 그게 옳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느냐?”

혜방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법정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곳에 있는 모두의 속이 뒤틀리고 곪아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져만 갈 것이다. 화농이 생긴 곳에 짙은 흉터가 남듯이, 어쩌면 이 상황이 끝나고도 그 흉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장일소.’

장일소가 두려운 건 이래서이다.

장일소는 이미 승리했다.

설사 소림이 저 강으로 뛰어들어 천운을 등에 업고 남궁을 모두 구해 내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흉터는 영영 아물지 않을 것이다.

불도와 협의라는 두 가지 무기를 품고 거침없이 나아가던 소림은 이 순간부터 더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상황이 단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라 생각하니 오한이 들고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시 눈을 뜬 법정의 입에서 어찌할 수 없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이 더는 예전과 같지 않음을 말이다. 그들 안에 뿌리내린 고뇌와 불신이 법정을 바라보는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때, 법정에게는 다행스러울지도 모를 일이 벌어졌다.

공동의 검수를 이끄는 종리형과 개방의 거지들을 규합한 자오개가 도착한 것이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상황입니까?”

“……아미타불.”

매화도를 가로막은 선단들을 보며 종리형이 갑갑함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저 섬에는…….”

“예.”

법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의 생존자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자오개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생존자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생존자라는 말은 보통 이미 궤멸할 만큼 궤멸한 세력에서 살아남은 소수를 칭할 때나 사용하지 않던가?

무척이나 미묘한 어감이었다.

“저 간악한 놈들이!”

이들 역시 한 문파를 이끄는 입장이다. 그러니 사패련이 무슨 생각으로 저곳을 가로막고 남궁을 살려 두고 있는 건지 이해 못 할 리 없었다.

“늦은 겁니까?”

“……최대한 빨리 왔지만,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만인방이 강을 점령한 뒤였습니다.”

“이, 이런……. 광서에 있는 만인방이 어찌 이리…….”

종리형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만인방과 수로채만 하더라도 이곳에 있는 이들만으로 상대하기 쉽지 않을 만큼 강한 세력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배까지 확보해 강 위를 점령하고 있다면, 저곳을 돌파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종리형이 물었다.

“……돌파가 가능하겠습니까?”

자오개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돌파는 그리 어려울 게 없지요. 있는 전력을 다 밀어 넣으면 별문제야 있겠습니까?”

“그러면…….”

종리형이 희망이라도 본 양 반색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오개가 그 빛을 툭 꺼트렸다.

“하지만 이건 포위진을 뚫는 전투가 아닙니다. 저들이 점령하고 있는 곳을 맨몸으로 돌파한 뒤에 매화도에 도달하여 남궁의 생존자들을 구출한 뒤 다시 강을 건너야 합니다.”

“…….”

“같은 전투를 두 번 치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지친 몸으로 사람을 하나씩 달고 말이지요.”

종리형의 이마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지 제대로 보인 것이다.

“매, 매화도에서 우선 전력을 추스르면?”

“우리도 함께 포위될 뿐이지요. 전력을 추스르도록 저들이 내버려 두겠습니까?”

“…….”

“그럼 우리도 배를 구해 오는 건 어떻습니까?”

자오개가 피식 웃었다.

“패군이 그 생각을 못 했겠습니까? 아마 주변 몇백 리 내에는 나룻배 하나조차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만일 그보다 멀리로 나가 배를 구해 온다면 도착할 무렵엔 남궁이라는 성씨는 이 장강 위에 더는 존재하지 않겠지요.”

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오개는 냉소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개방의 장로답게 상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어찌하긴요.”

자오개가 배치된 배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안에 있는 이들을 노려보는 것이겠지만.

“있는 전력 없는 전력 죄 쥐어짜서 남궁을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 보든가……. 그게 아니면 저들이 저기서 죽는 꼴을 지켜봐야 하는 거지요.”

“주, 죽는 꼴이라니……!”

종리형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발을 재촉해 장강까지 내달리면서 많은 경우를 머릿속에 그려 봤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상상도 못 했다.

“바, 방장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종리형은 그렇게 묻고 말았다.

이건 도무지 그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철통같은 방어를 뚫고 수많은 희생을 내는 것도, 그렇다고 남궁이 이렇게 말라 죽어 가는 몰골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도 차마 못 할 짓이었다.

“……아미타불.”

하지만 법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만으로 판단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그럼.”

“아직 팽가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팽가주까지 도착한 이후에 결정을 내리는 게 어떨까 합니다.”

“오, 옳은 생각 같습니다.”

종리형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로 법정의 말이 옳고 그르다를 판단하여 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문파의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르는 결단의 순간을 뒤로 조금이라도 미룰 수 있음에 안도할 뿐이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무작정 안도할 일도 아니었다.

종리형은 아직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공동의 문도들을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시간이 너무도 많다.

이제 남은 시간은 사흘. 운명을 결정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지만, 이 상황 앞에 스스로를 곱씹기에는 과도하게 긴 시간이었다.

그들은 지금부터 마치 형벌을 받듯이 이상과 현실을 두고 격렬하게 고뇌해야 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종리형을 보며 자오개가 눈살을 찌푸렸다.

‘틀렸군.’

모름지기 결단이란 과감해야 하는 법이다. 미루고 미뤄 나오는 결단이 제대로 된 것일 리 없다.

더구나 이미 이들이 나눈 대화에서 이들의 결정이 무엇일지 엿보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오개는 굳이 이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이에 미묘한 알력이 있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들에게 남궁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 만큼의 의리가 있겠는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문파의 운명까지 걸어 가면서?

이는 자오개 역시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냉소와 자괴감 앞에 시선을 돌린 그는 매화도를 응시했다.

‘남궁가주. 어찌 그리 멍청한 짓을 하셨소.’

깊은 탄식과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남궁가주 역시 마음 깊이 탓하고 싶진 않았다. 이곳에 선 이들도 심장을 칼로 깔짝깔짝 긁어내는 듯한 심정인데, 저 섬 안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버텨야 하는 남궁의 심정은 말로 해 무엇 하겠는가.

단 한 번의 실수로 치러야 할 대가라기에는 지독스럽게 가혹했다.

침묵을 지키던 자오개가 감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나는 기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법정과 종리형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결국 두 분의 마음일 뿐입니다. 다만…….”

자오개가 살짝 입술을 깨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두 분이 내린 선택을, 천하는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를 넘어 역사가 기억할 것입니다.”

“…….”

“옳은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남긴 그는 몸을 돌려 버렸다. 더는 저들을 마주하고 서 있기가 힘들었으니까.

저 두 사람에 대한 혐오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저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에 대한 혐오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그 역시 동조자가 아닌가? 선택은 저들에게 미뤄 버리고, 입바른 말이나 해 대는 그가 이곳에서 가장 비겁한 이일지도 모른다.

자오개가 뒤쪽으로 빠지니 거지 하나가 따라붙었다.

“본단에 상황을 전할까요?”

“……그래야지.”

그러나 남은 시간이 사흘이라면, 본단에서도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노령으로 인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개방주에게는 실로 가혹한 선택이니까.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잠깐…….”

그 순간 자오개가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할 수밖에 없다. 개방의 장로로서 선택하지 않아야 할 길이지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의 그는 그 말을 꺼내고 말았다.

“……화산이 어디에 있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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