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1화. 고개 숙이지 마. (1)
죽은 것처럼 널브러져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을 수레에 실어 나르면서 상황을 스치듯 듣기는 했으나, 평범한 양민들이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화산의 제자들은 자연히 장강의 자세한 상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청명은 금세 심드렁해진 표정으로 귀만 후볐다.
“아뇨, 뭐…… 알아서 잘하겠죠.”
“……그런가?”
청명이 귀를 판 손가락을 입으로 훅 불었다.
“그래도…….”
“에이.”
당군악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청명이 손을 내저었다.
“순서가 거꾸로 되면 안 되죠.”
“응?”
“지 손으로 칼 차고 싸우러 나간 놈들이랑, 죄 없이 피해받는 사람들 중에 누가 우선이겠어요?”
“……그야…….”
당군악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후자일 테니까.
“설사 그쪽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킨 다음이에요.”
청명의 말에 당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이 어린 도사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그걸 실천하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 지척에서 강호의 판도를 바꿀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관심을 끊는다는 건 보통 인내심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폭급한 성격과 과장된 행동 때문에 오해를 사기는 하지만 당금 강호에 청명만큼 인내심이 깊은 이도 그리 많지 않을…….
“근데…….”
“으응?”
청명의 귀가 쫑긋거렸다. 앞으로 내린 손은 쉴 새 없이 꼼지락댔고, 입술도 뭔가 말하고 싶은 듯 바쁘게 달싹대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맞아떨어지는 않는 모습에, 당군악의 표정이 살짝 떨떠름해졌다.
청명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 상황이 그…… 어…….”
“…….”
“아니, 뭐 궁금하다는 건 아니에요! 꼭 그런 건 아닌데, 혹시 이송하는 데 피해가 올 수도 있고……. 그…….”
“안 궁금하다더니?”
“에이! 누가 궁금하대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당군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에이! 남궁 새끼들이 뒤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별안간 역정을 낸 청명이 사형들을 획 돌아보더니 버럭 소리쳤다.
“다 쉬었으면 일어나! 날 새겠다!”
“……저 새끼는 괜히 우리한테 화풀이야.”
“언젠가는 팬다, 언젠가는…….”
화산의 제자들이 구시렁대며 착실히 일어났다. 입으로야 투덜거려도 그들 역시 한시라도 빨리 장강 유역의 유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곳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이들까지 화산이 어찌해 줄 도리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사천으로의 이주라는 큰 결심을 한 이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천으로 사람 옮기는 데는 별문제 없어요?”
“문제랄 게 있겠는가?”
당군악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선은 장강 유역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네. 사천으로 사람들을 보내는 건 천천히 해도 될 일이지. 자네들이 가지고 온 곡식과 매화도에서 날라 온 곡식 덕분에 유민들을 먹이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지.”
“그럼 됐죠. 사천에 땅은 구했고요?”
“그건 조금 고민 중일세.”
당군악이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수가 많다 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당가의 영향력이 강한 성도에 자리를 잡게 하고 싶다만…….”
“싶다만?”
“아무래도 이들이 도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네. 강을 끼고 살던 사람에게는 더욱더 그렇겠지.”
“으음.”
일리가 있다는 듯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성도 서쪽에 있는 민강(垊江) 유역에 자리를 잡도록 해 볼 생각이네. 아무래도 강 유역에 살던 이들에게는 그게 가장 좋겠지. 감히 장강에 비할 만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청명이 씨익 미소를 짓는다.
이동하는 유민의 수가 적지 않다.
무파는 기본적으로 양민들과 크게 관련이 없다고는 하지만, 사천의 패자로서 지역색이 강한 당가라면 자신들을 절대적으로 지지해 줄 유민들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는 본인들의 세력이 강한 지역에 사람들을 살게 하고, 그곳에서 이득을 취하려 하는 것이 옳다.
당가 역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군악은 당가의 이득보다 이들의 삶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영향력을 조금 잃는 한이 있어도 이들이 살던 곳과 가장 비슷한 곳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이래야 당가지.’
괜히 마음이 기꺼워진 청명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 같네요.”
“그런가? 으음. 아직 잘 모르겠군. 더 좋은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당군악의 미간에 세 줄의 주름이 파였다. 청명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당가의 장로가 그를 견제할 때도 저런 얼굴을 보여 주지 않던 사람인데 말이다.
“장문인께서도 천우맹의 이름으로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하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장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에요.”
“그렇지.”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화산 분들이야?”
“화산파 분들이 오셨어!”
장원 안에서 웬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화산의 제자들을 둘러쌌다.
아직 장원에 머물러 있던 유민들이 그들이 온 것을 발견하고 버선발로 달려 나온 것이다.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이고. 얼굴에 흙먼지 좀 봐.”
달려 나온 이들이 그들의 손을 부여잡고, 아낙들은 소맷자락으로 화산 제자들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이러실 필요는…….”
“저희가 뭘 한 게 있다고요.”
하지만 유민들의 입장은 다른 모양이었다.
발로 걸어 오려 했다면 몇 날 며칠을 걷고도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끼고 오려면 열흘을 넘게 발품을 팔아야 할 거리.
장강의 분위기가 흉흉한 상황에서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준 이들인데 어찌 고맙지 않을까.
그때 누군가가 조걸의 소매를 미약하게 잡아당겼다.
“저기…… 이것 좀…….”
“예?”
돌아본 조걸은 제 눈앞에 내밀어진 걸 보고 눈을 끔벅였다.
“이게……?”
“만두예요. 얼마 안 되지만 요기라도 하시라고…….”
“…….”
조걸은 천에 싸인 만두를 얼결에 받아 들고는 코를 쓱 훔쳤다.
“안 이러셔도 되는데…….”
물론 몸이야 더없이 고단하다.
아무리 무학을 익힌 무인이고, 이제는 그 경지가 웬만한 무인들은 바라지 못한 수준까지 올랐다고 해도, 한계까지 짐과 사람을 실은 수레를 끌고 무한과 구강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다.
그런데 그 피로와 고단함이 이 순간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조걸의 어깨를 윤종이 툭 쳤다.
“혼자 먹으려고?”
“……예. 저 혼자 먹을 거예요. 사형은 안 줄 겁니다.”
평소 같았으면 조걸의 멱살을 잡았을 윤종이지만, 지금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협의는 대가 없이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순간을 겪을 때마다 윤종은 그 말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대가의 의미가 다르다.
따뜻한 환대, 고맙다는 말 몇 마디, 작은 만두 몇 개로도 그들에겐 충분하고도 넘치는 대가가 되지 않는가?
“감사합니다.”
백천이 대표로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따지고 보면 여러분들이 이런 고생을 하는 것도 다 칼 든 이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저희가 모든 것을 보상해 드릴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어찌 화산의 잘못입니까.”
“예! 다른 곳은 몰라도 화산과 당가가 저희를 얼마나 위해 주셨는지는 압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사람인 저희가 그걸 모르면 안 되지요.”
“그럼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치는 이들을 보며 백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슬슬 다시…….”
“다 쉬었으면 출발하시죠, 사숙.”
“……응?”
등을 돌려 보니 그의 사제와 사질들은 벌써 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거, 나이가 드셔서 그런가. 영 빠릿빠릿하지 못하시네.”
“이러는 와중에도 장강 사람들이 애타게 저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여야죠.”
“……이것들이?”
백천이 눈을 부라렸다.
죽겠다고, 이러다 진짜 죽겠다고, 청명이 저 새끼 주둥이에 술병이라도 꽂아서 재우고, 우리도 좀 쉬자고 하소연할 때는 언제고?
“아, 아니 벌써 해가 졌는데 또 가십니까?”
“하하하. 무인에게 밤이 무슨 상관입니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또 가 봐야죠.”
조걸아?
“그래도 좀 쉬셔야 하는데.”
“쉴 만큼 쉬었습니다. 이 정도야 거뜬합니다.”
윤종아?
하나같이 청명을 닮아 가는지 말과 행동이 일치가 안 되고 있었다.
“아, 사숙!”
“알았다! 이것들아.”
백천이 피식 웃고는 수레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청명…….”
청명이를 부르려던 백천이 문득 입을 닫았다.
어느새 사람들의 사이에서 벗어난 청명이 저쪽 끝에서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남쪽. 저 멀리 장강이 있는 곳이다.
“…….”
그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불러 볼까 고민하던 백천은 이내 고개를 내젓고는 청명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 뒤에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음?”
“……그만 출발해야지, 청명아.”
“아, 그래야지.”
청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은 청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데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수레 쪽으로 향하는 청명의 뒷모습을 슬쩍 본 백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잘못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법이지.”
“……응?”
청명이 돌아보았다. 백천은 그를 슬쩍 일별하고 태연하게 앞질러 가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예전 내 잘못에 네가 나서 주었을 때…….”
“…….”
“그러니까…… 예전 내가 대사형으로서 사제와 사질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던 때에, 네가 나서서 모든 걸 바꿔 줬던 그 일 말이다.”
백천은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사실은 정말 고마웠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순간 휙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때는. 딱 그때만. 지금은 아니고.”
“아니, 근데 이 인간이?”
“가자.”
피식 웃은 백천이 수레 앞에 서선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일을 마무리해야지. 뒷일은 그때 생각하면 그만이고.”
“…….”
청명이 그런 백천을 물끄러미 보다 웃었다.
“동룡이 많이 컸네. 나한테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나이는 원래 내가 더 많았다고, 이 새끼야!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뭐래.”
혀를 차 준 청명이 고개를 돌려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금 전에 데려온 일행 중에 애가 있는데 많이 지친 것 같으니까 한번 봐주세요.”
“이미 의술을 익힌 이들이 돌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역시 빈틈이 없으시다니까.”
청명이 씨익 웃고는 수레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자, 그럼 가자!”
“으라차아!”
이번에는 화산의 제자들도 군소리 없이 수레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단번에 가속하여 멀어지는 수레들을 보며 유민들이 목소리 높여 응원했다.
그 소란한 현장 속에서 당군악은 가만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큰일이군.”
자신의 반도 살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이리 든든하게 여기게 될 줄이야. 이러다가는 어른 역할도 하지 못하게 생겼다.
“당가도 질 수 없지.”
그는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짐들을 정리해라! 화산이 다시 오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한다!”
“예, 가주님!”
장원으로 향하는 당군악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