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9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3)
갑판에 서 있던 호가명이 장일소를 정중히 맞이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련주님.”
“흠.”
장일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호가명과는 달리 흑룡왕의 안색은 그리 밝지 못했다.
“장일……. 아니, 련주.”
흑룡왕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도무지 련주가 하는 일이 이해가 가지 않소. 저 남궁을 굳이 닷새씩이나 살려 둘 필요가 있소?”
“…….”
“남궁을 멸하는 걸 저들에게 똑똑히 알릴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겠소. 하지만 굳이 저들에게 시간을 줄 필요는…….”
장일소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필요하니까.”
“…….”
“필요한 일이오, 흑룡왕.”
장일소가 입가를 비틀었다.
“우리가 지금 저 남궁세가를 모조리 쳐 죽인다면, 뒤따라 도착한 다른 정파 놈들에게 소림이 뭐라 지껄여 댈까?”
“……그야.”
흑룡왕이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닫았다.
장일소가 도착하는 바람에 그들이 강으로 뛰어들지 못했다고 소림이 순순하게 고백할까?
‘그럴 리가 없다.’
저곳에 있는 이가 그였다면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달려왔지만, 도착해 보니 이미 남궁은 저 간악한 사파 놈들에게 유명을 달리한 뒤였다고 말하겠지.
지금 이 장강에는 그런 소림을 말을 반박해 줄 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있는 것이라고는 남궁과 사패련, 그리고 소림뿐이다.
혹여 호기심에 장강을 기웃거린 양민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 해도 누가 그들의 말을 믿어 주겠는가? 지금 저곳에 있는 이들은 무림의 북두인 소림인데.
“남궁이야 언제든 처리할 수 있지. 중요한 건 소림이 저곳에 멈춰 남궁이 멸망하는 꼴을 구경만 했단 걸 천하가 알게 하는 것.”
장일소가 차게 웃었다.
“우리의 적은 남궁 따위가 아니라 구파일방이니까.”
“…….”
흑룡왕은 순간 등을 타고 차가운 냉기가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수로채 역시 서두르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남궁세가를 요리했다. 하지만 저 남궁세가를 미끼로 소림에 굴욕을 안기고, 또 이를 이용해 저 정파를 뒤틀어 놓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흑룡왕도 궁금해졌다. 저 소림의 뒤를 이어 도착할 이들을, 과연 소림이 어떤 얼굴로 맞이할지. 아마도 죄악감과 굴욕감이 뒤섞인 얼굴일 테다.
“……하지만 지원이 도착한다는 것은 결국 저들의 전력이 강해짐을 의미할 터. 저들이 정말 남궁을 구하기 위해 강을 도하하려 든다면 어쩔 셈이요?”
“저들이?”
장일소가 코웃음 쳤다.
“그럴 자들이었다면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겠지.”
“…….”
“한번 발을 멈춘 자들은 다시 발을 떼지 못하는 법. 차라리 시간이 급박했다면 등 떠밀리듯 공격을 해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장일소가 고개를 돌려 소림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물었다.
“보이시오?”
“…….”
“저들이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을 것 같소? 남궁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기뻐하는 걸로 보이시오?”
흑룡왕이 눈을 찌푸렸다.
“나라면…….”
장일소의 새빨간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 모습이 흡사 송곳니를 드러낸 짐승을 보는 듯 섬뜩했다.
“차라리 저 남궁이 한 놈도 빠짐없이 죽어 없어져 입을 닫아 주길 원할 것 같은데?”
흑룡왕이 멍한 얼굴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지원을 얻어 남궁을 구한다고 해도 소림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소. 그 공은 뒤이어 도착하는 이들에게 돌아가겠지. 소림이 악을 쓰며 싸워 봐야 얻는 것은 그들에게 지독한 원한을 가지게 된 남궁이 강북으로 돌아오는 결과뿐일 터.”
“…….”
“다시 묻겠는데…….”
흑룡왕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정말 소림이 남궁을 구하고 싶을 것 같소? 정말?”
“…….”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장일소는 나직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 미치겠다는 듯이.
흑룡왕은 오한을 느끼며 입술 안쪽을 씹었다.
‘미친놈.’
이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통제?
이런 자를 통제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를 비롯한 다른 사패련의 부련주들은 지금껏 뭔가를 단단히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이자는 기필코 천하를 제 한 손에 틀어쥐고 제 마음대로 뒤흔들고 말 것이다.
“인간이란…….”
그때, 어느 순간 웃음을 뚝 멈춘 장일소가 심드렁하게 흑룡왕을 보았다. 마치 너도 다를 게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법이지.”
“…….”
“사람의 말이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당히 꾸며 낸 것에 지나지 않소. 본심은 언제나 깊숙한 곳에 숨어 있지. 그리고 재밌는 건…….”
나긋하게 말을 하던 장일소가 소림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의외로 사람들은 자신의 본심을 잘 알지 못한다는 거지.”
“…….”
“궁금하지 않소? 저 법정이 어떻게 나올지. 그리고 그 법정의 명령에 평생 협의를 지키라 배워 온 저 중놈들이 어찌 반응할지.”
장일소가 손끝으로 제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확실한 것은, 한번 제 추악한 본성을 본 이들은 다시는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지. 남궁이니 소림이니, 몇 놈 죽이는 건 중요한 게 아니오. 중요한 건 저들에게 알려 주는 거지. 그들이 그리 대단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
“흐음.”
장일소의 기다란 눈매가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술이 없군.”
그러자 흑룡왕이 빠르게 턱짓했다. 장일소의 기세에 눌려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선실을 향해 달려갔다.
술을 가지러 갔음에도 장일소가 들어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흑룡왕이 물었다.
“이곳에서?”
“좋지 않소?”
장일소는 키득대며 웃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소림을 보며 마시는 술은 꽤 근사할 것 같은데.”
흑룡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 탁자를 가져오겠습니다…….”
술을 가져온 수적이 말까지 더듬으며 희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장일소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우선 술부터.”
“예? 아…… 예!”
수적이 공손히 술병을 내밀었다. 장일소는 술병을 쥔 채 천천히 배의 난간으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좋군.”
시선은 강 건너의 소림에게 향해 있었다. 석상이 되어 버린 듯 그곳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꼴이 제법 볼만했다.
신념이 있는 인간은 불구덩이에도 뛰어든다. 하지만 한번 불구덩이를 앞에 두고 발을 멈춘 인간은 다시는 그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장일소가 원하는 것은 저들의 심장에 깊은 화인을 남기는 것이었다.
‘한 번의 승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마지막에 승리하는 거니까.
그때 그의 곁으로 호가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련주님.”
“응?”
“저들이야 당연히 다시 강에 뛰어들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후에 도착하는 문파들은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봐야 돼지들에 불과하단다. 소림이 나서질 않는데, 단독으로 우리와 싸울 용기가 그들에게 있을까?”
“…….”
“오대세가를 이끌어야 할 남궁은 저 꼴이고, 다른 축인 당가는 이탈했지. 소림은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대안이 되어야 할 무당은 봉문 했다.”
천천히 상황을 읊던 장일소가 입꼬리를 올렸다.
“남은 건 그저 목소리만 높은 머저리들뿐이지.”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그때 말을 마친 줄 알았던 장일소가 다시 입을 뗐다.
“다만…….”
“예?”
호가명이 의아한 얼굴로 보았지만 장일소는 곧장 대답해 주지 않고 묘한 미소를 걸쳤다.
“저쪽에도 있긴 하지.”
“……무엇 말씀이십니까?”
“예상이 안 되는 미친놈이라는 게 말이야.”
“…….”
“하하하핫.”
장일소가 즐겁게 고개를 내젓고는 술을 병째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렇지?’
시선을 저 북쪽으로 고정한 채로.
남궁도위는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모두 들렸다. 모두.
장일소는 그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이 강 전역으로 퍼뜨렸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금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덕분에 이 매화도에 있는 이들도 장일소가 법정과 나눈 대화를 들어야만 했다.
“하하…….”
남궁도위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토록 비정하단 말인가.
그가 꿈꿔 왔던, 협의와 낭만이 가득한 강호 같은 건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은 지독할 정도로 잔인했다.
하지만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 비정함에서 눈을 돌릴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으으…….”
“쿨럭.”
여기저기서 괴로움으로 가득 찬 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의 검수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꿈틀거렸다. 부상을 입고도 정신력으로 버텼던 이들이 맥이 풀린 듯 무너진 것이다.
심지어 이대로 둔다면 오늘을 넘기지 못할 만큼 위중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우린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
협의와 정파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매화도로 진격할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흐르고 있으니 자조 섞인 헛웃음이 나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정말 존재했는가? 그 협의와 정파의 자존심이라는 게 정말 존재했는가?
그렇다면 저 소림은 어째서 저곳에서 발을 멈추고 저 장일소에게 농락만 당하고 있는가?
“하…하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그의 모든 것이…….
턱.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남궁도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
힘없이 돌아보니 남궁황이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심적 타격이 가시지 않은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입매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굳어 있었다.
“일어나라.”
“……아버님.”
“부상자를 수습해라. 이제는 버티는 싸움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
“…….”
“앞으로 닷새 동안…….”
“버티면요?”
“…….”
울컥하여 말허리를 자르며 반문한 남궁도위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 닷새를 버틴 다음에는요? 잘 버텼으니 만족하며 죽으면 되는 겁니까?”
“도위…….”
“가주님께서는 정말로 저들이 우릴 도울 거라 생각하십니까? 정말?”
남궁황이 눈을 감았다.
그의 아들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궁의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남궁황조차 놀랄 만큼.
그러니 배신감도 가장 클 것이다. 이곳의 누구보다.
“저들…….”
꾸욱.
남궁도위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남궁황이 그의 어깨를 다시 한번 강하게 움켜잡았다.
“저들이 돕지 않는다고 해서 죽어 가는 이들을 내버려 둘 셈이냐?”
“…….”
“의미 없는 저항 같은 건 없다. 때로는 무언가를 이루기보단 그저 할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남궁도위가 입술을 깨문다.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려 왔다. 남궁황은 말없이 그런 남궁도위를 기다려 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되었다.”
남궁도위가 무거운 몸을 애써 일으켰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최대한 버텨 보겠습니다. 하지만…….”
“안다.”
곡식 한 톨 남지 않은 이곳에서 부상자들이 버티는 데엔 한계가 있겠지. 그 닷새라는 시간 동안 몇이나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살아 나가기만 하면 된다.”
“…….”
“단 한 사람이라도.”
남궁도위는 남궁황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엔 다시 단단함이 깃들었다.
그는 곧장 몸을 돌려 소리쳤다.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나를 따라라! 부상자를 수습하고, 치료한다!”
“……예!”
활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남궁이 처한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그들을 억지로 북돋우기보단 그저 묵묵히 부상자들을 수습하는 데 전념했다. 아무리 말을 해 봐야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남궁황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남궁도위와 남궁명을 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섬을 둘러싼 배들.
그리고 그 섬 너머에 발을 멈춘 소림.
‘외롭구나.’
천하가 그들을 저버린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