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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48화 (949/1,567)

948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2)

기회라는 말과 장일소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상대의 기회를 빼앗고 농락하며 저 깊은 나락으로 처박는 마귀다.

하지만 누가 ‘기회’라는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눈앞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장일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불어온 바람이 장일소의 정돈된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새하얀 손가락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올렸다.

그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정말…… 감동적이지 않니?”

장일소의 시선이 천천히 뒤쪽으로 돌아갔다. 높이 솟아 있는 흑룡선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지금 그가 말하는 감동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의 시선이 매화도 쪽으로 가 닿는 순간, 소림의 몇몇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여전히 그쪽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시선을 다시 소림에게로 돌린 장일소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목숨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야. 그런데 저자들은 제 목숨을 스스로 내버리겠다고 하네. 협의와 명예를 위해서!”

쿡쿡대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강을 타고 흘렀다.

실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 말을 한 게 장일소이니 저 말은 분명 비웃음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 말투에는 분명 감탄이 어려 있었다. 그러니 듣고 있는 소림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남궁은 증명했단다. 그들이 그렇게 울부짖던 협의가 그저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에 빨려들어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장일소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입 다물라!”

법정은 장일소의 말을 순순히 듣고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커다란 사자후를 터뜨려 장일소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분명 웅혼해야 할 사자후에 다급함이 함께 어려 있었다.

지금 당장 저 장일소의 입을 막지 않으면 큰일이 날 듯이.

“사특한 마귀 같으니! 소림의 제자들은 저자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정심(正心)을 지켜라!”

그 말에 소림의 제자들이 법정을 바라보았다.

정심? 장일소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그가 자신들을 현혹하고 있다는 건가?

“이해를 못 하는구나.”

“이…….”

“말했을 텐데. 그저 너희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라고 말이야.”

장일소가 나지막이 웃자 법정의 곁에 서 있던 법계의 얼굴이 참혹히 일그러졌다. 저 가증스러운 웃음이 삼 년 전 그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불러온 것이다.

“네놈이 대체 우리에게 무슨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냐!”

“법계!”

법정이 다급히 법계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한번 나온 말을 되돌릴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장일소의 붉은 입꼬리가 한껏 벌어졌다.

“너희의 협의를…… 증명할 기회 말이야.”

법정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

노기를 도저히 감출 수 없다는 듯, 목에는 선명한 힘줄이 돋아났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의 모습을 보고 너무도 즐겁다는 듯이 웃어 댔다.

“하하하하핫! 왜 그렇게 화를 내시오, 대사(大師)?”

그리고 양팔을 활짝 펼치며 과장된 몸짓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자! 저기에 있소.”

“…….”

“사마(死魔)를 척결하고!”

그의 옷자락이 춤을 추듯 나부꼈다.

“양민을 구원하고! 그 협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 이들이 바로 저기! 그대들의 눈앞에 있소!”

한바탕 경극을 펼치듯 과장된 어투라 거북했지만, 또 오히려 그렇기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팔이 천천히 내려갈 때 소림승들도 덩달아 숨을 참았다.

장일소는 단번에 끌어 올렸던 분위기를 천천히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눈썹이 슬픈 듯 누그러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제 죽어 가고 있지.”

붉은 입술 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부상이 깊은 이들은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기력을 모두 소진한 채, 악적의 무리에 둘러싸여 하나둘 그 뒤를 따르게 되겠지. 제아무리 대단한 영웅들이라 한들, 곡식 한 톨 없는 섬에 고립된다면 그 결과야 뻔할 테니까.”

법정이 승포 자락을 꽉 움켜쥔다. 내력이 끌어 올려진 바람에 옷자락 끝이 가루로 화해 버렸지만 법정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장일소를 죽일 듯 노려보기에 바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 장일소의 투명한 시선이 소림의 모두를 훑었다.

“이곳에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영웅들이 있군.”

따악!

장일소가 손가락을 튀기는 소리가 분위기를 단번에 환기했다.

“어렵지 않아. 그래, 어렵지 않은 일이지.”

“…….”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해 내는 건 협사(俠士)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렇지?”

소림의 모두가 입술을 꽉 짓씹었다. 장일소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그제야 이해한 것이다.

“물론, 물론! 장애물은 있지. 간악하기 짝이 없는 사파 놈들이 앞을 막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그리 문제 될 건 없지 않나? 저 남궁세가는 목숨으로 제 협의를 증명했는데, 설마 천하의 소림이 그걸 하지 못한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장일…….”

따악.

법정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장일소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튀겼다.

“기회를 주지.”

법정은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저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장 약한 부분이 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만 같다. 가장 약한 곳으로 파고들어 상처를 헤집고 소금을 뿌리며 발로 짓이기는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다섯 번째 날의 해가 떠오를 때, 우리는 다시 저 섬으로 들어간다.”

살짝 달뜬 듯한 목소리가 장일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때는 반드시 모두가 죽을 거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남궁의 이름을 가진 이들은 모조리 말이야.”

법정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 다섯 날이 지나기 전에 너희는 결정해야 해. 저들이 우리 손에 죽어 가는 모습을 이대로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싸워 길을 열고 저들을 구해 낼 것인지를.”

“장일소오오오오!”

법정의 입에서 또 한 번 커다란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건 분명 타당한 분노였다.

지금까지 법정의 행적을 논외로 두고 몇백에 이르는 이들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또 다른 희생자를 개미지옥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법정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내게 하는 말인가, 대사?”

“이 간악한 놈이! 네놈이 아니면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아아, 나는 또…….”

장일소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대사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지.”

법정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렇잖아? 너희는 지켜보고 있었지. 저들이 수로채의 수적들에게 물어뜯기고, 내 발에 짓밟히는 모습을 그 두 눈으로 똑똑히 구경했어.”

장일소의 두 눈이 소림의 모두를 똑똑히 노려보았다.

실로 괴이했다. 장일소는 사파의 악적이고 이곳에 선 이들은 그런 사파에게서 천하를 수호하는 정파의 협사들이다. 하지만 이곳에 선 누구 하나 그 잔혹한 사파의 수괴를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을 돌리게 만든 것은 장일소가 아니다. 바로 그들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양심이었다. 장일소는 바로 그 양심을 건드린 것이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걸 내버려 둘 수가 있지? 응? 다른 곳도 아니고, 중원의 협의를 수호한다는 소림이? 세상에…….”

“이노오오오오오옴!”

법정이 울분을 터뜨렸다. 만약 거리가 가까웠다면 일격에 장일소를 쳐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와 장일소의 사이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지금 법정이 할 수 있는 것은 의미도 없이 노기를 토해 내는 것밖에는 없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핫!”

그 법정의 반응이 너무도 즐겁다는 듯 장일소는 아이처럼 웃었다.

“왜 화를 내지, 대사?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 아닌가? 제아무리 그 가슴에 협심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증명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협사가 될 수 없지 않나.”

그 말이 거꾸로 묻는 것 같다.

그동안 협의를 지킨다고 잘도 지껄여 댔지만, 과연 너희가 정말 그 협의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느냐고. 이미 너희는 한번 그 목숨이 아까워 발을 멈추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눈을 감고 싶다.

귀를 막고 싶다.

소림의 모두는 깨달았다. 그들이 아무리 지금부터 행동을 달리한다 해도 조금 전 절체절명에 빠진 남궁을 지켜보며 발을 멈추고 만 행위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님을.

그들은 이미 한번 그들이 그토록 논하던 협의를 져버렸음을 말이다.

왜 발을 멈추었을까? 법정이 지시했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

사실은 두려웠던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제 목숨을 던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해야 한다고 여겨 왔음에도, 막상 처음으로 그럴 기회를 얻는 순간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죽고 싶지 않다는 욕구였다.

법정은 그저 그들에게 명분을 던져 준 것에 불과했다. 발을 멈추고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릴 명분을.

“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곳곳에서 불호가 새어 나왔다. 그만큼 이들의 내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진실을, 장일소는 굳이 꺼내어 보이고 그들의 살에, 뼈에, 심장에 아예 새겨 넣었다.

“그러니 마음껏 증명해 보렴.”

장일소의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너희가 정말 평소 외쳐 오던 것처럼 협의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이들인지.”

“이익…….”

“아니면 그저 그 협의라는 명분으로 제 이득을 취해 온 위선자에 불과한지.”

장일소는 잠깐 손톱으로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그…… 대단한 목숨으로 말이야.”

“…….”

“이 장일소와 사패련이라면 그에 걸맞은 상대가 될 테니까.”

장일소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잊지 마라. 닷새다. 그 정도면 충분히 고민하고도 남을 시간일 거야. 내 자비에 마음 깊이 감사하도록, 대사! 아하하하핫!”

말을 마친 그는 소림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붉은 장포를 휘날리며 돌아섰다. 한 점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천천히 흑룡선 안으로 잠기는 듯 사라질 때까지, 누구도 그를 잡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에 맞서 자신의 협의를 증명하지 못했다.

그저 이를 악물고, 핏발 가득 선 두 눈으로 애꿎은 강만 노려보았을 뿐이다.

“……아미타불.”

법정의 입에서 허탈한 불호가 새어 나온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흑룡선과, 빽빽하게 들어찬 사패련의 선단.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매화도. 드문드문 보이는 남궁의 검수들까지 두 눈에 담은 법정은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아미타불…….”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했다. 마귀가 귀에 속삭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미 늦었단 걸 알아야 했다.

겁이 나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뒤에 선 제자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두려워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이곳이…….’

법정은 넋이 나가 버린 채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곳이 지옥이로다.’

마귀가 존재하는 곳. 그곳이 곧 지옥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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