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7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1)
흑룡왕이 이를 갈아붙였다. 매화도에서 수적들이 물러나고 있었다.
“저…….”
으득!
입술을 꽉 깨문 그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저 병신 같은 놈들이.’
그는 수적들에게 아무런 지시도 내린 적 없다. 그의 지시는 남궁을 섬멸하라는 것에서 멈춘 상태. 그런데도 저 멍청한 놈들이 호가명의 지시에 따라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물론 호가명은 사패련주인 장일소의 오른팔이다. 지휘 체계로 따진다면 그의 명을 듣는 게 그리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어찌 되었건 수로채 역시 사패련의 일원이니까.
하지만 그가 바로 이곳에 있음에도 확인조차 해 보지 않고 호가명의 명에 따르는 수적들을 보니 속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후.”
흑룡왕은 깊게 심호흡했다.
분노가 치솟지만, 큰소리를 내었다가는 순간적으로나마 수로채의 지휘권을 저들에게 빼앗긴 것을 인정하게 된다. 대신 그는 이를 악물며 흑룡선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배로 향하는 장일소에게 다가갔다.
“장일소!”
그리고 성난 짐승 같은 목소리로 불러 세워 말했다.
“무슨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왜 저들을 이대로 살려 주는 거냐! 이대로 목만 비틀어 버리면 끝인 것을.”
장일소의 발이 멈춰 섰다. 그는 몸도 틀지 않고 고개만 슬쩍 돌려 흑룡왕을 보았다.
“무슨 설명이라도 해 보…….”
그를 채근하던 말은 흐지부지 끊기고 말았다. 흑룡왕은 저도 모르게 입 안 살을 꽉 깨물었다.
장일소의 시선에는, 일말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색무취한 눈빛이 그를 관통하는 순간 흑룡왕은 빙굴에라도 떨어진 듯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으…….”
장일소는 침묵을 지키며 흑룡왕을 말끄러미 보았다. 투명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흑룡왕은 핏발 선 눈으로 애써 맞받았다. 이 자리에서 꼭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기라도 해야겠다는 듯.
하지만 그 대치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은 흑룡왕이 먼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실례했소, 련주……. 내 흥분이 과했소.”
미약하게 굽혀진 고개.
완전한 굴종을 의미하는 몸짓은 아니지만, 상대에 대한 존중은 충분히 담겨 있다 볼 수 있었다.
“흐음.”
장일소는 살짝 못마땅한 듯 그런 그를 일별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왕께서 왜 그리 화를 내셨는지 압니다. 제가 마음대로 수로채를 물려서 화가 나신 것이겠지요.”
“아, 아니 꼭 그런 건…….”
“하지만 그리 화를 내실 일은 아닙니다.”
장일소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을 죽여 없애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흑룡왕은 순간 두 귀를 의심했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저들은 남궁세가다. 오대세가의 수장이자 수백 년을 이어 온 강호의 명문. 저들을 몰살하는 것만으로도 사패련과 수로채는 만세에 자랑할 업적을 남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니?
“그래 봐야 송사리.”
장일소가
“송사리를 낚았으면, 그 송사리를 미끼로 가물치 정도는 잡아야지요. 그깟 송사리 한 마리 낚아 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가물치라 하셨소?”
“꽤 큼직한 대어(大魚)죠.”
장일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수로채의 상징과도 같은 흑룡선에 멈췄다. 입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자세한 설명은 배에 올라 마저 해 드리지요.”
흑룡왕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하지만 장일소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돌아본 순간, 흑룡왕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가명아, 가자꾸나.”
“예!”
장일소와 호가명은 느긋하게 흑룡선으로 향했다. 그런 둘의 뒤를 흑룡왕이 말없이 뒤따랐다.
“…….”
그는 조용히 입술을 짓깨물며 앞서가는 장일소의 등을 노려보았다.
흑룡선은 흑룡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 누구도 흑룡왕의 허락 없이는 이 배에 오를 수 없다. 장일소가 그 사실을 모를 리는 없을 터, 하지만 지금 장일소는 흑룡선에 오르겠다고 흑룡왕에게 통보했다.
그렇다. 양해도 부탁도 아닌 통보였다.
흑룡왕과 장일소의 위치를 이렇게 극명하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장일소…….’
흑룡왕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젠 막을 수가 없다. 막으려 했다면 처음 대치한 그 순간 주도권을 놓쳐서는 안 됐다. 그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 순간부터 흑룡왕은 그를 통제할 자격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삼 년 전.
그들이 사패련을 처음 결성할 때만 해도 장일소는 이런 이가 아니었다. 신주오패가 장일소를 련주로 옹립했던 이유는 그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뿌리를 내려 버린 의문이 자꾸 머리를 들었다.
정말 통제가 가능한가? 저 뱀을?
붉은 장포를 펄럭이며 승선하는 장일소를 바라보며, 그의 등엔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매화도를 주시하던 법정의 얼굴이 멍해졌다.
매화도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수적들이 하나둘 물러나더니 승선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무어라 중얼거리던 법정은 입을 닫았다.
‘이게 대체 어찌 돌아가는 일인가?’ 하고 말하려 했으나, 차마 내뱉질 못했다. 그 말이 뒤를 지키고 있는 이들의 귀에 얼마나 멍청하게 들릴지를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노파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 한들, 누구도 어리석다 손가락질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천하의 누가 온다고 해도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물러나는 것 같습니다.”
법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법정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법계 역시 혼란 속에서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중얼대는 것에 불과했다.
“남궁이…… 벌써 당한 것입니까?”
“……그럴 리가.”
아무리 포위를 당했다고 한들, 남궁세가는 남궁세가다.
특히나 저곳에는 제왕검 남궁황이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장일소나 흑룡왕이 천하를 뒤덮는 무위를 지니고 있다 한들, 저 제왕검을 이토록 소란 없이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체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왜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가?
그리고 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는데, 남궁을 궁지에 몰아넣은 수적들이 그냥 발을 빼 버린단 말인가?
저들이 자비를 알아서 궁지에 몰린 적을 놓아주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런 이들이라면 애초에 사파라 불리지도 않았을 터.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정이 빠르게 불호를 외어 대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저 장일소가 이곳에 등장한 순간부터 머릿속이 뒤죽박죽 제멋대로 엉키는 느낌이었다.
“방장, 혹시…….”
법정이 고개를 돌려 법계를 바라본다.
“남궁이…… 저들과…….”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순간 법정의 입에서 노기 어린 고함이 터져 나왔다.
법계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법정이 모를 리 없다. 혹시 남궁이 저들과 손을 잡은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결코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일을 함부로 논하지 말거라! 저들에 대한 모독이 될 뿐이다!”
“죄송합니다, 방장. 하지만 상황이…….”
화를 내기는 했지만, 그 말을 꺼낸 법계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이미 법정도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정은 입술을 짓씹었다. 마침 붉은 장포를 입은 이가 흑룡선에 오르는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것도 없다.
장일소.
저 악귀 같은 자가 무언가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법정조차 도대체 저자의 속내를 짚어 낼 수가 없었다.
으드득.
법정이 이를 갈며 장일소를 노려보던 그때였다.
“우, 움직입니다.”
“…….”
섬에 접안해 있던 배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모래톱에 걸친 배를 뒤쪽으로 밀어 낸 수적들까지도 마저 배 위로 올랐다.
“저, 정말 저렇게 떠난다고?”
“……대체 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등 뒤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엄격하기로는 천하에서 첫손에 꼽히는 소림이 방장을 바로 앞에 두고도 제각각 말을 늘어놓을 만큼 깊은 혼란에 휩싸인 것이다.
“정말 섬에서 물러나는데?”
“……이게 무슨…….”
그들의 눈에는 보였다.
수적들이 모두 물러난 섬, 그 중앙에 드문드문 서 있는 남궁의 생존자들이.
법계가 창백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바, 방장. 이건 저들이 뭔가 거래를 했다고밖에는…….”
“닥치라고 하지 않느냐!”
법정의 눈에서 가공할 노기가 쏟아지니 법계는 다시 급히 입을 다물었다. 법정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딴 뻔한 수작일 리 없다.’
남궁이 저들과 거래하고 살아 돌아온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고작 그런 것으로 남궁을 의심하고 배척할 법정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못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군자는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적의 가랑이 사이를 기는 것을 마다치 않고, 쓸개를 핥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법.
법정이 그런 뻔한 수작에 말려들 이유는 없었다.
‘그런 게 아니다. 뭔가 다른 것이다. 하지만 대체…… 대체 이 상황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단 말이냐?’
하지만 곧 법정은 깨닫게 되었다.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배가…….”
“바, 방장. 배가 섬을 다시 포위합니다.”
소림승들이 당혹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나 다를까, 섬을 빠져나온 배들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고 매화도를 다시 천천히 둘러싸기 시작했다.
“포위?”
굳이 다시?
그럴 거면 차라리 저들을 모두 죽이…….
“어…….”
그 순간 법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억!”
순간적으로 혼이 입으로 몽땅 빠져나오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생 법정을 곁에서 모셨던 법계조차도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격한 신음이었다.
그의 입이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벌어지고,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어, 어찌……!”
섬을 두텁게 둘러싸고 포진한 그 배들의 뱃머리가 명백히 섬 바깥쪽, 그러니까 강북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어, 어찌 사람이 이럴 수가 있는가? 어찌 인간이 인두겁을 쓰고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어찌! 대체 어찌!”
법정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 방장!”
상황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법계는 크게 당황했다. 맹세코 법정이 이렇게 악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봐서였다.
“패군! 패군 이 지옥에 떨어질 간악한 작자!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어떻게 사람이!”
“바, 방장! 진정하십시오!”
바로 그때였다.
보기만 해도 위압적인 그 검고 거대한 흑룡선이,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이윽고 소림의 승려들과 매화도 사이의 강 위에 도달한 배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누구 하나 숨을 내쉬지 못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흑룡선의 날카로운 선수 위로 붉디붉은 장포 차림의 사내가 느긋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저 패군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 하나, 손짓 하나, 강바람을 맞아 펄럭이는 장포자락 하나까지 모두!
“흐음.”
장일소의 두 눈이 정확하게 소림에게로 향했다.
“저런, 왜 이리 화가 나 있니?”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너희에게…….”
그가 아주 잠깐 말을 멈춘 동안의 정적이 모두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이윽고 마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회를 주려 온 거란다.”
피처럼 붉은 입술이 흡사 현월(弦月)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