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6화. 진짜 절망이 뭔지 알려 줘야지. (5)
법정은 한껏 당혹한 얼굴로 매화도를 바라보았다.
장일소가 이끌고 온 만인방의 선단이 그들과 섬 사이를 가로막아 시야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 배들 사이로 정경을 보며 상황을 살피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 격렬한 상황에 장일소가 매화도에 도착했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이야 삼척동자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매화도에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다. 그 흔한 비명 하나, 병장기 맞부딪히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다.
지나칠 정도의 고요가 외려 가슴을 섬뜩하게 베는 것만 같았다. 법정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고요의 근원이 무엇인지.
패군 장일소.
그가 지금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제는 하늘마저 위협하는 거대한 뱀이 저 섬을 감싸 조이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대체 뭘?’
이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시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장일소가 이곳에 도착하고 그가……. 아니, 소림이 발을 세운 그 순간부터 결론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아미타불.”
입술 새로 불호가 흘러나왔다.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저 섬에서 흘러나오는 장일소의 진득한 악의뿐이었다.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제발…….’
저 장일소가 노리는 것이 무엇이든, 말려들면 그 끝은 자명하다. 법정은 제발 남궁황이 올바른 대처를 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법정은 알지 못했다.
그가 정말 촉각을 곤두세웠어야 하는 것은 남궁세가 쪽의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매화도를 감싼 뱀의 독니가 정말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남궁황을 돌아본 장일소의 입가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남궁황은 마치 혼이 빠져나가 버린 사람 같았다. 패도의 화신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남은 것은 그저 세 치 혀에 농락당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 패배자의 모습뿐이다.
“흐으음.”
장일소는 비음 섞인 소리를 내며 혀로 붉은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졌다라…….”
“…….”
“아니지, 남궁황.”
남궁황이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버티고 있는질 말해 주는 듯했다.
“살려 달라고 해야지. 응?”
“…….”
“비굴하고 비참하게. 그래, 그렇게 말해야 한단다.”
그건 적에게 건네는 말투가 아니다. 마치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를 가볍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어쩌면 남궁황에게는 이 상황보다 그 말투가 몇 배는 더 굴욕적일지도 모른다.
“오해하는 모양이구나. 이건 너와 나의 승부가 아니다. 남궁세가와 만인방의 승부는 더더욱 아니지. 알겠니?”
장일소가 크게 걸린 미소는 더없이 환해서 더욱 잔인하게만 보였다.
“너는 내게 패배를 논할 자격조차 없단다.”
남궁황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남궁의 이름을 이끌어가던 거인이 지금 무너지고 있었다. 한없이 처참하고 잔혹하게.
“그러니 다시 제대로 말해 보렴.”
장일소의 속삭임이, 모두가 숨죽인 섬에 선명히 퍼졌다.
“살려 달라고.”
“…….”
“자, 빌어 보려무나, 남궁황. 그래야 착한 아이지.”
장일소의 얼굴에 잔혹한 승리감이 어렸다. 그 어떤 말보다 그 표정 하나가 이 상황을 더 확연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장일소는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궁황과 남궁세가를 지독한 패배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설사 모두가 싸우다 죽었다고 해도 느끼지 않았을 끔찍한 패배감 속으로.
남궁황은 장일소에게서 시선을 떼고 가솔들을 바라보았다.
오직 그를 믿고 이곳으로 온 이들. 상황이 여기까지 왔음에도 그를 원망하는 말 한마디 보태지 않았던 이들. 그런 이들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도할 자신이 있는가?
남궁황의 입이 비틀리며 열렸다. 피 끓는 고함보다 더욱 처절한 뇌까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살…….”
장일소가 미소 지은 채 그 모습을 응시했다.
“살……려…….”
엉망이 된 꼴로 경련하는 턱, 핏발이 선 눈, 그리고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는 손까지.
시대의 거인이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앗!
순간적으로 날아든 검이 거리를 격해 단숨에 장일소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음?”
카캉!
장일소가 태연하게 손을 들어 손에 낀 반지로 검을 막아 냈다.
일순 쥐 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장 경악한 것은 남궁세가의 가솔들이었다. 하나같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상황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겨우 잡은 생명줄이 지금 저 한 번의 공격에 끊겨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신음하며.
까가각.
장일소의 반지가 검날을 뒤트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뭐 하는 짓이지, 도련님?”
남궁도위.
이를 악물고 장일소에게 검을 찔러 낸 그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으르렁댔다.
“웃기지 마라, 장일소.”
“…….”
“나는 여기서 죽는다.”
장일소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 도위!”
남궁명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 하는 짓이냐! 물러서라!”
“물러서면요?”
“뭐, 뭣?”
남궁도위가 이를 갈며 뒤를 흘끗 보았다. 핏발이 선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남궁명을 꿰뚫을 듯했다.
“물러서면, 이 작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안휘로 돌아갈 셈입니까?”
“…….”
“그리고 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사파의 악적들과 최선을 다해 싸우고 돌아왔다고 말이라도 할 셈입니까?!”
그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과 같았다.
“아버지!”
남궁도위가 남궁황을 향해 소리쳤다.
“협의를 잃은 검수는 검수가 아니다.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은 목숨이 아니라 무인의 혼이다!”
남궁황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께서 내게 가르친 말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께서! 그런데 지금 내게 사파에게 목숨을 구걸하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처절한 외침에 남궁황은 입술을 꽉 깨물다 말했다.
“……물러나라, 도위.”
“아니요! 저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도위!”
남궁도위가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선택하는 거라고 했나, 장일소?”
“그랬지.”
“그럼 나는…….”
남궁도위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굳건한 의지로 확신을 가진 채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말을 뱉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마음이 흔들린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 말에 힘이 실린다.
“나는 여기서 죽는다.”
“…….”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남궁의 검수들이 몸을 떨었다.
젊은 객기? 아무것도 모르는 이의 순진한 선택?
그럴 리가 없다.
저 떨리는 손이 말해 주고 있으니까. 지금 남궁도위는 죽음의 공포와 정면으로 싸우고 있다. 이를 악물고 저 장일소라는 거대한 악에 대항하고 있다.
“남궁도위! 무슨…….”
남궁명이 다급하게 제지하려 했지만, 남궁도위는 그의 말을 잘라 버리듯 말했다.
“살아가십시오.”
“…….”
“살아서 돌아가십시오. 그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옳은 선택입니다.”
남궁명이 입을 닫았다.
“하지만 한 사람쯤은…… 적어도 한 사람쯤은 남궁의 의기를 지켜야 합니다. 돌아가서 마주할 남궁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궁도위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게 남궁의 피를 짊어진 이의 역할입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은 목숨이 아니라 무인의 혼이다. 남궁도위뿐 아니라 그들도 수없이 들어온 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몰린 그들은 결국 의기를 택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어리다 할 수 있는 남궁도위만이 스스로 배운 것을 지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숙연함과 수치스러움이 동시에 휘몰아쳐 그들을 옥죄었다.
누군가는 핏발이 선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는 되레 고개를 숙여 버렸고, 또 누군가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응은 달랐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확연했다. 불이 꺼져 매캐한 연기만 흘러나오던 초에 다시금 미약한 불씨가 피어났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의기니, 협의니, 전부 장일소의 말대로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그 허상에 목숨을 걸겠다는 이가 있다.
으드득.
누군가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격해진 감정이 발끝부터 들불처럼 번져 오고, 충혈된 두 눈이 남궁도위의 등을 쫓았다.
그들이 보호해 오던 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남궁의 미래.
그 미래가 지금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내던졌다. 무인이라 자처하는 이라면, 검을 들고 싸울 줄 아는 이라면 이 광경을 감흥 없이 바라볼 수 있을 리 없다.
죽어 있던 그들의 눈에 다시 독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포문만 열어 주면 다시 폭발할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이 들은 것은 나른한 비음이 섞인 장일소의 목소리였다.
“흐으으음.”
그리고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남궁의 모두는 지금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래야지.”
그 남궁도위마저 크게 당황하여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패군은 온화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야 남궁세가지. 나는 걱정했단다. 혹여 너희가 이대로 비굴하게 빌고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기라도 할까 봐.”
남궁도위는 생각했다.
이자는 인간을 현혹하기 위해 온 마귀라고.
부드럽고 따뜻하여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 목소리가 바로 마귀의 것이라고. 저 목소리 뒤에는 인간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짙고 무거운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
“기특한 도련님이네.”
장일소가 화사하게 웃었다.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 칭찬을 해 주는 듯.
까각.
장일소가 손에 든 검을 밀어 내고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러더니 양팔을 살짝 벌리며 천천히 어깨를 으쓱했다.
“자비를 베풀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
“가명아.”
“예, 련주님.”
“모두 철수시켜라.”
호가명이 순간 커다래진 눈으로 련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 어린 당혹과 경악은 남궁세가의 검수들마저도 확연하게 알아볼 정도였다.
“……만인방 말씀이십니까?”
평소라면 장일소에게 절대 되묻는 일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나, 그만큼 호가명은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장일소는 살짝 언짢은 기색으로 혀를 찼다.
“가명아,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나는 분명 모두라고 했다. 사패련 전체가 이 섬에서 철수한다.”
“려, 련주님. 그건…….”
그러자 장일소의 시선이 흘끗 호가명에게로 꽂혔다. 그 차디찬 시선에 호가명이 흠칫하여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언제 그랬냐는 듯 장일소는 다시 빙긋 웃으며 남궁황, 남궁세가, 남궁도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감동적인 의기야.”
그리고 잘 짜인 경극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하게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순간 남궁도위의 가슴에 지금까지보다 더한 불안이 파고들었다.
“그럼…… 그 의기에 걸맞은 최후를 주는 게 예의겠지.”
장일소가 몸을 돌렸다. 그의 붉은 장포가 흡사 날개처럼 강바람을 맞아 펄럭였다.
몸을 돌린 그에게서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서 죽어 가렴.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고뇌하고 또 고뇌하면서 말이야.”
결정을 내린 이상 한순간의 미련도 없었다.
장일소는 그대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러자 호가명이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도저히 돌아가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던 수적들은 그 지시를 받고는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듯했지만, 이내 도무지 모르겠단 얼굴로 매화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적들이 칼을 내리고는 왔던 길을 돌아가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남궁세가는 어떠한 반응조차 섣불리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게…….”
남궁명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궁세가의 검수들의 두 눈에는 의혹을 넘어 의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장일소의 제안은 정말 자비가 아니었을까?
어떤 의도를 숨기고 그들을 몰아간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을 살려 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저자는 왜 조금의 미련도 없이 저렇게 몸을 돌리는가? 왜 강요하지 않는가? 아니, 왜 하다못해 그들의 목숨을 손수 취하지 않는가?
대체, 지금 그들은 무슨 짓을 해 버린 건가?
모두가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감도 잡지 못한 상황 속에서 남궁도위만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섬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장일소의 계획이었을지 모른다고.
장일소가 처음 이곳에 도달한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어쩌면 그들은 장일소의 손바닥 위에서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을.
“련주님. 저들은…….”
“배로 섬을 포위해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무나.”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호가명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다 결국 조심스레 묻고 말았다.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어찌하긴. 진짜 절망이 뭔지 알려 줘야지.”
“……아.”
호가명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들에게 편한 죽음은 사치입니다.”
“쯧쯧쯧. 가명아. 너답지 않게 오늘 왜 이렇게 맥을 못 짚느냐? 그게 아니란다.”
“……예?”
호가명이 의아한 듯 물으니 장일소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남궁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내 목표는…….”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저 중놈들이지.”
강 너머 소림을 보는 장일소의 눈빛에 귀기가 서렸다.
“겨우 판이 깔렸구나. 이제 시작이지. 자, 저놈들에게 알려 주자꾸나. 제 안에 얼마나 추악한 것들이 숨겨져 있는지 말이야!”
정말로 신이 난 듯 웃는 그를 보며 호가명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내달리는 걸 느꼈다.
장일소가 천하를 향해 독니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