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5화. 진짜 절망이 뭔지 알려 줘야지. (4)
누가 모르겠는가.
이게 농락에 불과하단 걸. 저 마귀에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저 그들을 바닥까지 끌어내려서 짓밟고, 조롱하고, 비웃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하지만…… 흔들리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저 장일소의 입에서 삶이라는 말이 흘러나온 순간, 그 가슴에 기대와 간절함을 조금도 품지 않은 이가 이곳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남궁도위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난…….’
장일소의 말을 듣는 순간,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남궁도위마저도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살고 싶다는 충동. 죽고 싶지 않다는 공포.
주변에 지켜보는 이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저 장일소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을지도 모른다.
살려 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아직은……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누가 다르겠는가?
제아무리 올곧게 서려 한들, 살고 싶은 욕구가 다를 리 있겠는가? 가장 깊은 곳에 감추고 감추어 둔 그 욕구를 장일소의 한마디가 너무도 쉽게 파내고 만 것이다.
“이…….”
남궁황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그도 지금 남궁도위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저 손의 떨림은 장일소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 순간 의연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일 터.
결국 남궁황이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간악한 놈이!”
장일소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이번엔 간악이네.”
“…….”
“흐음. 뭐…… 그건 내가 좋아하는 말이긴 해. 간악, 비열, 비겁……. 뭐, 뭐든 좋아. 좋지. 하지만…….”
장일소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 상황에서는 아니지. 남궁황. 지금은 내게 욕을 할 때가 아니란다.”
남궁황이 입을 다물었다. 저 장일소의 속내를 잠시 파악해 보려는 심산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저 괴물의 속내를 도저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나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야.”
장일소가 나긋이 몸을 돌려 천천히 남궁황에게로 다가갔다. 남궁황의 검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장일소는 이번에도 태평하고 느긋했다.
남궁황의 곁으로 다가선 장일소가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자…… 남궁황. 생각해 봐. 응? 필사적으로 생각해야지. 버림받는다는 게 꼭 나쁜 건 아니거든? 자유로워지잖아. 그렇지 않나?”
“…….”
남궁황이 입술을 깨물고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피로 얼룩진 얼굴에 산발이 된 머리, 핏발 선 눈까지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남궁황은 알고 있었을까?
거리 유지가 필수인 검수가 권사를 상대로 이 거리를 내어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행동만으로도 그가 흔들리고 있단 사실이 여지없이 증명된다는 것을.
“네놈들의…….”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네놈들의 수하라도 되라는 소리냐? 우리 창천남궁세가가 사파의 개가 될 것 같으냐?”
이 마귀의 목소리에 흔들리고 있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죽으면 죽었지, 우리는 너희의 개가 되지는 않는다! 웃기지 마라, 장일소!”
그 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살아남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생존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역시 분명 존재한다.
창천남궁세가.
죽음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장일소의 주구가 될 수는 없는 이들이었다. 그럴 수 있는 이들이었다면 굳이 평화를 내던지고 이 매화도로 쳐들어오지도 않았을 터.
장일소에 대한 강한 반발심이 모두를 뒤덮으려던 그때.
“……개?”
평온하게, 하지만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장일소의 몸짓에 또다시 모두의 시선이 강제로 잡아끌렸다.
“또…… 이상한 말을 하네. 이해가 안 돼서 말이야.”
장일소는 눈썹을 휘며 과장되게 남궁황을 비웃었다.
“가명아.”
“예, 련주님.”
“내가 저들에게 그런 말을 했더냐?”
“일절 하지 않으셨습니다.”
호가명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장일소와 대비되는 그의 얼굴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럼 저자들이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의 한계 안에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련주님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저들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흐음. 그래. 일리가 있구나.”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인 장일소가 활짝 웃으며 남궁황을 바라보았다.
마치 한 편의 경극 같은 대화를, 남궁황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장일소가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모든 이들은 그저 장일소가 짜 놓은 배역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도, 화를 내고 울분을 터트리는 것마저도.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남궁황. 그리고…….”
장일소의 시선이 남궁황에게서 남궁세가의 검수들에게로 옮겨 갔다.
“남궁세가.”
이 일을 결정할 권한은 남궁황뿐만 아니라 남궁세가의 검수들에게도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왜 내가 너희를 속인다고 생각하지?”
“…….”
“사파니까?”
“…….”
“나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란다.”
빨려들어 간다.
저 목소리에. 저 말투에. 저 손짓 하나에.
“다시 한번 말하지.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개가 될 필요도 없고, 사패련에 들어올 필요도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뿐이야.”
가는 입매가 비틀렸다.
“그저 너희의 입에서 살려 달라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돼. 그래. 고작 그것뿐이지.”
모두가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남궁세가뿐만 아니라 수로채 수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바라보는 두 눈엔 모두 황망함이 들어차 있었다.
이 섬을 채우고 있는 그 많은 이들의 얼굴이 동색으로 물들고 있으니 실로 기적이라 할 만했다.
제정신인가? 지금 저자는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고 있는가? 어째서? 대체 왜? 왜?
장일소는 불신과 경악이 듬뿍 담긴 그 수많은 눈빛 가운데 선 채 키득키득 웃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그렇지?”
“…….”
“그거면 돼. 그거면 살려 주지.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너희를 그냥 보내 줄 거야. 바로 저곳. 너희가 그토록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 했던 저 강북으로 말이야. 안락하고 편안한, 너희의 집이 있는 곳으로.”
마귀의 속삭임엔 반드시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치명적인 독이 묻어 있으리라.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이토록 달콤한 말을 어떻게 무시해 버릴 수가 있는가?
“시신도 수습해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지. 비록 이곳에서 죽었지만, 저들은 제 고향에 묻힐 자격이 있잖아? 그렇지?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으니까.”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눈도 감지 못하고 절명해 있는 가솔과 동료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화인처럼 박혔다.
“어렵지 않아.”
장일소가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그저 한마디면 돼. 그저 한마디면,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거야. 나 패군 장일소의 이름으로…….”
그러다 살짝 뜸을 들였다.
모두가 그의 말을 목마른 심정으로 기다리도록.
“……약속하지.”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말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흡사 홀린 듯이.
“살려…….”
“안 돼!”
그때 곁에 있던 남궁도위가 급히 손을 뻗어 그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노기 서린 얼굴로 외쳤다.
“장일소!”
장일소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이런. 대단하신 윗대가리가 살고자 하는 이의 입을 틀어막고 죽음으로 내모는 꼴이라니. 추하구나. 사파도 이런 짓은 안 하겠어.”
“닥쳐라, 이 개 같은 놈! 대체 무슨 수작질이냐!”
“흐음?”
“남궁을 우습게 보지 마라! 우린 네 수작에 넘어가지 않…….”
그 순간 시종 부드럽던 장일소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기세가 놀랍도록 험악해, 남궁도위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한 발짝 뒤로 주춤 물러났다.
색이 옅은 눈에선 흡사 새파란 불꽃이 이글대는 것처럼 험한 기세가 넘실거렸다.
“우습게 본다고?”
장일소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알려 주지, 도련님. 너흴 우습게 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야.”
“…….”
“소림은 너희를 버렸다. 아니, 정파가 너희를 버렸지. 내 묻겠다. 저 소림의 뒤를 따라 저 강 너머에 도착하는 문파 중 어느 하나 너희를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려 줄 이들이 있을 것 같으냐?”
그 말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외치고 싶다. 정파의 협심을 얕보지 말라고 고함치고 악을 쓰고 싶다.
하지만 이미 보지 않았던가? 중원의 협의를 수호하는 문파, 소림이 그들을 어떻게 버렸는지.
“저들에게 너희의 목숨은 그토록 하찮은 것이지. 하지만…… 아니야. 저들도 아니야. 너희의 목숨을 더 하찮게 여기는 건 바로 너희다.”
“…….”
“목숨은 그런 게 아니야.”
끼이이익.
장일소의 반지가 서로 마찰하며 섬뜩한 소리를 자아냈다.
“원래 목숨의 가치는 자신이 정하는 거야. 적어도 나는 그랬다. 동료라 불리는 놈의 배에 칼을 쑤셔 박고, 친구라 지껄여 대는 놈의 목줄을 물어뜯고, 더러운 오물 위를 구르고, 팔이 부러지면 이로 절벽을 물어 가며!”
“…….”
“살아남는다는 건 그런 거란다.”
이 말은 협박도 설득도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이건 장일소의 본심 그 자체다.
“그런데…… 나더러 우습게 보지 말라고?”
장일소가 이를 드러냈다.
“살려 달라는 그깟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놈들을 우습게 보지 않으면 세상 누굴 우습게 볼 수 있단 말이지? 스스로의 가치를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놈들을 왜 내가 대접해 주어야 하나? 대답해 봐라, 애송아! 네가 입을 틀어막은 이의 죽음을 네가 무슨 자격으로 결정하겠다는 거냐!”
남궁도위의 손이 떨렸다.
장일소가 만일 한마디만 더 했다면, 남궁도위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 순간 기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나른하다는 듯 어깨를 툭 늘어뜨리며.
“어렵지 않아.”
“…….”
“너희의 죽음 같은 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죽음으로 얻는 영광이라는 건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에게 던져 주는 부스러기일 뿐이지. 막대한 전리품에서 떼어 낸, 쓸모없는 부스러기.”
누군가는 마른침을 삼켰고, 또 누군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부스러기를 부여잡고 죽는 건…… 너무 슬프잖아. 안 그래?”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저 속삭이듯 하는 말에.
“그러니…… 말해 봐.”
험한 기세가 사라진 장일소의 얼굴엔 다시 화사하고 요사한 미소가 어렸다.
“제발 살려 달라고 빌어 봐. 그거면 돼. 그거면 너희는 살아 나갈 수 있어.”
저벅. 저벅. 저벅.
장일소가 창궁검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이젠 검을 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창궁대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작게, 하지만 모두에게 들리도록 또렷하고 느리게.
“살고 싶지?”
그 목소리를 들은 이는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살고 싶을 거야. 누구나 살고 싶지. 하지만 너희의 목숨을 알뜰하게 써먹으려 하는 이들은 쉽게도 말한단다. 무사는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협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야 한다.”
두 눈이 떨린다. 마음이 뒤흔들리는 검수의 마음에 떠오른 질문을, 장일소가 대신 읊었다.
“뭘 위해서?”
“…….”
“아니야, 아니야. 살아 보면 알잖아. 자존심이라는 건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다. 잠시 눈을 감으면 지나가는 밤 같은 거야. 그러니까…… 말해 보렴. 살고 싶다고. 나는 살고 싶다고 말이야.”
“나, 나는…….”
결국 창궁대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많은 세월 혹독한 고련으로 단련된 검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목숨으로 창천의 이름을 지킬 각오가 되어 있는 남궁의 검이…… 지금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다.
버틸 수 없는 압박.
실낱처럼 주어지던 희망과 뒤이어 밀려온 거대한 절망.
그 파랑의 끝에서 심혼을 잡아 비틀어 대는 자 앞에서 의지나 협의는 무력하기만 했다.
“쉬이. 자, 착하지?”
붉은 입술 새로 쏟아지는 말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이제 말해, 그 입으로.”
창궁대원의 두 눈은 갈 곳을 몰랐다. 형편없이 쉰 목소리로 끅끅대며 울음을 토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리던 손이…… 마침내 장일소의 소맷자락을 움켜잡았다.
“살려…….”
“그만두시오, 패군.”
그때, 남궁황이 끼어들었다.
도무지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만큼 즐겼으면 됐잖소.”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것 같기도 했고, 몇 년을 한꺼번에 늙어 버린 듯도 했다.
남궁황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우리가…….”
그는 그 어떤 기력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졌소.”
남궁황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