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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44화 (945/1,567)

944화. 진짜 절망이 뭔지 알려 줘야지. (3)

가장 강한 자는 아닐지도 모른다.

사파제일인이라 불리는 장일소지만, 그의 무력이 정말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니, 알려 하지 않았다.

이유? 그야 너무도 간단하다.

그딴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강호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위치는 그 무력으로 좌우된다. 이 도산검림에서 위명을 쌓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몇 번이고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이자는……. 이자만은 아니다.

패군 장일소.

그 이름은 이 강호에서 홀로 오롯이 이질적이다.

설사 장일소의 무력이 길거리의 삼류 무뢰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천하의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바로 이자가…… 현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자라고.

그 치명적인 독을 품은 독사가 천천히 모래사장을 걸어왔다. 그의 걸음은 위협적이기보다는 가벼웠고, 진중하기보다는 우아했다. 마치 근처에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이 매화도의 누구 하나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누구도 이들에게 전투를 멈추라고 명한 적 없다. 하지만 전쟁은 자연스레 멈춰 있었다.

적어도 남궁명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떤 토끼도 늑대를 앞에 두고 저들끼리 영역 싸움을 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저 장일소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곳의 모든 이들이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걸 직감해 버린 것이다.

“흐으음.”

비음 섞인 낮은 목소리가 매화도에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흘렀다.

“이거…….”

장일소의 시선이 남궁황에게로 향했다.

“꼴이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남궁황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서늘한 비늘 돋은 뱀이 그의 목을 조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이건 비단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남궁황의 두 눈에, 장일소를 따라온 배들이 섬에 접안하지 않고 느긋하게 방향을 틀어 매화도와 소림 사이의 강을 가로막는 광경이 보였으니까.

이제는 소림이 이곳으로 도우러 올 마음이 뒤늦게 든다 해도 돌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태평한 걸음과는 다르게 장일소는 확실하게 그들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이를 확인이라도 시켜 주는 듯, 하선한 만인방의 무사들이 달려와 장일소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달려 나온 호가명이 호위하는 모양으로 그 옆에 섰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남궁황은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장일소와 호위라니.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그때, 장일소의 입꼬리가 요사스럽게 슬며시 올라갔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을까? 응?”

뱀 같은 시선이 지쳐 허덕대는 남궁세가의 검수들의 숨통을 조였다. 장일소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웃었다.

즐겁다.

그는 이런 광경이 소름 끼치도록 좋았다.

창천남궁세가.

그 찬란한 위명에 빛나는 이들의 눈이 지금 허무와 절망으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만큼 원통해하고, 누군가는 다 끝나 버렸다는 사실에 허탈해한다. 누군가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또 누군가는 혹시 있을지 모를 자비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서로 다른 눈빛들이 모두 장일소 한 명에게 쏠려 있다.

하지만 그 눈빛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더 이상 희망의 빛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저벅. 저벅.

장일소가 앞으로 나섰다.

남궁세가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적들이 명백히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분분히 좌우로 물러난다. 수적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발 디딜 곳 하나 없던 곳에 신기할 정도로 넓은 길이 열렸다.

장일소는 당연하다는 듯 그 길을 느긋이 걸었다.

마침내 그 발걸음이 멎은 건, 남궁세가의 창궁검대 앞이었다. 전열의 가장 앞을 지키던 이들. 남궁이 천하에 자랑하는 절정의 검수들이었다.

짧지만 지독한 격전을 치렀다. 덕분에 아직 버티고 서 있는 창궁대원들은 곳곳이 베이고 찔려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장일소가 다가오니 그들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겨누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장일소는 제 목을 겨눈 검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움찔.

그러자 오히려 창궁대원들의 검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작 검을 들고 위협하는 자는 떨고, 맨손으로 위협받는 자는 웃음 짓는 기괴하고도 섬뜩한 상황이었다.

“오, 오지…….”

장일소의 바로 앞에 선 창궁대원이 가까스로 떨리는 목소리를 짜냈다. 그리고 장일소의 목을 금방이라도 꿰뚫어 버릴 듯 검 끝을 더 뻗으며 위협했다.

하지만 장일소는 흡사 그 검이 제 목을 절대 찌를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목이 꿰뚫려도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피 묻은 검의 첨단이 거의 목에 닿아 있었다.

찌르기만 하면 된다.

내력을 넣고 팔을 밀어 넣는 것만으로도 저 새하얀 목에 구멍을 뚫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조금의 용기만 내면 된다.

하지만…….

그 검은 끝끝내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저 도무지 남궁세가의 검수가 들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롭게 덜덜 떨릴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위축되어 물러났다.

“흐음.”

고혹적으로 웃은 장일소가 천천히 손을 뻗어 떨리고 있는 그 검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사락.

그 순간 그들은 보았다.

장일소의 손가락 끝이 살짝 갈라지며 새빨간 피가 한 방울, 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말이다.

“…….”

이 광경을 보기 전까진 모두가 막연히 생각했다. 저 손이 이 흔한 검에 상처 입을 일은 없을 것만 같다고. 그래서 두려운 거라고.

하지만 그 한 방울의 피를 본 순간 오히려 심장이 더 강하게 옥죄여 왔다.

피를 흘리지 않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와, 피를 흘리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어느 쪽이 더 무섭겠는가?

스르륵.

장신구 가득한 흰 손가락은 애처롭게 떨리는 검날을 타고 천천히 전진했다. 피 묻은 검날을 천천히 쓰다듬고는 마침내 검의 손잡이를 꽉 부여잡은 창궁대원의 손등에 가 닿았다.

그렇게 느리게 뱀처럼 선뜩하게 팔을 타고 올라간 장일소의 손가락은 마침내 창궁대원의 어깨를 스쳤고, 창백해진 뺨을 피로 물들인 후 이마까지 닿았다.

아주 가볍고 느린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게 대체 뭐라고 모두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했다.

그 순간.

검지만 펴고 있던 장일소의 손이 쫙 펴졌다.

갑작스러운 그 변화에 모두가 움찔한 바로 그때.

턱.

장일소의 커다란 손이 창궁대원의 머리를 덮었다. 마치 작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모양새였다.

“……가엾게도.”

측은함을 가득 담은 장일소의 다정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토록 열심히 싸웠거늘…….”

창궁대원은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적에게 위로를 받고, 그 위로에 순간 위안을 얻고 마는 이 상황을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저 장일소가 이곳에 등장했을 때, 단 한 사람이라도 이런 광경을 예상한 이가 있었던가?

장일소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도 결국은…….”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버림받았구나.”

순간 모두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절망을 보았다가 다시 희망을 보았고, 그 희망의 언덕에서 지옥의 구렁텅이까지 떨어졌다. 저 말만큼은 정말이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가엾게도……. 쯧쯧쯧.”

장일소의 눈썹이 정말로 측은하다는 듯 아래로 누그러졌다.

그 가증스러운 광경에 남궁황은 부러지도록 이를 갈아붙였다. 더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장…일소!”

그러자 장일소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남궁황이 뒤에 있다는 걸 잊기라도 한 듯 의아함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우릴 농락하지 마라.”

“농락?”

장일소가 재미있는 말을 들은 듯 되뇌더니 웃었다.

“그래! 농락! 무사는 죽을지언정 모욕은 받지 않는다!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라!”

남궁황의 말에 장일소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상한 말이네……. 들을수록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내가 언제 너희를 농락했지?”

“…….”

의아하기 짝이 없다는 듯 무구한 표정. 저 표정이 연기라는 것을 모를 이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그 표정 하나, 손짓 하나로 그들을 얼마나 뒤흔들어 대느냐다.

“너희를 농락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소림 아닌가?”

“무슨 개수작이냐!”

“아닌가?”

장일소의 손이 위로 올라간다. 과장되게 하늘을 찌른 장일소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 저 강 너머의 소림을 가리켰다.

“봐라.”

“…….”

“그저 강에 불과하단다. 건너지 못할 이유도 없어. 저딴 배들이 막고 있다고 강 하나 건너지 못해서야 소림이라는 이름이 울지 않겠니?”

남궁황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저들이 뭘 하고 있지? 그저 지켜보고만 있구나. 이곳에서 죽어 갈 너희의 마지막을 구경이나 하고 있지.”

“장일소!”

“그게 바로…….”

팔을 내린 장일소의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어렸다.

“농락이라는 거란다.”

남궁황은 뼈마디가 희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장일소가 말을 이었다.

“구해 줄 것처럼, 대단한 구원자라도 되는 양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결국 너희를 구하기 위해 피를 흘릴 생각은 없다는 거란다. 그게 저들이 생각하는 너희의 가치겠지.”

남궁황은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어서 화가 난 게 아님을 알았다.

저자가 내뱉는 말에 조금도 틀린 구석이 없기에 이리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의 목 안에 차마 뱉지 못한 절규가 맺혔다.

“……그래서? 이런 처지가 된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웃기지 마라, 장일소! 남궁은 결코 농락거리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다!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우리의 남궁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못할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모를 만큼 마구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울분만은 남궁의 이름을 쓰는 이들에게 분명히 전해진 모양이었다. 초점을 잃어 가던 몇몇의 눈에 빛이 돌아온다.

“흐음.”

장일소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서라, 장일소! 내가 가장 먼저 죽겠다!”

남궁황이 모든 공력을 끌어 올렸다.

무사는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법임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궁의 검수들에게 그가 가장 먼저 알려 주어야 한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기운을 끌어 올리는 남궁황을, 장일소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남궁황이 자신의 애검을 쥐고 달려들려는 바로 그 순간, 장일소의 입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줄까?”

남궁황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불신과 경악, 그리고 좌절과 기대.

그 모든 감정이 짧디짧은 순간 남궁황의 두 눈에 격랑처럼 휘몰아쳤다.

“뭐…라…….”

저것은 마귀의 속삭임이다 결코 들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의 남궁황은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차마 입이 열리지 않는다는 듯 말을 더듬던 그는 힘겹게 말을 완성했다.

“뭐…라 했느냐?”

장일소는 크게 미소 지었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와 인간을 발아래 둔 채 말을 건네는 마귀와도 같았다.

그는 붉은 입술 새로, 조금 전과 같은 말을 같은 어조로 툭 던지듯 가볍게 뱉었다.

“살려 줄까?”

“…….”

매화도에 깊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하하하…….”

그리고 그 침묵의 한가운데서.

마귀가 웃어 댔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의 웃음소리와 장신구 짤랑이는 소리가 유부의 귀곡성처럼 매화도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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