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3화. 진짜 절망이 뭔지 알려 줘야지. (2)
법정의 얼굴은 아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 어떻게…….”
다가오는 선단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는데도 그는 차라리 이 모든 광경을 부정해 버리고만 싶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하필이면 소림이 이곳에 도착하는 때를 맞춰, 하필이면 만인방이 도착한단 말인가?
‘우연?’
우연이라고?
그렇다면 이는 하늘의 농간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가 얼마나 더 절망하는지를 보고 싶었던 하늘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냈다고밖에는.
하지만 법정은 이 모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 선수에 모습을 드러낸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패군이니까.
패군 장일소.
장강참변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귀계를 보여 준 이다. 그 먼 하남에서 장강의 소식을 들으며 느꼈던 전율이 아직 생생하지 않은가?
우연? 저 장일소에게 우연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절대로!
“바, 방장!”
“…….”
법정이 홀린 듯 배들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배는 점점 더 매화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방장!”
법계가 다급하게 한 번 더 법정을 불렀다. 초조함이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법정의 귀를 찔러 댔다.
“더 기다리다가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저 배가 매화도에 도착하게 된다면……!”
이 말뜻을 모를 법정이 아니다.
남궁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 바람 앞의 촛불이라는 말조차 지금의 남궁에 비한다면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상황에 소림이 아닌 만인방이 먼저 매화도에 도착하게 된다면 결과야 뻔하지 않겠는가?
당장 저 매화도로 향해야 한다. 저 배들이 소림의 길을 가로막기 전에.
“먼저 도착해야 합니다! 만인방보다 먼저!”
저 배는 분명 빠르다. 하지만 아직은 거리가 있다. 지금 당장 물로 뛰어들면 저 배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다. 물 위에서, 그리고 물속에서 그들을 방해할 수적들도 지금 당장은 저 매화도에 묶여 있지 않은가? 그러니 아직 선수를 놓친 건 아니다. 적어도 법계는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도착하면?”
“예?”
그 순간 들려온 법정의 말에 법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돌아보았다.
법정은 얼음처럼 차게 굳은 얼굴로 배와 매화도를 번갈아 보았다.
“우리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짧은 침묵이 법계에겐 더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우리가 먼저 저 섬에 도착하면 어찌 된단 말이냐?”
“그야…….”
법계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
아니다. 법정의 목소리에 지금껏 그가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어려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남궁이 왜 저런 꼴이 되었느냐? 저 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더냐?”
“하지만 방장! 저대로 두면 남궁은 전멸합니다!”
전멸.
그 말은 분명 법정을 갈등하게 했다. 잘게 떨리는 법정의 어깨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으드드득.
법정이 이내 입술을 짓깨물었다. 이가 파고 들며 붉은 피가 턱을 타고 흘러 후두둑 떨어졌다. 힘이 잔뜩 들어간 발끝도 땅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물러나라.”
“바, 방장!”
“물러나라 하지 않느냐! 모든 소림의 제자는 강에서 떨어져라! 이곳에서 대기한다!”
“방장! 그게 무슨……!”
“그 입 닫지 못할까!”
법계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법정은 오히려 그런 그를 다그쳤다.
“으…….”
차마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법계의 입에선 어찌할 수 없는 통한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에게 남궁은 단순한 오대세가의 한 문파가 아니다. 그 치욕적인 장강참변에서 함께 굴욕을 감내한 동료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방장이 그런 동료의 몰살을 그저 지켜보라 말하고 있다.
법정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이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는 듯.
“……이대로 매화도로 향한다면 저 패군의 덫에 걸려들 뿐이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우리 소림을 끌어들이기 위한 패군의 수작일지도 모른다.”
법계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패군이 그런 계략을 꾸몄다면 어째서 소림이 매화도에 도착한 뒤에 습격해 오지 않고 미리 모습을 드러냈느냐고!
하지만 법계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주위에 있는 제자들이 그의 말을 듣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말이 법정의 진짜 속내를 이 밝은 하늘 아래 드러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싶지 않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소림은.”
피로 얼룩진 입술로 법정이 결단을 내렸다.
“이곳에서 상황을…… 지켜볼 것이다.”
마지막 목소리는 잦아들어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법정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모를 이는 없었다.
“……아미타불.”
그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또렷하게 들리는 불호가 차마 섬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소림 제자들의 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
남궁황은 망연한 눈으로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물로 뛰어들어 그들을 구원하러 올 것 같던 소림이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다시 대열을 갖추는 모습이 똑똑히 보인 것이다.
“뭘…….”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어째서 저기에서 멈춰 선단 말인가? 저곳에서 할 게 대체 무엇이 있다고?
“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정적이 고였다.
조금 전까지 바로 이곳에서 광기에 찬 짐승들이 서로 물어뜯으며 날뛰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정적이 섬에 내려앉았다.
“왜……. 왜 안 오는 거지?”
“대체…….”
그때까지도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미약한 희망의 빛을 놓지 않고 있었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지금은 조금 지체되고 있지만, 곧 소림이 저 강을 넘어 그들을 지원하러 올 것이라고.
그리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는 것 외에는 남은 길이 없었다.
심지어 남궁황마저도 이 순간만큼은 소림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강을 도하할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저 배는 뭐야?”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가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갑자기 등장했던 소림이 모조리 앗아 갔던 시선이 옆으로 돌았다. 그제야 모두의 시선에 보였다. 이 섬으로 접근하고 있는 선단의 모습이.
그 순간,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지금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했다. 이건 이성이 아닌 감각에 의한 판단이었다.
남궁세가의 눈이 크게 뒤흔들렸다. 불신과 두려움을 가득 담고 강 건너를 향해 다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직면한 현실을 확인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는 듯 애처롭게 턱을 떨면서.
하지만 언제고 진실을 맞이해야 할 순간은 반드시 온다.
불안한 시선이 마침내 소림 쪽으로 다시 가 닿았을 때, 그들은 보고 말았다. 강변에서 아예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소림을.
남궁이란 이름을 쓰는 이들을 절망에 빠뜨린 것은 더는 이곳으로 올 생각이 없다는 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버린 소림의 발끝이 아니었다.
그들을 진정으로 절망으로 빠뜨린 것은 바로 눈빛의 부재(不在)였다.
형형한 안광으로 이곳을 응시하고 있어야 할 소림승들의 눈빛이 보이질 않았다.
보고 있지 않으니까.
천하의 소림, 무림의 북두라 불리는 그들. 천하의 어떤 문파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그 소림의 나한들이 지금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차마 마주 볼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이만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도 죄스러움이 너무 커 차마 마주 볼 엄두가 나질 않는 양으로 남궁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
이러니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천치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버림받았다.
“어으…….”
“어…….”
사람을 가장 큰 절망에 밀어 넣는 건 언제나 희망이다.
인간은 희망이 아예 없는 곳에선 인간은 절망하지 않는다.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니까.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한 인간은 그것을 부여잡기 위해 악을 써 댄다.
그리고 그 희망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은 무너지고 만다.
“으……으으…….”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이 남궁세가를 뒤덮기 시작했다.
믿었던 아군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소림이 자신들의 죽음을 외면해 버렸다는 사실이, 그들을 살아생전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던 절망의 무저갱 속으로 처넣었다.
“어으…….”
치명상을 입은 짐승이 헐떡대는 듯한 신음이 그들의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실제로 지금 그들은 상처 입은 짐승이고,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니까. 소림이라는 동아줄이 잘려 나간 이상, 남은 것은 끝없는 추락뿐이다.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의지나 악도 샘솟지 않는다. 팔다리도 남의 것인 양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냥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어졌다.
좌절이 무서운 건, 사람을 주저앉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너무 짙어 들여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지독한 나락에 맥없이 빨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단 한 사람만은 절망 대신 노기를 내뿜었다.
“법저어어어어어어어엉!”
상처 입은 범, 남궁황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법정! 법저어어어어엉!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피 끓는 울부짖음이 그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두 눈의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가고, 쉬어 버린 목은 쇠가 뒤틀리는 듯한 괴성을 토했다.
이토록 처절한 좌절 아래 모두가 신음하던 바로 그때.
마침내 그자가 이 땅에 도달했다. 이 모든 진창 같은 절망을 한낱 유희로 여기는 자.
쿠우우우웅!
커다란 전투선이 모래톱을 들이받았다.
남궁과 수로채, 심지어는 남궁황과 흑룡왕마저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흐으으음.”
비음 섞인 낮은 목소리가 가벼이 흘러나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기이할 만큼 섬 전체에 또렷하게 퍼져 나갔다.
이윽고 한 사람이 사뿐한 발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남궁황은 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으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삼 년 전, 바로 이 장강에서 그들을 농락하고 비웃으며 떠난 이의 모습을 말이다.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화려한 붉은 장포에 금사로 새긴 기이한 자수. 새하얀 피부, 한 올도 흘러내리지 않도록 틀어올린 머리, 화려한 면류관, 과하게 걸친 장신구들까지.
타악.
배 위에서 뭍으로 가볍게 뛰어내린 장일소는 살짝 굽혔던 몸을 천천히 폈다.
짤랑.
그가 두른 장신구들이 맞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삼 년 전의 기억을 강제로 불러일으켰다. 저 소리는 악몽을 깨우고 공포를 부른다.
남궁황의 시선이 장일소의 입술에 가 닿았다.
“참 이상하구나.”
장일소는 더없이 친근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꽤 오랜만인데, 환영하는 얼굴이 아닌 것 같아.”
피처럼 붉은 그의 입술이 달과 같은 호선을 그렸다. 실로 불길하고 요사스러운 저 입에서 쏟아지는 말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남궁황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무척…… 반가운데 말이야. 하하하핫!”
그리고 생각했다.
차라리 저 흑룡왕의 손에 죽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 마귀의 손에 농락당할 바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