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1화. 기대라도 하셨나? (6)
촤아아아악!
전투선이 물살을 갈랐다. 급격한 기동과 가속이 만들어 낸 새하얀 포말이 장강을 순식간에 희게 물들이고 있었다.
수십 대의 거대한 전투선이 동시에 뱃머리를 틀어 밀고 들어오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아니, 장관이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을지 모른다. 매화도에 있는 남궁세가에게 그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
“아…….”
적이 다가오고 있다. 남궁의 이름을 쓰는 이들은 적을 두려워한 적 없다. 오히려 환호해 왔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에 떠오른 것은 투지가 아닌 절망이었다.
적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전의 상태가 아니기에 이길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지고, 자신감을 잃는 상황 따위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다.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전쟁이라는 게 얼마나 지독할 수 있는지.
서로가 최선의 상태에서 맞붙고, 지금의 실력으로는 이기기 버거운 적을 협의와 근성으로 극복해 내는 상황 같은 건 그저 이야기 속에서만 나온다는 걸 말이다.
“일어나라!”
그 순간 남궁황의 입에서 우렁우렁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잊지 마라! 너희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은 나도 아니고, 등 뒤에 선 동료도 아니다! 바로 저 적들이 너희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목소리가 모두의 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들에게 남궁세가 검수의 마지막 모습이 무기력하고 겁먹은 모양이었다 기억하게 하지 마라! 너희가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것은 적이 너희에게 보이는 경외다!”
효과가 있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남궁황의 입에서 일어나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 지쳐 쓰러져 있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잘되지 않았느냐! 적이 온다. 이제는 그 검으로 베어 낼 이들이 있다. 웃어라! 남궁의 검은 적을 맞이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증명하자꾸나!”
실로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그렇게 남궁황이 마지막 전의를 다지는 그 순간이었다. 섬으로 몰려오던 배 중 일부가 옆으로 급격하게 선회했다.
“엇?”
콰아아아아아앙!
그리고 배의 선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쏘아진 포격이 매화도로 날아들었다. 정확하게 조준하여 맞추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명중하면 좋지만, 아니어도 그만인 공격이었다. 이쪽의 사기를 꺾고 신경을 분산시키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그 기대 없이 쏘아 올린 포격조차도 한계에 몰린 남궁세가에게는 커다란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섬 곳곳에 포격이 쏟아졌다.
더없이 맑은 하늘. 그 하늘에 점점이 박히며 쏟아지는 포탄과 그로 말미암아 피어오르는 흙먼지는 흐릿하기 짝이 없었던 머릿속에 강제로 현실감을 때려 넣었다.
“큭.”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이를 악물며 다시 검을 들었다.
맞는 말이다.
무사란 어떻게 죽느냐로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법이다.
그들도 알고 있다. 이 전투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확률 따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 마지막으로 생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콰앙! 콰아아앙!
포격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남궁세가 검수들의 눈은 더욱 냉정히 가라앉았다.
저 배가 이 해안에 도착하는 순간이 시작이다!
남궁의 모든 검수들이 접근하는 배를 바라보며 심호흡하고 결의를 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파아아앗!
마음의 준비를 채 다 마치기도 전에 섬과 맞닿은 수면에서 수십의 수적이 물보라와 함께 솟구쳤다.
“뭐, 뭣!”
“오, 온다! 빌어먹을!”
허를 찌르듯 솟아오른 수적들은 함성도 없이 전력으로 달려왔다.
흑룡왕은 과연 노련한 자였다. 남궁세가가 전의를 다질 시간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한발 빨리 매화도로 습격조를 투하한 것이다.
파아아앗!
쇄도하는 속도만 봐도 이들이 그저 평범한 수적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철갑처럼 안색을 굳힌 수적들은 북해의 만년빙보다 더 차가운 기세를 내뿜으며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창궁검대! 앞을 지켜라!”
“예!”
육체에 새긴 훈련이란 어떤 상황에서든 그 효과를 발휘한다. 육체의 한계에 직면한 창궁대원이지만, 대주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발이 먼저 움직였다.
창궁검대가 삽시간에 앞쪽으로 나서며 전열을 갖추었다.
만약 청명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명문의 힘이란 검 끝에 어린 검기로 증명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의지가 그 역사와 이름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의 남궁세가는 그간 쌓아 온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그 의지로 증명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포격 역시 멈추지 않았다.
포탄과 함께 달아오른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남궁의 창궁검대와 수로채의 흑룡대가 정면에서 충돌했다.
카강!
검과 도, 검과 작살이 맞부딪히며 불똥이 튀어올랐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지금까지 이어 왔던 전투는 서로 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치렀다. 수로채는 남궁을 끝까지 몰아붙일 생각이 없었고, 남궁은 수적들이 그들의 숨통을 완전히 끊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남은 것은 어느 한쪽의 전멸.
어느 쪽이든 한쪽이 모조리 숨이 끊어지기 전까진 결코 끝나지 않을, 모든 것을 건 전투다.
카가가가각!
힘줄이 곤두선 팔이 병장기를 밀어 댔다. 한 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광경이었다.
원래라면 밀려나야 할 이들은 당연히 흑룡대였다.
창궁검대. 그 이름을 쓰는 이들은 남궁의 정예 중 정예이다. 창천남궁세가를 이끌어 온 이들의 검이 가벼울 리 있겠는가?
하지만.
카가가각!
“끄윽…….”
대치가 길어질수록 점점 뒤로 밀리는 쪽은 남궁의 검이었다.
아무리 굳건한 의지라 해도 결국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수로채의 도와 작살이 남궁의 검을 밀어 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아아악!”
승기를 잡은 도는 끝내 연약한 육체를 잔인하게 갈랐다.
곳곳에서 피가 튀어 오르고, 날카로운 비명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작살에 배가 꿰뚫리고 도에 어깨가 갈리는 순간에도 창궁검대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누가 핏대 세우며 외치지 않아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어야 할 곳이 바로 이 자리라는 것을.
“까불지 마라!”
창궁대원 중 하나가 처절한 고함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파아아앗!
빛살처럼 날아든 검이 정면에서 달려들던 수적의 목을 꿰뚫었다.
“끄륵!”
목 앞을 파고든 검이 뒷덜미를 뚫고 삐죽이 나왔다. 목에 박힌 검을 내려다본 수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덜덜 떨었다.
“수적 따위…….”
푸욱!
하지만 그 순간.
목이 꿰뚫린 이의 작살이 순간 방심한 창궁대원의 아랫배를 파고들었다.
창궁대원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의지는 굳건했을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전장의 경험이 일천한 애송이. 상대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까진 방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끅…….”
파아아앗!
그때 뒤쪽에서 날아든 도가 몸을 뒤틀던 창궁대원의 목을 쳐 날렸다. 두 눈을 부릅뜬 목이 허공으로 팽그르르 회전하며 솟아올랐다.
“과, 광아야!”
“남궁과아아아앙!”
세가는 더없이 끈끈하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는 문파와는 달리, 세가는 어릴 적부터 구성원들이 함께 자라난다.
그 말인즉, 누군가가 희생될 때 받는 충격이 일반적인 문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동생, 누군가에게는 형,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아들일 자의 목이 허공으로 솟아올랐으니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하는 이들의 가슴속엔 피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들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증오와 분노가 팽창할수록 전장에선 협의와 의기가 사라진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오직 눈앞에 있는 이들을 기필코 찢어발기겠다는 노골적인 적개심뿐.
검을 들고 자라나는 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 위해 부드럽게 꾸며진 이야기들이 송두리째 허물어지며 전장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들의 목을 바쳐 얻어 내는 승리.
형제의 심장을 제물로 주어지는 영광.
누가 희생을 논하던가?
누가 슬픔을 논하던가?
죽어 간 이들에게 주어지는 찬사는 없다. 영광이란 온전히 산 자의 몫이다.
누군가는 알아야 했다. 그 영광 뒤에서 누가 피를 흘렸는지. 본디 모든 영광 뒤에는 잊힌 죽음이 숱하다는 것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 선 이들은 그저 적개심과 공포, 증오에 매몰되어 눈앞에 있는 적에게 달려들 뿐이었다.
“죽어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인 창궁검대가 악을 써 대며 수적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격렬한 반항이었다. 완전히 지쳐 있는 이들이 쏟아 냈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과격한 검기가 쏟아졌다.
하지만 흑룡대는 당황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 하지만 쥐에게 물린다고 해서 고양이가 죽을 일이야 있겠는가? 상대가 격렬하게 저항할 것쯤이야 이미 예상했다. 중요한 것은 적을 완벽하게 몰아넣는 것이다.
처음 무시무시하게 돌진했던 것과는 달리 흑룡대는 공격의 고삐를 느슨하게 풀었다. 결코 서두르는 일 없이, 느긋하게.
쿠웅! 쿠웅!
그때 매화도로 진격해 온 배가 모래톱에 충돌하며 정박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온통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배, 흑룡왕을 상징하는 흑룡선이 마침내 매화도에 도달했다.
콰아아앙!
그 커다란 소리가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과연 저만한 속도로 접안하고도 배가 무사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되는 굉음이었다. 하지만 그 굉음이 주는 파급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적의 본대가 도착했다는 것을 눈도 아닌 귀로 확인하게 된 남궁세가의 몸이 절로 움츠러든 것이다.
쿠웅!
잠시 후, 흑룡선의 선수로 누군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을 주눅 들게 할 만큼 장대한 체구.
관우를 연상케 하는 검은 수염.
범의 눈과 같은 호목.
실력은 물론이고, 외양만으로도 지켜보는 이들을 움츠러들게 하는 이가 그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벌레 같은 놈들이…….”
마침내 매화도에 입성한 흑룡왕이 남궁세가를 발아래로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냈다.
“감히 이 장강에서 나에게 대적한 놈들을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라!”
“존명!”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접안한 전투선들에서 수적이 개미 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었다.
섬의 사방을 모두 점령한 배 위에서, 그리고 물속에서, 수적들이 끝도 없이 꾸역꾸역 섬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흑룡와아아아아아아아앙!”
남궁황이 사자후와 같은 고함을 터트렸다.
“제왕검.”
하지만 흑룡왕은 그 소리를 듣고도 그저 입꼬리를 비틀 뿐이었다. 남궁황이 증오로 시뻘게진 눈을 그에게 고정한 채 외쳤다.
“네가 무인이라면 앞으로 나서라! 못다 냈던 승부를 가릴 용기 정도는 있겠지!”
“여전히 멍청한 놈이로군, 남궁황.”
흑룡왕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감히 너 따위가 나와 승부를 겨룰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했나?”
“이…….”
“거기서 힘껏 발악하다 죽어라. 네 마지막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 주마!”
“흑룡와아아아아아앙!”
“죽여라.”
수적들이 피 흘리는 대어를 향해 게걸스레 달려들기 시작했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뜯어 먹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