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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40화 (941/1,567)

940화. 기대라도 하셨나? (5)

선수에 서서 매화도를 바라보는 흑룡왕의 입이 슬쩍 비틀렸다.

“상황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남은 기력마저 모두 소진될 것입니다.”

“흐으음.”

흑룡왕이 기분 좋은 듯 콧소리를 흘렸다.

‘제왕검.’

때때로 남궁황의 노기에 찬 음성이 이곳까지 들려오기도 했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흑룡왕은 피어나는 미소를 누를 길이 없었다.

“우둔하기 짝이 없는 놈.”

얼마나 멍청하면 이 물 위에서 감히 수로채를 상대하겠단 생각을 했단 말인가?

물 위에 올라온 이상 저들은 더 이상 수로채의 적이 아니었다. 그저 능수능란하게 요리해야 할 먹잇감에 불과했다.

“흑룡왕이시여. 적들이 충분히 지친 것 같으니 슬슬 고삐를 죄어 보시는 건……?”

“멍청한 소리.”

흑룡왕이 손을 크게 내저었다.

“이건 낚시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대어를 낚을 때는 힘자랑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힘으로 맞붙다가는 낚싯줄이 끊어져 기껏 잡은 고기를 놓치기 십상이지. 낚시에서 중요한 건 힘이 아니라 인내다.”

흑룡왕의 두 눈이 매화도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때를 기다리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빼면 된다. 아무리 거대한 고기라 해도, 힘이 빠진 뒤에는 배 위로 끌려 올라올 수밖에 없을 테니.”

그가 턱짓을 매화도를 가리켰다.

“공격을 지속해라! 낚싯줄을 풀었다 조이듯, 긴장이 풀릴 때쯤 다시 공격하기를 반복해라.”

“예!”

“흐흐흐.”

흑룡왕의 두 눈에서 득의양양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래 봐야 온실에서 자란 애송이일 뿐이지.’

남궁황의 실력은 그도 인정한다. 그 용력과 타고난 패도는 흑룡왕조차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강호. 가진 힘만으로 승부가 결정 나는 세상이 아니다.

지금 남궁세가는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심정을 절절히 깨닫고 있을 것이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오히려 바늘은 더 깊이 파고들고, 힘은 빠지게 되지.’

장강이라는 바늘은 이미 남궁세가의 목구멍 깊이 틀어박혔다. 자력으로 그걸 빼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기와 피로, 두려움과 미약한 희망.

그 모든 것이 지금 남궁세가를 지옥의 밑바닥으로 처박고 있을 것이다.

‘길어야 이틀이다.’

일을 너무 끄는 것도 그리 좋지 않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흑룡왕의 계산대로라면 앞으로 이틀 정도만 더 힘을 빼 놓으면 굳이 지원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수로채 단독으로 남궁세가를 피해 없이 몰살시킬 수 있다.

“공격을 지속해라!”

“예!”

흑룡왕이 나지막이 웃었다.

“남궁황……. 네 목은 내가 친히 잘라 주겠다.”

그의 타오르는 듯한 눈이 금방이라도 매화도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았다.

한편 남궁황의 두 눈은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퀭한 두 눈 아래로 드리운 짙은 그림자는 지금의 그가 얼마나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공격해 올 생각이 없군.”

“가주…….”

여전히 섬을 포위하고만 있는 배들을 보며 남궁황이 자조했다. 시선을 돌리면 보였다. 잔뜩 지쳐 주저앉은 남궁세가의 가솔들이 말이다.

“…….”

한참을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남궁황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겨우 공격이 멈췄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저들이 공격을 멈춘 이유는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님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것보다 공격과 방치를 반복하여 뒤흔들어 놓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란 걸 알기 때문임을.

“남궁명.”

“예……. 형님.”

가주님이라 부를까 잠시 고민했던 남궁명의 입에서 ‘형님’이라는 말이 나오고 말았다. 지금 남궁황이 찾는 이가 창궁대주가 아닌 그의 동생 남궁명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틀렸느냐?”

남궁황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위가 그랬지. 힘이 남아 있을 때 흑룡왕을 베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말라 죽게 될 거라고 말이다.”

“형님…….”

“그 말대로 되고 있구나.”

주저앉은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더는 검을 들 힘도 없어 보였다. 모래에 엎어지지 않는 것으로 겨우 자존심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는가?

이미 모두가 한계에 몰렸다. 남궁황조차 몰려오는 피로와 수마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인데, 저들은 오죽할까?

“말해 보거라, 남궁명.”

“…….”

“내가 틀렸느냐?”

“혀, 형님!”

남궁명이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형님의 선택은 최선이었습니다. 어떤 가주도 가솔의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버티면 반드시 지원이 올 것입니다!”

“지원이라…….”

남궁황이 나직이 웃었다.

“오지 않으면?”

“…….”

“그 지원이라는 게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 그건…….”

남궁명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그도 알고 남궁황도 알고 있다.

“큭큭큭.”

남궁황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참을 수가 없구나. 참을 수가 없어…….”

으드득.

그는 뼈마디가 툭툭 불거지도록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남궁의 멸문도 아니다.”

“…….”

“저놈들을, 지난 삼 년 동안 나 하나만 믿고, 그 고통스러운 수련을 버텨 낸 놈들을…… 검수로서 죽게 해 주지 못하고, 이리 사냥당하듯 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는……. 나는 너무도 원통하고 죄스럽다.”

남궁황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울분과 분노를 참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치미는 역겨움을 버티지 못해서.

“형님…….”

“나는 정말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그 선택을 한 것이냐?”

“……예?”

그건 남궁명을 향한 목소리였지만, 결코 그를 향해 묻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저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남궁명은 말을 아끼고 숨을 죽였다. 어설픈 위로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무거운 목소리였다.

“사실은 내 검에 가문의 명운과 저들의 목숨을 모두 건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남궁명은 대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남궁황의 이런 약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나이 차가 그리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궁황은 언제나 그에게 태산보다 더 큰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그런 남궁황이 무너지고 있었다.

“형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형님께서는 남궁의 가주십니다! 세상 모든 것이 흔들릴 수 있어도 형님만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그래, 그게 가주라는 거겠지.”

남궁황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주. 그 두 글자가 주는 무거움이 지금 그를 한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남궁황이 자조하듯 말했다.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안타까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남궁명은 굳이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지금의 남궁황은 말을 풀 상대가 필요한 것뿐이니까.

“이 평화로운 시대에는 내 검을 떨칠 일이 없으니까.”

남궁황의 시선이 먼 하늘로 향했다.

“백 년 전, 그 환란의 시대에 태어났었더라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명성을 올리고, 천하를 구원하는 이가 될 자신이 있었다. 그 천마의 목을 내 검으로 베고 말이다.”

“형님…….”

“그런데…….”

남궁황의 입에서 쿡쿡 웃음이 터졌다.

“그들은 이런 전쟁을 몇 년이나 한 것이로구나…….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옥을 겪으면서, 생때같은 가족과 제자들이 바로 옆에서 피를 토하고 목이 잘려 나가는 꼴을 보면서도 그저 싸우고 또 싸우고…….”

“…….”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어찌…… 어찌 마음이 꺾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남궁황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이리 작게 느낀 것이 살며 처음이었다.

“흑룡왕의 목을 베어 가문을 구원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내가…… 난세? 천마? 큭큭큭큭.”

그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주제를 모르는 하룻강아지였던 거지. 나는 고작 그것밖에는 안 되는 인간이었다. 고작…….”

터질 듯 움켜잡은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형님…….”

“알고 있다.”

그러나 남궁명이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전에 남궁황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

“창궁대주.”

“예, 가주님!”

“적은 며칠 내로 총공세에 돌입할 것이다. 힘을 있는 대로 빼놓고 마무리를 하려 들겠지.”

“예.”

“그때까지 어떻게든 가솔들을 교대로 쉬게 해 두어라.”

남궁황이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검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아야 할 테니까.”

“명을 받들겠습니다!”

남궁명이 가솔들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남궁황이 입에서 다시 한번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공격은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몸을 숨길 곳을 잃은 남궁세가는 전략을 바꿔 섬의 중앙에 둥글게 포진했다. 바깥쪽에 있는 이들은 안쪽에 있는 이들을 지키고, 교대해 가며 조금이라도 쉬기 위해서.

포탄이 날아들고 수적들이 야금야금 습격해 오는 상황에서 편히 쉴 수 있을 리야 있겠냐마는,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체력 정도는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좋은 수는 아니었다.

안으로 모여든 이들은 이전보다 객관적으로 주변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들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약한 희망.

반드시 누군가 그들을 구하러 와 줄 것이라는 간절한, 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그 믿음만이 그들을 지탱해 주는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째가 되도록.

구원은 당도하지 않았다.

“…….”

남궁도위는 힘겹게 눈을 떠 내리쬐는 해를 바라보았다.

실로 따사로운 햇살이나, 지금은 이마저도 그에게는 숨이 차도록 버거웠다.

‘……오지 않았는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강변을 살폈지만,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비어 버린 강변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쿨럭.”

마른기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물을 충분히 마셨는데도, 전신이 말라비틀어진 것만 같았다.

‘더 버틸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버텨야 한다.

그보다 더 힘든 이들도 버티고 있으니까.

남궁도위는 본능적으로 검을 움켜잡고 땅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길이 수적들의 배에 닿았다. 매화도를 포위하고 있는 저 배들이 이토록 증오스러울 수…….

“……!”

그때 남궁도위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어…….”

입이 절로 벌어지고,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일어나. 일어나라!”

그의 입에서 쥐어짠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매화도를 포위한 채 빙글빙글 주변을 돌고 남궁세가를 말려 죽이던 배들이 이 섬을 향해 일제히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남궁도위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알지 못한 채 악을 쓰듯 외쳤다.

“온다! 공격이다!”

총공세, 즉 남궁세가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수로채의 마지막 공격이다.

길고 길었던 장강 지옥도의 마지막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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