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9화. 기대라도 하셨나? (4)
“…….”
백천의 얼굴이 미미하게 뒤틀렸다.
솔직히 말하자. 그래, 솔직히 말하자.
이번 장강행에 끼어드는 것이 소림의 농간에 놀아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백천은 여전히 나이가 어린 편이지만, 그 경험으로 따지자면 이제 웬만한 문파의 일대제자는 찜 쪄 먹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저 청명이 놈이 장강이란 말만 들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경기를 일으키는 것도 충분히 납득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말이 백천이 장강에 가길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화산의 제자인 백천은 장강의 일에 휘말리기를 원하지 않지만, 검수인 백천은 지금 당장이라도 장강에 달려가고 싶었다.
왜냐고?
‘수련한 걸 써먹어 봐야 할 것 아니냐고!’
지난 삼 년, 백천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은 말 그대로 생지옥을 겪었다.
화산의 수련은 원래도 다른 문파들이 본다면 ‘저 새끼들 정신 나간 것 아냐?’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강도가 높다. 그런데 그 강도 높은 수련의 기틀을 마련했던 저 미친 사질 놈이 각을 잡고 제대로 후려쳤으니, 그 삼 년간의 수련이 어땠겠는가?
그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며 이가 갈리고, 오금이 저리고,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니 응당 확인시켜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이 지옥 같은 수련을 하게 만든 저 이 갈리는 사패련의 악적들의 대가리를 매화검으로 후려치고 ‘널 위해 준비했다!’를 외치고 싶은 것은 비단 백천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지난 삼 년간 그들이 흘렸던 눈물을 피눈물로 갚아 주고 싶은 것이 모든 화산 검수들의 심정 아니겠는가?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은근히 기뻤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장강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든 사파 놈들과 엮이게 될 것이고, 그럼 그들이 받은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되돌려 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부푼 마음으로 화산을 내려온 백천을 맞이한 것은 강호의 검수로 우뚝 설 그의 미래가 아니라, 떠올리기도 싫은 지난 과거였다.
“저…….”
백천은 떨떠름하다 못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명아?”
“응?”
“……이게 뭐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나이도 어린 양반이 치매가 왔나, 보고도 몰라?”
“뭔지야 알지, 인마!”
“그런데 왜 물어봐?”
“이게 왜 여기 있냐고!”
백천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의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가리킨 것은 화음의 초입에 놓은 수십 대의 수레와 그 수레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종의였다.
황종의는 백천의 속도 모르고 환하게 웃으며 청명을 맞이했다.
“다행히 늦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장.”
청명이 반색하며 그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고, 정말 수고 많으셨네요.”
“도장의 부탁이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말씀하신 대로 이번 수레는 좀 더 보강했습니다. 이 정도면 화산 분들이 검으로 후려쳐도 단번에 부서지지는 않을 겁니다.”
“크으! 은하상단 수레의 품질은 제가 가장 잘 알죠. 믿음직스럽네요!”
“하하하.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 수레는 좀 더 많은 물품을 실을 수 있도록 크기를 키웠고, 사람이 탈 수 있도록 승차감(?)에도 좀 더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전보다 무게를 무려 두 배나 늘렸지요.”
그 순간 조걸이 손을 번쩍 든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말씀하시지요, 조걸 도장.”
“보통은 무게를 반으로 줄였다고 자랑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이건 청명 도장의 의뢰인지라. 최선을 다했습니다.”
조걸은 삽시간에 생기가 빠져나간 얼굴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청명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뭐?”
“……개새끼.”
그럼 그렇지.
그 순간 청명이 오검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악랄해 보였는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순간 치를 떨었다.
“아이고, 우리 사숙, 사형들.”
“…….”
“혹시 장강에 가서 멋지게 검을 휘두르면서 사파랑 싸우는 협객행 할 거라고 기대라도 하셨나?”
움찔한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청명이 낄낄 웃었다.
“아이고. 꿈 깨세요, 이 양반들아. 내가 말했지? 우리는 안 싸운다고! 우리가 거기 뭐 하러 가냐? 윤종 사형!”
“야, 양민들을 구하러 가지.”
“정확하게는 그 사람들을 옮기러 가는 거지, 옮기러! 세상에서 그걸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뭐라고 하는데…….”
“운송! 운송이라고 한다, 운송!”
청명이 콧김을 내뿜었다.
“운송 하면 화산! 화산 하면 운송이지!”
“언제부터 이 미친놈아!”
“원래 그랬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화산의 모든 제자들은 절절하게 깨달았다.
‘이 새끼 진짜 짐 옮기러 가는구나.’
가슴속에서 작게 타오르던 불씨에 웬 미친놈이 찬물을 양동이째 끼얹어 버린 느낌이다.
그런데 순간 뭔가를 깨달은 백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 잠깐만.”
“응?”
“이 수레는 언제 준비하라고 한 거냐?”
“그때 은하상단에 갔을 때 말해 뒀지.”
“그, 그럼 너 그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응?”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냥 요즘 다들 몸도 좋아지고, 내력도 좋아졌으니까. 옛날보다 수레가 좀 커져도 될 것 같더라고.”
“…….”
“이왕 만드는 김에 좀 많이 만들어 놓으면 어디 써먹어도 쓰겠다 싶어서 이야기해 뒀지. 그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
말하자면 봉문을 풀자마자 그들을 어떻게든 더 알뜰하게 써먹을 계산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마귀 새끼.”
“개도 안 물어 갈 놈.”
“저건 진짜 문파를 잘못 택했어. 사파로 갔으면 무림사에 획을 그어도 몇 번은 그었을 텐데.”
“시끄럽고.”
청명이 파리 떼라도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쓸데없이 헛꿈 꾸지 말고 수레나 잡아! 이제부터 사형들은 소다. 검수가 아니라 소! 우리의 목적은 최고 속도로 장강으로 달려가서 양민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위험하지 않은 곳으로 나르는 거야!”
“…….”
“질문?”
“……없어, 인마.”
협행을 향해 부풀었던 화산 제자들의 마음에 시커먼 어둠이 들어찼다.
“크흠, 이거 수레가 좋구나.”
“어디…… 양민들이 탔을 때도 크게 문제가 없을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장문인. 중요한 일이지요.”
그리고 그 어둠은 현자 배들이 은근슬쩍 수레에 올라타고, 눈치를 보던 운자 배들이 헛기침을 하며 그 뒤를 따랐을 때 더 짙어졌다.
현종이 허허 웃었다.
“청명이의 말이 맞다. 꼭 검으로 싸우는 것만이 협의는 아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해 주는 것이 협행이지. 그들이 우리가 싸워 주길 원하겠느냐?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길 원하겠느냐?”
참 좋은 말이었다.
그 수레에 미리 올라타 하는 말만 아니었으면 더 좋게 들렸겠지만.
장문인. 굉장히 편해 보이십니다?
“시간 없어! 빨리 달라붙어.”
“…….”
화산의 제자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가 수레를 움켜잡았다. 그 순간 손끝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감각이 그들을 더욱 서글프게 만들었다.
아……. 삼 년이나 지나도 이게 손에서 안 떨어지네.
“하하하하.”
옆에서 지켜보던 황종의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원래는 손잡이가 좀 더 커야겠지만, 화산 분들이 쓰는 수레다 보니 제가 따로 신경을 썼습니다. 손잡이 부분의 굵기를 여러분이 쓰시는 검의 손잡이와 동일하게 제작했으니, 쓰는 데 불편함이 없으실 겁니다.”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맙습니다.
참 배려가 깊으시네요, 단주님.
“읏차!”
청명이 살짝 뛰어 선두의 수레에 올랐다.
“자, 그럼 장강까지 단숨에 간다! 가자! 달려라, 동룡!”
“에라, 씨바!”
“가자아아아아!”
청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크고 무거운 수레들이 그 무게가 무색하도록 어마어마한 속도로 튀어 나갔다.
“제일 늦게 도착하는 놈들은 바퀴 대신 쓸 테니까 죽어라 달려!”
앓는 듯한 욕지거리와 고함이 왁자지껄 울려 퍼졌다. 그렇게 속력을 높인 수레는 순식간에 아주 멀리로 사라졌다.
“허허허허.”
남겨진 황종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부디 무운을.”
먼 곳의 먼지구름을 향해 황종의가 깊게 포권 했다.
* * *
콰아아아아앙!
남궁도위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입에선 단내가 나고,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하지만 그에게 쉴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타아아아앗!”
그는 자리에서 뛰어올라 날아오는 포탄을 단번에 쳐 냈다.
콰앙!
포탄과 검이 충돌하며 커다란 폭음을 만들어 내었다.
“끄윽.”
저런 포탄 따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만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깃털처럼 날려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 저 포탄은 너무도 무겁고 버거웠다.
‘개 같은…….’
말라 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저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이쪽이 확연히 몰릴 만큼 포격을 해 오지도 않고, 필요 이상의 전력을 상륙시키지도 않았다. 그저 그들이 엉덩이를 땅에 붙일 시간이 없을 만큼만 강변을 야금야금 공격했다.
한마디로 무척 미적지근한 공격들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이 며칠 내내 이어지니, 차라리 패해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면으로 맞붙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게 되었다.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저들은 남궁세가를 갉아먹고 있었다.
콰앙!
“아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불과 이틀 전이었다면 모두가 그 비명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그리고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익숙해졌으니까.
집중력이 흐트러진 이가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피했을 포격에 얻어맞는 일쯤은 이제 매화도에서는 드물지 않은 광경이 되어 버렸다.
남궁도위가 일그러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창궁검대의 표정에 엿보이는 감정은 절망이나 분노 같은 게 아니었다.
무기력.
패기로 똘똘 뭉쳐 있던 얼굴은 이제 없다. 이역만리 먼 타국으로 끌려가 강제로 선창에서 노를 잡게 된 이들의 얼굴에 가깝다.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보이는 그 체념이 저 창궁검대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공격을 했어야 해.’
남궁황의 결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해한다 해서 그게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지?’
그리고 앞으론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순간 또 하나의 포탄이 섬으로 날아들었다. 남궁도위의 눈에 미처 그 포탄에 반응하지 못하고 힘없이 선 창궁대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뒤늦게야 지척에 날아든 포탄을 발견하고 창궁대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순간이었다.
머리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빛살처럼 달려들어 포탄을 쳐 낸 남궁도위가 이를 악물었다. 다급하게 검을 휘두르느라 내력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탓인지 검을 잡은 그의 손이 찢겨 붉은 피를 쏟았다.
“소, 소가주님…….”
턱!
남궁도위는 위기에서 겨우 벗어난 창궁대원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분명 욕설이 터져 나올 거라 생각한 창궁대원이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더 버텨라!”
하지만 남궁도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질책이 아니라 격려였다.
남궁황과는 확연히 다른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섬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를 악물어라! 우리는 남궁세가다! 싸우다 죽을 수는 있어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소가주!”
“기회는 반드시 온다!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만들겠다! 이곳에서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죽어 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궁도위가 피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를 믿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이 고통과 굴욕을 저들에게 그 이상으로 갚아 주는 순간까지!”
흐릿해졌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의 눈에 차츰 빛이 돌아왔다.
이를 악문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핏발이 선 눈으로 섬을 포위한 배들을 노려보았다.
으득.
남궁도위 역시 피가 비치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장강에 뜬 흑룡선을 노려보았다.
실로 당당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소매 안에 숨긴 그의 손끝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제발 빨리.’
겨우 되살린 이 미약한 불씨가 꺼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