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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38화 (939/1,567)

938화. 기대라도 하셨나? (3)

파아아앗!

단숨에 십여 장을 뛰쳐나간 법정의 발은 쉴 새도 없이 다시 땅을 박찼다. 앞을 가로막는 산을 순식간에 뛰어넘고, 흐르는 강을 단번에 건너며 그는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소림의 상징인 황색 승복을 입은 무리가 뒤따르고 있었다.

소림 삼백 무승.

그 광경에 위압을 느끼지 않을 이가 천하의 어디에 있겠는가? 소림의 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법정의 뒤를 따르는 무승들의 얼굴은 그 드높은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하나같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땅을 박차는 다리가 금방이라도 꺾일 듯 후들댔다.

“바, 방장!”

법정의 바로 뒤로 따라붙은 법계가 격한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법정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방장! 제자들이 더는 못 버팁니다.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그제야 법정의 고개가 뒤로 획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 어린 감정은 우려가 아니라 새파란 분노였다.

“속도는 줄일 수 없다.”

“낙오자가 발생할 겁니다!”

“상관없다!”

그 서슬 푸른 목소리에 법계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꽉 깨물린 법정의 입술이 그의 각오를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낙오하는 이는 두고 간다. 추후에 장강에서 합류하면 될 일!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장강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시급을 다투는 일이다!”

“하지만 방장! 기껏 장강에 도착한다고 한들, 제자들이 지쳐 싸울 수 없게 된다면 무용지물이 아닙니까!”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

법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곳에 남궁세가가 없다면 모를까, 남궁이 있는 이상 온전한 전력까지는 필요치 않다. 수로채를 압도할 정도면 충분하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니 잔말 말고 속도를 높여라!”

“……알겠습니다!”

법정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더는 안 된다.’

이미 실책을 여러번 저질렀다. 여기서 상황이 더 나빠진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대에서 소림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는 꼴을 더는 좌시할 수 없었다.

위기는 언제고 기회인 법.

지금의 상황은 최악이라는 말로도 부족했지만, 만약 소림이 제때 장강에 당도하여 저 수로채를 물리치고, 남궁세가를 구원해 낼 수만 있다면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 법정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절대 그래선 안 됐다.

‘더 빨리!’

저 장일소보다 먼저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전력이란 언제나 상대적이다. 소림의 힘으로 사패련 전체를 상대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가 수로채 하나라면?

굳이 공동이나 팽가를 기다릴 것도 없이, 남궁과 힘을 합치는 것만으로도 장강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거기까지는 어렵다 해도 남궁세가를 피해 없이 그 섬에서 탈출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그럼 뒷일은 다른 문파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려 처리하면 될 일.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만인방보다 먼저 장강에 도달하는 것이다.

“서둘러라, 당장!”

“예!”

황색의 선으로 화한 소림이 장강으로 달리고 또 달려갔다.

* * *

“그래서 말인데…….”

“…….”

슬그머니 이어지는 말에, 빵빵하게 부푼 볼이 가볍게 뒤틀리다 도로 부풀며 불뚝거렸다.

‘……터지겠는데?’

‘그래도 장문인 앞인데, 설마요.’

‘아냐. 곧 터질 것 같은데?’

하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볼때기가 점차 핏대와 함께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참는다, 참는다.’

‘오오.’

‘성장했구나, 청명아……! 이 사숙은 감격했다.’

청명의 안색을 살피던 현종이 나지막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이건 불가항력이 아니더냐.”

“…….”

“내가 가자는 게 아니라. 그…… 크흠. 명색이 우리도 정파인데 그래도 이런 일을 거절하는 건 좀…….”

청명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다탁에 놓인 한 장의 서찰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그래, 그래.”

“당 아저씨……. 아니, 당가주님이.”

“그렇지.”

“지원을 요청했다는 거죠?”

“정확하단다.”

현종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장문인께서는 가고 싶으시고?”

“크흠. 가고 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우리가 이미 합의했던 일이 아니더냐?”

“…….”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신의의 문제이니 어쩔 수가 없지 않으냐?”

이번엔 청명의 눈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현종이 슬쩍 고개를 돌려 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장문인이고, 까마득한 손윗사람이지만 이럴 때는 저놈 얼굴을 마주 보기가 무서웠다.

“끄으으…….”

청명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상황은 아주 간단했다. 청명은 장강의 일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화산의 입장은 청명이 아닌 현종이 정하는 것이지만, 청명에게 명분이 있는 이상은 현종도 제 마음대로 그 뜻을 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장강에서 날아온 한 장의 서찰이 현종에게 없었던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장강의……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데 인력이 더 필요하다?”

“그렇다는구나.”

청명이 양손으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끄으, 입이 방정이지! 요놈의 조동아리가 방정이지!”

그리고 손으로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려 대기 시작했다. 백천은 그 양을 가만 보다 턱을 살짝 긁적였다.

‘일이 이렇게 되네.’

일전에 청명은 당군악과 장강의 일을 논의하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무한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장강 유역에 사는 이들 중에는 적당히 지원해 주면 사천으로 옮길 사람도 있을 거예요.

당군악은 그동안 보살펴 온 양민들을 내버려 두고 사천으로 돌아가는 것에 경기를 일으켰다. 그래서 당가가 장강에서 철수하는 조건에 대한 합의로, 이주를 요청하는 장강의 양민들은 사천에 터를 잡고 살게 해 주기로 했었다. 화산은 그를 적극 지원해 주고.

당군악은 결국 청명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지금 한창 장강의 양민들을 사천으로 이동시키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니! 인력이 부족하다는 게 말이나 돼요? 사천당간데! 어? 당간데! 무슨 당가가 동네 친척들 모여 사는 곳도 아니고 인력이 부족하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았느냐?”

“아오! 그 망할 남궁 새끼들! 하여튼 도움이 되는 일이 없네! 내가 그 새끼들 그때 씨를 말려 버렸어야 하는 건데!”

조걸이 윤종에게 속닥속닥 물었다.

“쟤가 말하는 그때가 대체 언젭니까?”

“장강참변 때를 말하는 거 아닐까? 아니, 그보다 도사 놈이 저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역시 청명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윤종에게 눈이라도 한번 흘겼겠지만, 청명은 지금 그럴 만한 정신이 없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장강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수로채가 매화도를 점거하는 것은 예상했지만, 그 계획을 세울 당시만 하더라도 ‘그 미친놈’의 존재는 청명조차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예상치 못했던 변수의 발생과 함께, 상황이 그의 예상보다 족히 한 달은 더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원래라면 한 달 정도에 걸쳐서 원하는 이들을 모두 이주를 시킬 수 있었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장강의 상황이 바뀌었다. 시일도 앞당겨진 데다가, 상황이 나빠진 것을 양민들도 알게 되니 자연히 사천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들도 늘어난 모양이더구나.”

“…….”

“이 일에 우리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데다가…… 이 일은 당가의 이름이 아니라 천우맹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이 아니더냐? 내가 명색이 맹주인데, 천우맹의 일을 당가주께 던져 놓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장문인.”

“으응?”

“……그냥 가서 돕고 싶으신 거죠?”

“크흐흐흠.”

현종이 붉어진 얼굴로 크게 헛기침했다.

‘하여튼 이 양반은 양민 소리만 들으면 눈빛부터 달라진다니까.’

참 미련하다. 하지만…….

‘그게 좋은 거지.’

청명은 현종의 저런 미련함을 좋아했다. 아니, 더없이 존경했다. 몰라서 미련한 것은 멍청함이지만, 알고도 미련한 것은 대단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일단 지원 요청에는 화답하는 것이…….”

“…….”

청명의 표정이 여전히 뚱하니 애가 탄 현종이 덧붙였다.

“장강에서 뭘 하자는 건 절대로 아니다. 그냥 거기에 있는 양민들만 빨리 피신시키면 될 일이 아니더냐? 지금 장강으로 달려가고 있는 소림이나 다른 문파들이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있겠느냐?”

“……그 대머리는 평소에도 그런 건 신경 못 써요.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 그렇지. 주변머리가 없지.”

윤종이 조용히 백천에게 물었다.

“장문인께서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아실까요?”

“아시겠냐?”

“…….”

대머리에게 절대 던져서는 안 될 말을 엉겁결에 덩달아 내뱉은 현종이 다시금 넌지시 청명을 찔렀다.

“그러니 피해가 커지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겠느냐?”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생각도 못 했네.’

이번 전쟁은 생각 이상으로 크게 번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이들이 누구인가?

소림? 수로채? 남궁세가? 아니면 만인방?

천만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은 장강 인근에서 살아가는 양민들이다. 싸우는 강호인들은 자신들만의 목적이 있고 제 의지로 이 일에 끼어들었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가만히 잘 살다가 전화에 휩싸일 양민들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그러니 현종이 저리 나오는 것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안타까운 죽음을 하나라도 더 줄이기 위해서.

“청명아.”

“…….”

“청명아아.”

“…….”

“청명아아아아아!”

“아오! 알았어요, 알았어!”

청명이 화딱지가 난다는 듯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도끼눈으로 모두를 노려보았다.

“대신에! 무슨 일이 있어도 장강의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 거예요! 절대로! 심지어 그 새끼들이 먼저 공격해 오는 한이 있어도 나는 도망치지, 절대 안 싸울 거예요! 그 대왕 대머리 좋은 일은 죽어도 안 해요!”

“그럼, 그럼! 당연하지! 이건 어디까지나 양민들에 대한 구호가 아니더냐! 나도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요만큼도 없어!”

“쯧!”

불만 어린 눈으로 모두를 보던 청명이 퉁명스레 고개를 획 돌렸다.

‘멍청이들.’

양민들이 위험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눈빛부터 바뀌는 것들이다. 자기부터 생각하라고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했건만, 그의 말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 그게 화산이어야지.’

현종이 법정에게 한 말이 이런 의미일 것이다. 화산이 화산이기 위해서는 이 청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알았어요.”

“오!”

“가요. 가! 빨리 가서 사람들만 대피시키면 될 일이죠!”

“그래, 그래!”

“에이. 진짜! 뭔 일이…….”

청명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더 나오기 전에 현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현영! 현상!”

“예, 장문인!”

“제자들을 모두 준비시켜라! 바로 장강으로 출발할 것이다. 명심해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해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다!”

“예, 장문인!”

장내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화산의 장강행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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