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7화. 기대라도 하셨나? (2)
남궁황이 눈가가 실룩였다.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만, 조금 전에 들은 말에는 참을 도리가 없었다.
“식량이 없다고?”
“……예, 가주님.”
순간, 남궁황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화가 난다기보다는 황망했다.
“이곳은 장강을 오가는 상인들이 거하던 곳이다. 당연히 비축된 곡식들이 있을 텐데?”
“……녹림이 철수하면서 짐을 모두 빼 버린 모양입니다.”
“…….”
“그리고 수로채가 이곳을 다시 점거하면서 들고 온 곡식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궁명이 눈을 질끈 감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제가 이런 부분까지 모두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매화도를 점거한다는 명을 내린 것은 나다. 잘못이 있다면 내게 있겠지. 네가 고개를 조아릴 일이 아니다!”
남궁황이 딱 잘라 말하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식량이라…….’
상황만 놓고 봤을 땐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군사들에게 식량이 떨어진다는 것은 전쟁의 승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한 문제겠지만, 이들은 무인이니 먹지 않아도 보름 정도는 버티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건 평상시에나 가능한 일.’
이미 이곳에 있는 이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수로채의 지속적인 습격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심력을 꾸준히 갉아먹고 있다.
그런 와중에 식사마저 제대로 하지 못한다?
‘더 힘겨워지겠지.’
하나하나는 정말 사소한 문제들에 불과하다.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습격도.
멀리서 날아드는 포격도.
식량이 없다는 것도.
섬에서 빠져나갈 길을 잃었다는 압박감도.
적의 지원이 더 빠를 경우 불리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마저도.
그 하나하나만 놓고 봤을 때는 딱히 대단치 않다. 하지만 그 모든 요소가 모이고 모이니 어깨 위에 수백 근에 달하는 철근을 얹은 듯 버거워져 버렸다.
진창.
이곳은 진창이다. 악을 쓰고 빠져나가려 하면 더욱더 깊이 빠지고 마는, 늪과 같은 진창.
남궁황이 눈두덩을 주물렀다.
서로가 전력으로 맞붙는 전장에서 남궁황만큼의 활약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건 남궁세가가 아닌 다른 이들도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하늘을 꿰뚫는 검기도, 강을 갈라 버리는 패도도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곳은 강이 아니냐? 식량이 모자라면 보충하면 될 터.”
“……이미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 수적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섬 주변에 물고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남궁도위가 입을 열었다.
“설령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하더라도 저는 그걸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냐?”
“저들은 수적이고, 우리보다 강에 익숙하지요. 그런 이들이 무슨 짓을 해 올지 모릅니다.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조심하는 것이 맞습니다.”
남궁황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한 우려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이미 그 과한 우려를 하지 않아 이런 상황에 처했다.
“물은? 식수는 문제가 없나?”
남궁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흐르는 장강의 물을 오염시키는 것은 당가라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우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로군.”
남궁황이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좀처럼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던 피로가 짙게 묻어났다.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위장을 바늘로 쑤셔 대는 기분이지만, 아직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지원은 아직 멀었느냐?”
“……분명 서두르고 있을 겁니다.”
“그래야겠지.”
남궁황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꼴 좋구나.’
패기롭게 달려들어선 포위당해 말라 가는 모양새다. 그 와중에 소림의 구원이나 기다리고 있는 꼴이라니…….
“빌어먹을.”
남궁황이 작게 읊조리는 모습을 본 남궁도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옳은 대처인가?’
의문이 머리를 들었다.
물론 남궁명이나 남궁황의 판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들은 버티는 동시에 상대에게 대항할 힘을 점점 잃어 가고 있다.
이대로 며칠만 더 지나면 버티는 것밖에는 할 수 없어질 것이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순간 남궁도위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는 다름 아닌 화산검협 청명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참고 버티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만약 이곳에 있는 이들이 남궁세가가 아니라 화산이었다면 결코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화산검협이라면…….’
바로 그때였다.
벌떡!
의자에 앉아 있던 남궁황이 벼락같이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춤에 찬 검을 단숨에 뽑았다.
“이!”
그는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뿜어져 나간 백색 검기가 전각 지붕을 부수며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가공할 폭음이 울려 퍼지며 넝마가 된 지붕이 통째로 날아갔다.
콰앙! 콰아앙!
콰아아아앙!
연이어 폭음이 쏟아졌다.
처음의 것이야 남궁황의 검기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뒤이어 터진 것들은 그의 검기와 관련이 없었다.
포격이었다.
섬의 중앙, 그들이 있는 곳까지 포격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전각들이 연이어 터져 나갔다. 잔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아아아아악!”
“뭐, 뭐야! 왜 여기에 포격이!”
콰아아아아앙!
당황한 이들이 질러 대는 고함과 비명이 포탄이 충돌하는 소리와 뒤섞여 울려 퍼졌다.
“막아라! 포탄을 쳐 내!”
남궁황이 크게 사자후를 터뜨리고는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리고 머리 위로 날아드는 포탄들은 단숨에 갈라 터뜨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상황을 파악한 장로들도 빠르게 남궁황을 따라 포격을 막아 냈다.
가주와 장로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자 포격을 막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포격을 모두 막아 낸 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참상이라는 표현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는 광경이었다.
박살이 난 전각과, 포격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신음하는 이들.
무너진 전각에 깔려 있다 겨우겨우 기어 나온 이들이 분을 참지 못하여 울부짖고, 그 와중에 부상자를 치료하는 이들은 시급히 필요한 물품을 찾으며 악다구니를 써 댄다.
으드드득.
남궁황의 이가 부러질 듯 갈렸다.
“……경계를 맡은 이들은 배가 섬에 이토록 가까이 접근할 동안 대체 무엇을 한 것이냐!”
“아, 아닙니다. 가주님.”
“뭐?”
남궁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배, 배는 제 위치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남궁황이 고개를 돌린다. 그의 눈에도 어둠이 내린 강 위에 떠 있는 배들이 보였다. 분명 그 거리는 낮과 다르지 않았다.
“……그럼 이 포격은 대체 뭐냐?”
“배, 백뢰포 같습니다.”
“……백뢰포?”
남궁명이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뢰포의 사거리는 일반 화포의 세 배에 달합니다. 아무래도 저들이 섬에서 탈취해 간 백뢰포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우드드득.
남궁황은 손이 터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흑룡왕! 이 개 같은 놈이!”
머리에 피가 몰려 혼절할 것만 같았다. 휘몰아치는 노기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대놓고 공격을 받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럼…….”
남궁도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저만한 거리에서도 쉴 새 없이 포를 쏘아 댈 수 있다는 말이군요.”
“……포탄과 화약에 한계가 있으니 계속 쏘아 댈 수는 없을 것이다.”
“보충하면 그만 아닙니까.”
“…….”
남궁명도 이 말에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상황을 보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좋게 해석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가주님.”
남궁도위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남궁황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저희는 몰살당할 겁니다.”
“……도위.”
“언제 올지 모르는 지원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전각을 잃었습니다. 포격은 쉴 새 없이 날아올 것입니다. 날아드는 포격을 대비해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는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체력이 바닥날 겁니다.”
남궁명이 남궁도위에 반박하고 나섰다.
“사흘이면 소림이 도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예, 그렇겠죠. 하지만 그 전에 수로채가 공격을 감행해 온다면 어쩌실 겁니까?”
“…….”
남궁명이 입을 다문다.
사흘을 버틸 수 있다는 말이 곧 사흘 동안 지금의 전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소림이 사흘 내로 도착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주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
남궁황이 타오르는 시선으로 남궁도위를 보았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
“일전에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
“음?”
남궁도위가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본다.
“가주님 혼자라면 저 포위를 뚫고 강에 닿을 수 있다는 말씀, 분명합니까?”
남궁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연히 가능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느냐! 저 포위를 뚫고 뭍에 닿는다 해도 달라질 게 없다. 오히려 이곳만 위험해질…….”
“뭍이 아닙니다.”
“음?”
남궁황이 순간 남궁도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남궁명은 남궁도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곧장 이해한 듯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서, 설마?”
“예.”
남궁명의 반응에 남궁도위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놓인 건, 검디검은 강 위로 반쯤 어둠에 휩싸여 있는 거대한 선박이었다.
위압적일 만큼 검게 칠한, 거대한 배.
“흑룡선…….”
남궁명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궁도위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주님께서 섬을 비우면 이 섬에는 흑룡왕을 상대할 이가 없습니다.”
“…….”
“그럼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의 목소리엔 예기가 어려 있었다.
“우리가 역으로 흑룡왕을 치는 겁니다. 강을 건너 흑룡선을 공격하고 흑룡왕의 목을 베어 낼 수만 있다면, 포위 같은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남궁황의 두 눈이 더없이 커졌다.
“창천은 두려움을 모르고, 움츠리지 않습니다. 이대로 얻어맞다 쓰러질 바에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격을 하는 게 옳습니다.”
“도위…….”
남궁도위의 칼날 같은 시선이 흑룡선으로 향했다.
‘그라면 분명 이렇게 했을 것이다.’
과거 장강참변 때, 화산검협 청명은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장일소의 목을 취하려 달려들었다. 그 불리한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모든 계략의 중심인 장일소를 처치하는 것밖에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상대하는 이들이 수로채라면, 수로채의 핵심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제가 아버님을 보좌하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는 오직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가주님! 결단을!”
남궁도위가 남궁황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남궁황이 입술을 깨물었다.
“……불가(不可).”
“가주님!”
남궁도위가 놀란 눈으로 남궁황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제안을 거절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이다.
“나는 무인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남궁세가의 가주다.”
“…….”
“실패하면 모두가 죽을 게 분명한 작전을 시행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면…….”
“버텨라!”
“…….”
“소림은 반드시 온다. 소림만 도착하면 저 벌레 같은 수적 놈들을 찢어 죽이고 그 살을 씹을 것이다! 그때까지…….”
으드득!
질끈 물린 남궁황의 입술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틴다!”
“……알겠습니다.”
남궁도위가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가주의 명은 절대적인 법이다. 한번 결정을 내린 이상 더 이상의 반론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라면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깊디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