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6화. 기대라도 하셨나? (1)
“방장.”
법정은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짓던 때도 있었건만, 그는 이제 웃는 법을 잊기라도 한 사람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침묵만 지켰다.
그럴 수밖에.
호언장담하고 떠났거늘 화산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그에게는 더없이 치욕적인 일이었다.
소림에서 그의 복귀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낯을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남궁이 포위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듣게 된 이 소식은 더욱 법정을 아예 벙어리로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멍청이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이 조금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순간 텅 비어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으니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 중, 가장 최악의 결과가 지금 그에게 들이밀어졌다.
“쯧.”
그런 법정을 보던 자오개가 짧게 혀를 찬다.
딱히 악의 없는 버릇 같은 행위지만 그 짧은 혀 차는 소리가 법정의 폐부를 뒤틀어 놓는다.
“차라리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장강으로 바로 가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
그 말이 사실 법정을 은근히 비꼬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법정에게 그 사실이 중요하겠는가? 지금 그는 자신의 실책을 지적당하는 일이 세상 그 무엇보다 수치스럽고 두려웠다.
“……아미타불.”
길고 긴 침묵 끝에 그가 내뱉은 말은 결국 짧은 불호에 불과했다.
잠자코 반응을 기다리던 팽엽이 결국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퇴로가 끊겼다면 버티는 것이 고작일 터, 사패련이 먼저 도달하게 된다면 남궁세가의 이름이 강호에서 사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으음.”
누군가의 무거운 침음성이 그 말에 동조하는 듯 울려 퍼졌다.
“당장 장강으로 가야 합니다.”
팽엽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던 종리형조차 이 말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상황이 그만큼이나 급박해졌다는 증거이리라.
“방장.”
눈을 감고 있던 법정이 팽엽의 재촉에 눈을 떴다.
“……그리할 것입니다.”
법정의 두 눈에서 새파란 빛이 흘러나온다.
“상황이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더는 망설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소림의 모든 무승을 이끌고 장강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 계신 분들께서도 각 문파의 전력을 동원해 주십시오.”
종리형이 놀라 되물었다.
“바, 방장. 전면전을 치르실 생각이십니까?”
“……필요하다면 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종리형이 하고자 하는 말은 뻔했다.
이곳에 있는 문파들만으로 사패련과 전면전을 치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설사 운이 좋아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법정이건만, 이번만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각 문파에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다시 보내겠습니다.”
“……그런다고 한번 발을 뺐던 이들이 마음을 돌리겠습니까?”
“상황이 달라졌으니 그들도 선택해야겠지요.”
“…….”
종리형이 입을 닫았다.
뭔가 법정의 어투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딱히 강압적인 어조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전과 달리 말을 섞기가 껄끄러웠다.
“……당가라도 나서 준다면 조금은 쉬워질 터인데.”
아쉬운 마음에 툭 나온 종리형의 넋두리가 들려오자 법정의 눈썹이 꿈틀했다.
“없는 이들을 찾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도 이제는 아셔야 합니다.”
법정이 차가운 눈으로 일갈했다.
“그동안 제가 참아 온 것은 일을 순리대로 풀기 위함이었지, 결코 소림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상황이 좋지 않게 흐른다면 때로는 강제로 순리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겠지요.”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그저 공허하게만 들리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차라리 조금 더 일찍 결단을 내렸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법정이 칼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체 없이 장강으로 갈 것입니다. 무엇보다 속도가 중요합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선택권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남궁세가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소림이 진정으로 천하의 북두를 자처한다면 모든 것이 소림의 책임이라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남궁이 장강에 고립된 채 패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구파에 대한 민심은 정말 나락으로 처박힐 것이다. 적어도 남궁은 사파와 싸우기라도 했는데 구파가 그를 외면한 셈이 될 테니까.
“서둘러 주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저 패군이 장강에 당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도착해야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종리형이 걱정스레 묻자 법정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만인방이 있는 광서보다 이곳에서 훨씬 더 가깝지 않습니까? 패군이 소식을 듣고 바로 움직인다 한들, 우리보다 빨리 당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종리형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꾸로 생각하면 남궁세가가 수로채를 잡아 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장강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로채를 소탕하는 것은 어려운 일. 하지만 그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면 더없는 기회가 됩니다. 이 기회에 남궁세가와 양쪽에서 수로채를 합공할 수 있다면 이 전쟁의 승기는 단번에 이곳으로 넘어올 것입니다.”
법정이 웅혼한 목소리로 단호히 외쳤다.
“그러니 즉시 움직이십시다.”
팽엽이 즉각 호응하고 나섰다.
“그러겠습니다.”
종리형은 여전히 살짝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발을 뺄 수는 없어서 결국은 동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가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
“방장. 방장의 말씀에 따르기는 하겠습니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가능성도 감안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다른 구파의 지원을 이끌어 내실 거라 믿겠습니다.”
그 말에 법정이 고개를 돌려 종리형을 바라보았다.
“…….”
잠시의 침묵. 그리고 이내 감정 없는 목소리가 종리형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하겠습니다.”
돌아온 것은 분명 긍정의 대답이나, 종리형은 어쩐지 조금 전의 그 답이 부정 같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할 도리가 있겠는가? 결국 불안한 마음을 안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동도 함께하겠습니다.”
법정의 시선이 자오개에게로 향했다. 자오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그리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당장 문파로 돌아가셔서 준비를 마친 뒤 구강으로 집결하여 주십시오.”
“예, 방장.”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예!”
“그럼.”
앉아 있던 이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밖으로 나간다. 마지막으로 엉덩이를 뗀 자오개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상석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는 법정의 모습이 보였다.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는 끝도 없이 망설이더니, 막상 신중해야 할 때는 답을 정해 놓고 움직이는군.’
그는 법정을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소림의 방장으로서 강호의 큰 어른으로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역할을 잘해 왔다. 특유의 온화한 성정으로 각 문파 간의 갈등을 무난하게 조율해 왔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치세에는 성군인 이가, 난세에는 암군이 되기도 한다더니.’
세상이 급변하기 시작하자 그 법정의 장점들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법정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오개가 끝내 그의 의견에 반대를 표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지옥이겠지.’
남궁세가, 그들이 겪고 있을 참상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발 버텨 주시오. 남궁가주.’
가슴에 협의라는 두 글자를 새긴 자오개가 바람처럼 개방의 본단을 향해 내달렸다.
* * *
남궁명은 제 앞에 쓰러져 있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서서히 악귀같이 일그러졌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이는,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이였다.
모든 남궁세가의 가솔들은 그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지금 그 가족 같은 이들 중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이……!”
그는 치미는 노기에 이를 뿌득뿌득 갈아붙였다.
시신의 옆구리에 박힌 독도(毒刀)가 그의 눈을 찔러 대는 것만 같다.
자그마치 아홉 번이다. 지난 사흘간 습격을 당한 횟수가 말이다.
피해자는?
전무(全無).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누구도 죽지 않았다. 습격한 이들은 강 속에서 튀어나와, 주변을 경계하는 이들을 공격하려다 되레 죽어 나갔다.
하찮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가소로웠다. 발이 땅에 닿는 곳에서는 수로채에 질 이유가 없다는 남궁황의 말이 사실이란 게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이건 결과만 놓고 봤을 때다. 만일 그렇게나 모든 일이 원활하기만 했다면 남궁명이 지금 이렇게 노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 습격을 격퇴했을 때는 모두가 용기백배해 사기를 끝도 없이 끌어 올렸다. 두 번째 습격을 막아 냈을 때는 이럴 게 아니라 자맥질을 해서 적의 배에 접근해 공격을 시도해 보는 게 어떠냐는 주장마저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습격을 격퇴했을 때, 남궁명은 깨달았다.
습격이 이어진 이틀 동안 제대로 눈을 붙인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고도 습격은 이어졌다.
야음을 틈타기도 했고, 훤한 대낮에 대놓고 들이닥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새벽의 이슬이 내려앉을 때, 짙은 노을이 강을 물들일 때…….
습격은 때를 막론하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용맹하게 그들의 습격을 연이어 격퇴했지만, 조금 전 벌어진 습격에서 마침내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창고를 하나 비우고 시신을 옮겨라.”
“대주님. 우선 가매장을 하는 것이…….”
남궁명이 날카로운 시선을 획 돌렸다.
“수적 놈들의 땅에서 이 녀석이 잠들 수 있겠느냐?”
“……죄송합니다.”
남궁명은 이를 갈며 말했다.
“며칠만 버티면 이 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시신을 수습해 떠나면 된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해라.”
“예.”
동료의 시신을 옮기는 이들을 보며 그는 눈가를 꾹 눌렀다.
‘빌어먹을.’
강하지 않은 상대다. 아니, 허접하기 짝이 없는 쓰레기에 불과한 적이다.
그럼에도 사상자가 나오고 말았다.
연이은 습격으로 극한까지 몰리다 보니, 평소였다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 섬은 넓다. 수백 명이 동시에 거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동시에 이 섬은 좁다. 수적들이 발을 들이면 섬의 반대편까지 내달리는 데, 일다경도 걸리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그들은 성벽이 무너진 성안에 갇힌 채, 외적들의 침입을 방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차라리 그게 백배는 나은 상황이지.’
그런 경우라면 최소한 적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적이 어디에서 공격해 들어올지 전혀 알 수 없다. 어쩌면 지금 남궁명이 바라보고 있는 저 물밑에서도 수적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누구도 쉬이 쉴 수 없었다. 언제 수적이 쳐들어올지 모르고, 언제 방어가 뚫려 그들의 숙소로 수적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머리로는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극한까지 오른 긴장감은 그들에게 한순간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콰아아아아앙!
“제기랄!”
“소용도 없는 걸 왜 저리 쏴 대는 거야! 개자식들이!”
섬을 포위한 수적선들은 때때로 섬으로 슬금슬금 접근하며 화포를 날려 댔다. 물론 단련된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저 먼 거리에서 날아든 화포에 당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몸을 숨길 곳이 없는 섬이다.
신경을 쓴다면 피할 수 있지만, 피하지 못한다면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포격이 시시때때로 불시에 날아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완전히 긴장을 풀 수 있겠는가?
‘이러다가는 검을 휘둘러 보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자멸한다.’
저 수적 놈들은 몸이 아닌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가장 괴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반드시 지원이 올 것이다!”
“……예.”
대답이 크지 않다. 처음 습격을 막아 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던 사기는 이미 바닥에 처박힌 뒤였다.
이제 남은 건 그저 버티는 것.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남궁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또다시, 끝없이 긴 밤이 매화도를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