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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33화 (934/1,567)

933화. 벌써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죠. (3)

배라는 건 의외로 그리 쉽게 침몰하지 않는다.

배 아래에는 층마다 공간이 있다. 그러니 바닥에 구멍이 뚫려 기울고 비틀린다 해도 배 전체가 물 밑으로 가라앉을 때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게 보통이다.

그게 평범한 이들의 상식이다.

하지만.

쿠르르르릉!

지금 그 상식이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있다.

대체 어디를 어떻게 공격한 것인지, 저 커다란 배가 순식간에 물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검디검은 물이 마치 집어삼키듯 배를 끌고 들어가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공포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배, 배가…….”

차라리 누군가 그들을 공격해 왔다면 이토록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겐, 사람을 두고 배가 먼저 공격당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충격이었다.

누군가가 퍼뜩 정신을 차린 건 굉음과 함께 두 번째 배가 기우뚱 옆으로 넘어간 순간이었다.

“마, 막아! 이 빌어먹을! 빨리 막으라고!”

고함이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들이 배를 다급히 보았다.

그래. 막아야 한다. 이대로 두면 모든 배가 침몰할 테니까.

하지만 뭘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날아와 배를 침몰시키는 공격을 무슨 수로 막으란 말인가?

“뛰어들어! 물 안에서 수적 놈들이 공격한다!”

어디나 판단이 빠른 이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은 생각이 느린 이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곤 한다. 명쾌한 해답을 들은 이들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물로 달려들었다.

경공을 펼쳐 날아든 이들이 포탄처럼 수면에 부딪쳤고, 거대한 물보라가 연신 솟구쳤다.

이 광경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장관이라며 박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를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쿠르르르릉!

그 순간 또 한 척의 배가 굉음과 함께 기울더니 커다란 포말을 일으키며 아래로 빨려들어 갔다.

“이 개자식들아아아아!”

창궁검대의 엽상(葉常)이 고함을 내지르며 수면으로 몸을 내던졌다.

풍덩!

물속으로 뛰어든 엽상의 몸에 커다란 충격이 전해졌다. 물에 뛰어드는 속도가 빨랐던 만큼, 수면을 통과하는 충격도 컸다.

그를 정말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그의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암흑천지(暗黑天地).

이 어두운 밤의 강물 속은 그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컴컴했다.

무공으로 단련된 안력으로도 한 치 앞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농도 짙은 어둠. 이를 맞닥뜨린 순간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일었다. 실로 극복하기 쉽지 않은 공포였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엽상에게 그 공포를 깊이 만끽할 시간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푸욱!

무언가가 가슴과 아랫배를 섬뜩하게 파고드는 감각 앞에서 공포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니까.

엽상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벌어진 입으로 시커먼 물이 쉴 새 없이 밀려들어 위와 폐를 채우기 시작했다.

“꾸르르륵.”

벌어진 입으로 기포가 쏟아졌다. 가까스로 어둠에 조금 익숙해진 눈이 가슴과 배에 박힌 기다란 것의 정체가 수적들의 작살이란 걸 확인했다.

“꾸륵.”

하지만 그뿐.

겨우 윤곽을 구분해 가던 그의 시야는 다시 급격하게 어둠으로 물들었다.

너무도 깊고 깊은, 죽음이라는 어둠으로.

움직임이 멎어 버린 엽상의 시신이 부유하듯 수면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엽상뿐 아니라, 성급하게 물로 뛰어들었던 이들이 몇 구의 시신이 되어 동시에 올라왔다.

물속이 아니었다면……. 아니, 물이라 해도 이런 밤중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둠에 잠긴 강은 그들에게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숨 쉴 수 없는 곳에서는 그들이 익혀 온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다급한 마음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장을 고를 여유를 찾지 못했던 이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소아야아아아아! 남궁소!”

“으아아아아아!”

떠오르는 시신들을 보며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콰르르르릉!

희망이라고는 모조리 앗아 가겠단 듯 또 한 척의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남궁세가 검수들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또…….’

이제 저 요동치는 물 위에 제대로 떠 있는 배는 오직 한 척이다.

저것마저 잃으면 그들은 이 섬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완전히 잃게 된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물속으로 뛰어든 이들이 삽시간에 시신이 되어 떠오르고 있는데 누가 감히 호기롭게 뛰어들 수 있단 말인가?

“비켜! 내가 간다!”

그때 등 뒤에서 노기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사람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헉!”

“소, 소가주!”

“위험합니다!”

강으로 뛰어든 남궁도위의 뒷모습을 보며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대경하여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강 아래 물고기를 노리는 비조처럼 뛰어든 뒤였다.

솟구치는 물보라와 함께 남궁도위가 단번에 모습을 감추었다.

가문의 후계인 소가주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더없이 물속으로 뛰어드니 그를 본 검수들의 두 눈이 벌겋게 불타올랐다.

“소가주를 지켜라!”

“배도 소가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남궁의 이름에 두려움 따위는 없다! 가자!”

강가를 지키던 검수들과 뒤늦게 달려온 창궁검대의 검수들까지 모두 용기백배하여 남궁도위의 뒤를 따랐다. 잠깐이나마 멈칫했던 것이 부끄럽다는 듯.

그들의 등 뒤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거기가 아니야아아아아아아!”

물로 달려들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달려온 남궁명이 한눈에 보기에도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래고래 고함치고 있었다.

“배, 배가 아니다! 부두! 부두를 지켜라! 선착장을 지켜야 한다!”

“예?”

“선착장! 선착장이라고 하지 않느냐! 배보다 먼저 선착장을…….”

콰아아아아아아앙!

그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솟구친 물기둥이 강가에 길게 건설된 선착장을 휘감았다. 그 여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목재가 마치 폭죽처럼 강 위로 튀어 올랐다.

콰아아아앙!

“아…….”

남궁명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물들었다.

치솟은 물기둥이 선착장에 배치되어 있던 백뢰포를 집어삼키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안…돼…….”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콰아아아앙!

동시에 그들이 마지막으로 지키려 했던 배마저 끝끝내 폭음과 함께 물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남궁명은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넋이 아주 나가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괴이할 정도로 길게 이어진 선착장과, 그곳에 설치된 백뢰포.

이 매화도를 방어하는 핵심은 바로 이 둘이다. 선착장은 그들이 발을 디디고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땅을 만들어 주고, 육지와의 거리를 좁혀 생존을 도모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백뢰포는 그 생명줄인 선착장으로 접근하는 배를 완전히 차단하는 유일한 방어선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싸울 수 있는 땅과 배의 접근을 막아 낼 무기를 모두 잃었다. 심지어는 그들의 발이 되어 줄 배마저도.

‘자, 잠깐 무기?’

남궁명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소란을 듣고 일제히 몰려오는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보였다.

“오. 오지 마!”

남궁명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자리를 지켜라, 빌어먹을! 이 멍청한 자식들아! 섬 주변에 배치된 백뢰포를 지켜야 한다! 돌아가! 당장 돌아가아아아아!”

그 외침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늦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여 황급히 되돌아간 무사들이 맞닥뜨린 건, 이미 철저하게 파괴된 포대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 백뢰포뿐이었다.

“이, 이런…….”

다른 곳도 모두 마찬가지.

수적들은 그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가기만을 기다렸다가 단숨에 물 안에서 뛰어올라 포대를 부숴 버리고 유유히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어둠과 물.

그 두 가지를 제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이들을 상대로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검은 무용지물이었다. 상대를 마주할 수가 없는데, 그 검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찢어지는 가슴으로 남궁명에게 돌아간 이들이 그 자리에 부복했다.

“대, 대주. 포대가 파괴되었습니다.”

“저희가 포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

첨벙. 첨벙.

물 밖에 나온 남궁도위 역시 섬의 상황을 보고는 참담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놓쳤습니다.”

연이은 비보에 남궁명은 황망한 눈으로 섬을 돌아보았다.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을 모조리 잃었다. 선착장도, 배도, 백뢰포도.

이곳은 이제 더는 매화도라 할 수 없었다.

수적에게 대항할 무기를 잃고, 수적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던 선착장을 잃은 매화도는 그저 강 한가운데에 떠 있는 커다란 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제 남궁세가는 그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당했다. 그것도 완벽하게.

경계에 소홀했던가? 아니다.

그렇다면 적을 얕봤던가? 그것도 결코 아니다.

그들이 이토록 철저하게 당한 이유는 이곳이 강 한가운데 있는 섬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흉포한 사자라고 한들, 어둠이 내린 강 위에서는 악어의 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당했군.”

등 뒤에서 들려온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남궁명이 이를 악물었다.

“가, 가주님.”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이 덜덜 떨렸다.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 남궁황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세 개의 수급(首級).

수적의 것이 분명한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남궁명은 무릎을 꿇고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조아렸다.

“가주님! 소제가 불민하여 일을 그르쳤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멍청한!”

그 꼴을 본 남궁황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고개를 들어라! 남궁세가의 식솔은 결코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가, 가주…….”

“무엇이 문제더냐? 배? 화포? 선착장? 그따위를 잃은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이냐!”

“…….”

“우리가 발을 잃었다 한들, 저놈들은 이 섬으로 단 한 발짝도 들어올 수 없다! 이 제왕검 남궁황이 지키는 땅에는 단 한 놈의 수적조차 들이지 않을 것이다.”

남궁황이 과격하게 검을 뽑아 들고는 외쳤다.

“수적이든 흑룡왕이든 마찬가지다! 잔재주를 피우는 물고기 놈들 따위는 결코 남궁세가의 검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 주면 된다! 알겠느냐?”

“예!”

그 웅혼한 호령에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용기백배하여 대답했다.

단숨에 떨어진 사기를 끌어 올린 남궁황은 굳은 얼굴로 검디검은 강물을 슬쩍 바라보았다.

‘……좋지 않군.’

허세를 부려 떨어지는 사기를 잡아 두기는 했지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상황이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휩쓸리기 시작했다.

마치 강 한가운데 생겨난 와류로 빨려들어 가는 조각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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