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1화. 벌써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죠. (1)
“여튼 그러니까!”
청명이 더없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지금 당장은 소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요. 그 새끼들도 지금 장강 일 처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장강을 어떻게 수습한다고 해서 여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에요. 사패련이 두 눈 뜨고 뻔히 살아 있는 이상은 그 새끼들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윤종이 슬쩍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쟤 뭐 하는 겁니까?”
“음.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빡쳐서 생각 없이 질러 놓긴 했는데, 돌이켜 보니 뭔가 좀 실수한 것도 같고, 그렇다고 이제 와 내가 잘못했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하겠으니,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상황을 좋게 포장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란다.”
“역시 간명하시네요.”
이럴 때는 확실히 권위자(?)의 말이 도움이 된다.
“아니, 포장이 아니라 정말 상황이 그렇다니까!”
“……그래.”
“아뇨! 장문인 내가 말을 꾸며 내는 게 아니라!”
“그래……. 그래, 알았다.”
“와, 나 진짜 돌겠네! 거지 아저씨!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크흠.”
내내 구석에서 전병을 씹어 먹던 홍대광이 재빨리 입 안에 든 걸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뭐…… 의도는 좀 불순해 보이지만, 어쨌든 화산검협의 말이 그리 틀린 건 아닙니다.”
“으응?”
그새 삼 년은 늙어 버린 현종이 슬그머니 홍대광을 돌아보았다. 귀가 쫑긋쫑긋하는 것을 보아 홍대광의 말은 들어 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본 청명이 ‘내 말이 거지만도 못하다니!’라고 쫑알댔지만 물론 그 말이야 현종의 귀 앞에서 걸러져 들리지도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니고?”
“하하하, 장문인도 참.”
홍대광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도 뭐 상황이 상황 같아야 할 수 있는 거지요. 제가 설마 장문인과 화산검협이 소림 방장을 그렇게 면전에서 들이받아 버릴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살면서 생각도 못 해 본 상황이라 말을 지어낼 엄두도 못 내겠습니다. 하하하하.”
“크, 크흠!”
“에헤헴!”
현종과 청명의 입에서 동시에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은 홍대광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문 상황이긴 하지.”
“아암. 많이 드물지.”
“전례가 없는 일 아닙니까?”
“시끄럽다!”
“시끄러워!”
문파의 최연장자와 최연소자가 편을 먹고 다른 이들을 핍박하고 있었지만, 그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것도 화산이리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현종이 무거운 음성으로 청명을 향해 물었다.
“당장은 장강에서 벌어진 사태와 사패련의 존재 때문에 소림이 뭘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이거냐?”
“네.”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댈 것도 없어요. 상황이 그리 녹록했으면 저 엉덩이 무거운 양반이 이 섬서까지 헐레벌떡 뛰어왔겠어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은 거짓이 아니었단 거구나.”
“말하자면 그렇긴 하죠. 여하튼 악감정이니 뭐니 해 봐야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예요. 당장 장강에서 싸움 나는 걸 해결하는 데도 정신이 없을 건데.”
청명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저놈들이 붙어 싸우는 걸 지켜보면서 전병이나 먹으면 된다니까요?”
“흐으음.”
현종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이 반쯤 적으로 돌아선 것은 무척이나 좋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건 지금 당장 문제가 벌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다행이었다.
다만 한 가지 근심이 풀리고 나니, 잠시 미뤄 두었던 다른 근심이 머리를 들었다.
“청명아.”
“네?”
“전쟁을 막을 방도는 없느냐?”
“흐으으음.”
청명이 살짝 묘한 시선으로 현종을 가만 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아 현종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나서자는 말이 아니다. 그저 궁금해서 하는 말이란다.”
“네. 그러시면 뭐.”
청명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장일소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전면전인가, 아니면 국지전인가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단 장강에서 벌어질 전투는 막을 방도가 없을 거예요.”
“……지금이라도 남궁세가가 물러나면 되지 않겠느냐? 네 말대로 방장께서 남궁가주를 설득할 수도 있는 일 아니냐?”
“장문인.”
“으응?”
“미친놈이 왜 미친놈인 줄 아세요?”
청명이 씨익 웃으며 부연하려는 순간 현종이 청명을 물끄러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구나.”
“네?”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이겠지.”
“…….”
“그래, 그래.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왜 아시는데요? 저 아직 제대로 말 안 했는데요?”
“크흠. 글쎄다……. 절로 알게 되는구나.”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이해하는 건 참 좋은 일이지만 그 이해 과정 내내 빤히 바라봐 오는 것은 뭔가 기분이 요상했다.
“아무튼…… 네. 말이 안 통할 거예요.”
청명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방장이 남궁가주를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인덕을 갖췄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고요.”
조걸이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그건 방장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냐? 아니면 그 남궁가주님이 너무 막 나가는 사람이라 벌어지는 일이냐?”
“흐음. 어려운 질문인데……. 반반 아닐까? 아니지, 아니지. 대왕 대머리 잘못이 더 큰 걸로 하자.”
딱히 법정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그리 말한 게 아니었다.
만약 이 사태를 총괄하는 사람이 법정이 아니라 청문이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상상해 본 것뿐이다.
뻔하지.
보나 마나 ‘허허허. 가주님. 잠시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하며 질질 끌고 와서는 아름다운 훈계와 드높은 협심으로 사람을 감화시켰겠지.
물론 그 정체는 지옥 같은 잔소리와 까불면 들이받아 버리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이지만, 어쨌든 원하는 바는 얻어 내도고 남았을 것이다.
예전에도 청문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당사자와 일대일로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사태를 해결할 때가 많았다. 물론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청명을 옆에다 앉혀 두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겨워 죽을 것 같은 사람을 자꾸만 툭툭 건드려 굳이 짜증을 내게 만들면서…….
어? 잠깐 이거…….
‘여하튼.’
남궁황인지 남궁왕인지도 법정 앞에서나 미친개지, 청문 앞에 있었으면 말 잘 듣는 강아지일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이니까.
그러니 청명의 입장에서는 이 사태의 책임을 법정에게 묻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무능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른 이가 무능한 것은 죄다.
“그럼 결국 전쟁은 벌어지겠구나.”
“네. 그럴 확률이 높아요.”
“그럼 일단은…….”
현종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우리와 소림의 사이가 벌어졌다고는 하지만, 이왕이면 구파 쪽이 승기를 잡는 쪽이 좋지 않으냐? 사패련이 우세를 잡는다면 장강을 살아가는 이들이 겪을 고통이 너무도 클 테니까.”
“흐음. 그런데 그게…….”
“응? 생각이 다르더냐?”
“아뇨. 생각이 다른 게 아니라…….”
청명이 손가락으로 볼을 긁어 댔다.
“장문인의 말씀이 틀린 건 없는데, 그렇게 되질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지금 선봉에 선 곳은 남궁세가 아니더냐? 지난 삼 년간 칼을 갈아 온 그들이 단번에 수로채를 무찌르고 승기를 잡았으니 한동안은 이 기세가 이어질 것 같지 않으냐?”
“남궁세가가 강북에서 멈췄다면 그랬겠죠. 그런데 지금 그 미친놈들이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잖아요?”
“…….”
“그건 적진에서 싸우겠다는 거죠. 제가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 봐서 아는데…….”
“……네가 언제?”
조걸이 딴죽을 걸려고 하자 백천이 묘하다는 듯 턱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문지르며 대답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저 새끼는 산에서 산적을 토벌하고, 물에서 수적을 토벌하고, 절벽에서 추락하며 장일소랑 싸운 놈이니까.”
“……그러네.”
하, 이 새끼들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백 년 전에 어?
산전, 수전, 공중전에 지하전과 수중전까지 다 섭렵하신……! 어?
“그, 물에서 수공을 익힌 놈들과 싸운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거든요?”
“하지만 일전에 장강에서 싸울 때는 그 부분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잖느냐?”
“그놈들이 물에서 싸울 생각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으으음.”
현종이 이해가 갈 듯 말 듯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청명도 이 미묘한 차이를 말로 다 풀어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고.
“지켜보면 알게 될 거예요. 뭐 저도 남궁세가에는 별로 나쁜 감정이 없어서 이왕이면 그쪽이 이겼으면 좋겠는데…….”
윤종이 백천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악감정이 없다는 놈이 소가주의 낭심을 걷어차서 고자로 만들려고 했으면, 대체 인성이 얼마나 썩은 겁니까?”
“……그러려니 해라. 청명이잖느냐.”
근데 저것들이?
청명이 오검들을 한번 매섭게 쏘아보았다.
“끄응. 여하튼 간에……. 사실 지금 문제는 전쟁이 나느냐가 아니에요.”
“으음?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문제는 전쟁의 방식이죠. 남궁세가가 단순히 패하는 선에서만 끝나면 별문제가 없는데…….”
청명의 표정이 묘해진다.
“그게 아니라면 문제가 심각해져요.”
“…….”
“아니, 어쩌면…….”
청명의 입가가 뒤틀렸다.
“벌써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죠. 흑룡왕이 그리 느긋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 * *
깊은 어둠이 내린 장강.
“흐음.”
그 강변에 한 사람이 서서 강 가운데를 응시했다. 분명 드넓은 강의 가운데거늘 마치 커다란 화방(花舫)이 줄지어 떠 있는 것처럼 밝은 불이 밝혀져 있다.
세인들이 매화도라 부르는 곳.
매화도를 점거한 남궁세가는 혹시 모를 야습에 대비하여 밤을 대낮처럼 밝혀 두고 있었다.
“멍청한 놈이.”
건너편 강변에 선 큰 체구의 사내.
흑룡왕이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그런 매화도를 바라본다.
“제왕검 남궁황. 실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한 가문을 이끌기에는 지독하게도 단순하고 멍청한 놈이로군. 감히 나와 장강 위에서 맞상대하려 들다니.”
일전의 장강참변 때는 그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그때 그가 상대해야 했던 이들은 남궁세가만이 아니었으니까.
남궁세가와 소림, 무당과 청성, 거기에 화산과 녹림까지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라면 흑룡왕이 아니라 용왕이 와도 완전히 막아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이 장강을 침범한 것은 오직 남궁세가뿐.
“아무래도 그때의 경험이 놈들에게 오만함을 심어 준 모양이군.”
즐거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얕보인 것과 다름없으니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더러운 기분은 저들의 피로 장강이 붉게 물들 때면 더없이 유쾌해질 것이다.
“놈들에게 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줘야겠지. 시작하자.”
“예! 흑룡왕이시여!”
흑룡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뒤에서 어둠에 숨어 있던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의 두려움을 놈들에게 똑똑히 알려 줘라.”
그의 명을 들은 수적들은 대답도 없이 강 안으로 조용히 잠수해 들어갔다.
“멍청한 놈.”
흑룡왕이 긴 수염을 쓸어내렸다.
“남궁세가 정도면 월척이지. 자…… 련주. 값을 꽤 비싸게 쳐주셔야겠는데?”
그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정적에 잠긴 장강으로 나직이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