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화. 저의 역할입니다. (5)
말없이 화산을 내려가던 법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눈빛에 법계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화산.”
이 길을 오를 때는 분명 이런 기분이 아니었다. 묘한 껄끄러움이야 분명 존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게 화산이란 그만이 다룰 수 있는 늑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평범한 이들에게 늑대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그 늑대를 길들일 수 있는 이에게는 날카로운 이를 가진 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길들였다고 생각한 그 개가 지금 그에게 이를 드러낸 것이다. 아직 들을 뛰어다니던 때의 야성을 잃지 않았다는 듯이.
“부처께서는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
“하지만 단 한 족속에게만은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지. 그게 어떤 족속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마라(魔羅)다.”
법계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법정이 말을 이었다.
“그건 결국 부처께서도 구원할 수 있는 존재와 구원할 수 없는 존재를 나누셨다는 뜻. 구원이 불가하고 해악만을 끼치는 존재에게는 그 누구보다 엄정하셨다.”
법정은 굳은 얼굴로 저 멀리 보이는 화산의 전각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화산이 마귀는 아니라 여겼거늘, 내 생각이 틀렸던 모양이구나.”
“……방장.”
법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법계가 살짝 의아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법정이 뭔가를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은…….”
“예?”
“아니다.”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선은 장강이다. 그 일을 수습할 것이다. 화산은 그다음이다. 하지만…….”
그리고 차게 일갈했다.
“언젠가는 화산 역시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내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 천하를 도탄에 빠뜨릴 일을 외면하고, 소림의 이름을 저 바닥으로 처박은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내겠다.”
“응당 그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방장.”
까득.
법정의 손에 쥐여 있던 염주가 산산조각 나며 아래로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끊긴 실에서 빠져나와 구르는 염주 알들이 지금 소림과 화산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것만 같았다. 얇디얇은 실 한 가닥에 의지해 이어져 있던 것들이 지금 이 순간 끊어졌다.
“화산검협…….”
법정이 이를 악물고 걸음을 내디뎠다.
“이건 그대의 선택이다.”
* * *
법정이 돌아간 뒤 화산의 주요 인물들이 다시 장문인의 방에 모였다.
그리고 그 주요 인물들 가운데 당당히 혜연이 앉아 있었다. 그 맑고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있으니, 모두의 마음에 절로 뿌듯함이 솟아올랐다.
“다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스님.”
“우리가 남도 아니고, 뭐 그런 걸로.”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혜연의 얼굴에 약간 쑥스러운 듯 밝은 미소가 번졌다.
집과도 같았던 소림을 스스로 저버린 상황이다. 그럼에도 슬픔이 치밀지 않는 까닭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소림과 다른, 또 다른 가족이 되어 주는 이들.
‘그래.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
“웃어?”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훈훈한 분위기 속에 단 한 사람, 결코 웃지 않는 이가 하나 있었다.
금방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마귀가 칼날 같은 눈빛으로 혜연을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광기가 번들거렸다. 혜연은 절로 목을 슬쩍 움츠렸다.
“웃음이 나와?”
“……시, 시주. 저는…….”
“근데 이 새끼가?”
청명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자 혜연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야.”
“예?”
“너 나 엿 먹이냐?”
“그, 그게 무슨…….”
“에라!”
결국 청명이 득달같이 혜연의 가슴에 양발차기를 날렸다.
쾅!
“아아아악!”
정면에서 뜬금없는 일격을 얻어맞은 혜연이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청명은 아예 혜연을 향해 아득바득 달려들었다. 모두가 기겁하여 청명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왜, 왜 이러냐! 청명아!”
“일단 진정해라!”
“누가 당과 좀 가져와, 빨리!”
일단 오검의 입에서 당과라는 말이 나왔으면 그건 사태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겁한 화산의 제자들이 오검과 힘을 합쳐 청명을 잡아 눌렀다.
하지만 청명은 그 와중에도 눈 돌아간 개처럼 바닥을 긁으며 혜연을 향해 으르렁댔다.
“놔! 안 놔? 내가 오늘 저 대머리 새끼 머리에 털 나는 꼴 본다!”
“그게 뭔 개소리야!”
“아니!”
청명이 두 눈으로 불을 뿜으며 소리쳤다.
“알아서 방장 새끼 쫓아내 줬으면 얌전히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뭐 한다고 그걸 굳이 따라 나가서 일을 사서 만들고 지랄이야! 어?”
움찔.
혜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엿 먹이는 거지, 이게! 야! 너 화산에 무슨 악감정 있냐? 소림이랑 화산이랑 둘이 처붙어서 둘 다 뒈지라 이거냐? 이 새끼가 몇 년을 꼬박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처갚아? 오냐! 오늘 나도 어디 은혜 한번 갚아 보자! 아, 좀 놓으라고!”
“지, 진정 좀!”
이 팔을 놓는 순간 청명이 정말 혜연을 곤죽이 될 때까지 팰 것임을 직감한 백천은 더욱더 필사적으로 잡고 늘어졌다.
천하의 혜연을 보호한다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 소리겠냐마는, 지금 그가 잡고 있는 인간은 그 우스운 말을 우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 중 하나였다.
“뭐? 불자? 불자아아?! 야, 이 새끼야!”
“악!”
붙들려서 차마 발차기를 날릴 수가 없으니 있는 힘껏 다리를 쫙 뻗은 청명이 발바닥으로 혜연의 민머리를 찰싹찰싹 후려쳤다.
“부처님도 널 보면 답이 없다고 보리수 나뭇가지로 대가리를 깨 버리시겠다! 사고 치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아주! 그걸 따라가? 그걸? 이 당과 하나 준다고 하면 인신매매범에 잡혀가면서도 아미타불 염불 외며 히히 웃을 새끼가!”
“아니! 진정 좀 하라고!”
“자, 장문인. 좀 말려 보십시오! 장문…….”
현종을 찾아 고개를 돌린 윤종은 순간 움찔했다. 현종이 거의 반쯤은 혼이 나간 얼굴로 뭔가를 계속 중얼대고 있었다.
“소림이랑……. 하필 소림이랑…….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소림이랑…….”
“…….”
윤종이 작은 목소리로 백천에게 속삭였다.
“사숙. 상태는 저기가 더 심한 것 같은데요?”
“어서 눈 감아라.”
“……예.”
한참을 용을 쓰며 날뛰고 나니 분이 좀 풀린 듯 청명의 근육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하여튼 저 망할 새끼를 거둬 먹인 뒤부터 되는 일이 없어! 이걸 어쩔 건데, 이 새끼야?”
혜연의 두 눈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야 억울하지 않겠는가? 자기는 그냥 파문을 당하겠다고 했고, 끼어들지 말라고 했는데, 저 혼자 날뛰어서 법정을 쫓아내더니 이제는 혜연을 타박하지 않는가?
이건 유유히 헤엄치던 사람을 강제로 후려쳐 물 밖으로 끌어내서 왜 위험하게 물속에 있었냐며 싸대기도 치고 보따리도 뺏는 격이었다.
저게 강도지 강도.
“청명아. 소림 뭐 별거 아니라며?”
청명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그 무시무시한 눈빛을 본 백천이 깨갱 하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싸움박질할 때야 뭔 소리를 못 해! 소림이 뭔 애들 학당이야? 별게 아니게? 당연히 별거지!”
“……그냥 네가 그렇게 말하길래.”
“에이.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
청명이 이를 빠득 갈아붙였다.
‘하여튼 저놈의 성질머리.’
‘불쌍한 혜연 스님.’
‘저건 꼭 남 탓하더라. 으휴.’
사실 혜연의 일이 없었다 해도 화산과 소림의 관계는 법정이 이곳을 박차고 나간 순간부터는 더 이상 봉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혜연의 일은 그 상황에 쐐기를 박은 것에 불과하다.
“쯧.”
청명도 그 사실을 알긴 아는지 이쯤에서 멈췄다. 알고도 이 정도나 되어야 멈춘다는 게 청명의 대단함이라면 대단함이지만.
“소림이랑……. 소림. 이제 어떻게 하지? 이제? 소림…….”
하지만 청명의 분은 풀렸을지 모르지만, 나가 버린 현종의 넋은 돌아올 줄 몰랐다.
청명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현종을 달래기 시작했다.
“거, 일단 좀 진정하시고.”
“진정?”
“…….”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이 망둥이 같은 놈아!”
그 순간 현종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속도로 청명에게 돌진하여 귓불을 콱 잡아챘다.
“아아아악! 장문인! 귀! 귀! 아파요! 귀!”
“이 정신 나간 놈이 소림 방장한테 칼을 뽑고 설쳐? 잠깐 눈 뗀 사이에 달려 나가서 일은 다 키워 놓고, 뭐? 혜연? 야 이놈의 자식아! 그게 혜연 스님 때문이냐! 다 네놈 때문이지!”
“악! 귀, 귀! 아, 귀 떨어진다고요! 아악!”
“아이고, 선조시여……! 제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놈을 다…….”
- 미안.
“응?”
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은…….
“아아아악!”
겨우 빠져나간 청명이 구석으로 후다닥 달아났다. 그러더니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항변했다.
“아니, 그럼 뭘 어떻게 해요! 그 새끼들이 대머리 목을 자르겠다고 설쳐 대는데!”
“……목 자르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냥 단근참맥…….”
“차라리 목 자르는 게 낫지. 저건 무공 없으면 그냥 멍청이인데! 무공도 없는 저놈을 어디다 써먹냐고요. 동네 개만도 못하다니까요!”
“…….”
혜연을 진정으로 슬프게 한 것은 청명의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질끈 감은 그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나쁜 인간들…….’
잠시나마 감격한 내가 등신이지. 내가.
“소림이랑 적이 되다니……. 소림이랑……. 선조시여. 제가 다 망쳤습니다. 이제 화산이 망하…….”
“에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백 년 전에도 소림이랑 거의 치고받고 싸울 지경이었지만 안 망했잖아요?”
그 말을 들은 현종이 멍한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백 년 전에?”
“예!”
“백 년 전에?”
“그렇다니까요!”
“……그럼 망한 것 맞잖느냐.”
“네?”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청명의 말문이 일순 막혀 버리자 현종은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일을…….”
“크흠.”
현상이 그 모습을 보고는 넌지시 말했다.
“그렇게 걱정이 되셨으면 좋게 좋게 풀면 되셨…….”
“그 분위기에서 어떻게 좋게 푸느냐! 이놈아!”
“소림 새끼들이랑 어떻게 좋게 풀어요!”
분명 둘의 방향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하는 짓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어느새 장문인조차도 청명에게 물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화산 문도들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둑해졌다.
“……이제 화산은 망했어.”
“아니, 망하긴 뭘 망해요. 제가 있는데!”
“…….”
현종이 청명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토했다.
“진짜 망했네.”
“아니, 근데 이 양반이?”
“장문인이야, 이 새끼야!”
청명이 눈을 부라리는 순간, 백천이 달려들어 그를 뻥 걷어찼다.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간 청명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걱정할 것 없다니까요! 소림 그 새끼들 별거 아니라니까?”
“아까는 별거라며.”
“내가 상대하면 별거 아니라니까?”
“……한 입으로는 두 말 정도만 해라, 청명아.”
어떻게 입은 하나인데 나오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 다채롭니? 누가 보면 입에서 무지개 핀 줄 알겠다.
지칠 줄도 모르고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 대는 청명과 넋이 나가 뭔가를 중얼거리는 현종, 구석에 박혀서 침울해져 있는 혜연과 뭔가 각자 할 말을 해 대는 화산의 제자들까지.
와그작.
어느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홍대광은 그 분위기에 도저히 끼어들지 못했다. 그저 한쪽 구석에 없는 듯 박혀서 전병이나 씹었다.
“……개판이네.”
그래도 뭐랄까.
참 화산다운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