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화. 저의 역할입니다. (4)
참기 힘들 만큼 큰 분노가 치솟았다. 법계의 두 눈이 들끓었다.
지금까지는 저자의 오만방자함을 용인해 왔다. 그 태도의 어긋남을 이유로 치죄하기에는 명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행위는 명백히 선을 넘었다.
“시주.”
법계의 목소리가 으르렁대듯 흘러나왔다.
불자의 목소리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낮고 흉포했다.
“이건 소림의 행사요.”
“…….”
“외인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오. 이해하시겠소?”
청명은 말없이 법계를 쏘아보았다.
“상황을 잘 몰랐을 수 있으니, 감히 소림의 문도를 공격한 죄는 묻지 않겠소. 하지만 한 번만 더 방해할 시에는 소림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소.”
“…….”
“그러니 물러나시오. 감히 그대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법계가 이 말을 굳이 해 준 이유는 이곳이 화산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타문의 안에서 소림의 규율을 집행해야 하는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러니 저 화산검협도 당연히 상황을 이해하고 물러날 것이다. 최소한의 생각할 머리가 있는 이라면 소림의 행사를 막아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것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깨는 말이었다.
“이해를 못 하시는 건 그쪽 같은데?”
“…….”
순간 법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여긴 화산이고.”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화산의 안에서 사람을 상하게 하려면 누구라도 화산의 장문인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게 화산의 법이지.”
“…….”
“그러니까 당장 우리 대머리에게서 손 떼고 물러나. 손이 아니라 목을 쳐 버리기 전에.”
법계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분노가 극에 달하니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저 방 안에서 있었던 일은 어쨌든 협의를 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협박이고, 힘의 충돌이다.
어찌 소림이 자문의 행사를 진행함에 있어 타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천년소림의 역사에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화산의 안에서 규율을 집행하는 것이 선을 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충분히 양해할 수 있는 영역일 터!
저자는 지금 그 양해가 가능한 일을 두고 결코 양보할 수 없다며 검까지 들고 나선 것이다.
이것이 소림에 대한 도전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 시주의 행동의 뭘 의미하는지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소? 감히 그대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말했을 텐데?”
법계의 음성에 노기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청명은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뒤틀었다.
“감당할 수 없다고?”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것도 차마 외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골적인 비웃음.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비웃음을 당해 본 적 없는 법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여 대는군.”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껏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 같은 건 없었어.”
“…….”
“그러니 어디 한번 확인해 보자고. 이 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아닌지.”
법계가 이를 악물었다.
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는 분명 면죄부를 가지고 있다. 저 젊은 도사가 그 장강참변 때 홀로 유일하게 정파의 자존심을 지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건 더 이상 그 일을 면죄부 삼아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주께서 도를 넘는구려. 아무리 이곳이 화산이라 한들, 그 화산이 그대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소?”
“착각하지 마라, 대머리.”
“뭐…….”
“지금 화산이 지켜 주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야.”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여기가 화산이 아니었으면, 내가 화산의 문도가 아니었으면 네 목 같은 건 이미 예전에 잘라 버렸어. 네 옆에 있는 방장의 모가지도 함께.”
법계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러니까 꺼져. 내 인내심이 다하기 전에. 사람이 참는 데도 한계라는 게 있어.”
“…….”
할 말을 잃은 법계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단 눈으로 멍하니 청명을 보았다.
그나마…… 딱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천하의 누가 감히 소림의 방장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건 감히 저 사패련의 패군이라고 해도 할 수 없을 말이다.
소림이 어떤 곳인가.
강호의 정세가 급박하게 흐르다 보니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보일 순 없다고 하지만, 그 사실이 소림이 가진 힘이 줄어들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소림 역시 지난 수백 년간 강호를 이끌어 온 바로 그 소림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 지금 저자는 그 소림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고 짓뭉개 버리고 있지 않은가?
너무도 황망하여 이제는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그저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덜덜 떨면서 청명을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시주!”
그때 의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혜연이었다.
그는 다급히 외쳤다.
“이건 소림의 일이외다! 시주의 마음은 알지만, 저를 생각하신다면 나서지 말아 주시…….”
“뭐래? 닥쳐, 대머리야!”
“…….”
움찔한 혜연이 잔뜩 당황하여 청명을 보았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주둥아리 닫고 있어!”
“아, 아미타…….”
그리고 그때.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법정이 입을 열었다.
“화산검협.”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가열하게 맞부딪혔다.
“억지 부리지 말게나.”
“…….”
“세상은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 또한 있는 법일세. 그대가 소림과 적대하기로 했다면 더 이상 소림의 내부 일에는 관여할 수 없지.”
실로 싸늘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이건 그대가 선택한 결과와 다름없네. 선택을 했다면 그 대가를 치르는 법도 배워야 할 걸세.”
얼핏 듣기에야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천년소림 방장의 힘과 권위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웬만한 이라면 이 목소리가 가진 위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청명이었다.
“잘 아시네.”
“……지금 뭐라고 했나?”
그는 한없이 심드렁한 눈으로 법정을 보며 말했다.
“잘 아신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죠. 그래서 묻겠는데…….”
잠깐 말을 멈춘 청명이 이내 삐딱하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화산의 영역에서 사람을 상하게 한 대가는 어떻게 치르실 생각이신지?”
그러자 법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지금껏 나는…….”
그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청명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대에게 많은 자비를 베풀었소.”
“…….”
“하지만 이건 비단 그대와 나만의 문제가 아니오. 이 일에 더 이상 관여한다면 분노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소림이 될 것이고, 그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화산이 될 것이오.”
청명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쐐기를 박듯, 법정의 마지막 말이 화산에 울려 퍼졌다.
“내 묻겠는데.”
그의 몸에서 나오는 기세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그대들 화산은…….”
“…….”
“정말 소림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있소?”
같은 길을 걷는 자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적을 바라보는 눈빛이다.
청명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정말 화산과 소림이 적으로 돌아서냐, 아니냐가 정해진다고 눈으로 말하는 것만 같다.
실로 무거운 질문이었고, 대답은 그 이상으로 무거워야 할 터였다.
하지만 청명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소림을 적으로 돌릴 자신이 있느냐라…….”
그는 잠깐 읊조리다 옅게 웃었다.
“그 대답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할 것 같은데?”
“음?”
그 순간.
저벅. 저벅. 저벅.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와 청명의 옆에 섰다.
백천이었다.
그는 잘 벼린 칼날 같은 눈빛으로 법정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유이설이 특유의 무감한 얼굴로 청명의 빈 옆을 채웠다. 표정은 씻기기라도 한 듯 없었으나, 그녀의 손은 허리춤의 검에 올라가 있었다.
그 이상으로 확고한 의지를 보일 방법은 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차분히 걸어온 윤종이 백천의 옆에 서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어깨를 들썩이는 조걸이 유이설의 옆을 채웠다.
이윽고 당소소와 백상, 멀리서 지켜보던 화산의 제자들까지도 법정과 법계를 둘러싸듯 거리를 좁혀 왔다.
그들의 눈빛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게…… 화산의 뜻이오?”
법정이 물었다. 지금 이곳에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사정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방장. 그리고 대사.”
백천은 잠깐 두 사람을 훑어보고는 혜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것이 옳은 일이든, 틀린 일이든, 화산은 함께 싸우고 피 흘린 동료를 버리는 법 같은 건 모른다는 겁니다.”
법정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백천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고, 눈빛 역시 한 치의 동요 없이 올곧았다.
“설령 소림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화산은 동료를 버리고 살아남느니, 차라리 동료와 함께 죽는 길을 택할 겁니다. 그게…….”
그는 담담히 선언했다.
“화산이 백 년 전의 선조들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백천의 말이 끝나는 순간, 청명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형.’
백 년 전. 그건 정말이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후회만이 가득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후예가 그때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 후회로만 점철되었다 여겼던 그 과거로부터 배움을 얻었다고.
‘어쩌면 우리는…….’
청명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멍청하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법정은 노기를 숨기지도 못하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
“그대에게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소, 화산정검?”
“물론입니다, 방장.”
그 대답은 백천이 아닌 다른 이의 입에서 나왔다.
“화산의 모든 제자는 화산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화산이 그리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장문인.”
어느새 다가온 현종은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혜연을 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비록 혜연 스님이 화산의 문도는 아닐지라도, 화산은 문도와 동료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를 해하려 하신다면, 방장께서는 화산 전체를 상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부드럽되 단호한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결국 혜연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참지 못하고 고개 숙인 그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법정은 그 양을 노려보다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아무래도 소림이 우스운 모양이시군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소림이 소림의 제자를 징죄하는 일에 끼어들 수 있겠소? 장문인께서는 반드시 이 일을 후회하게 되실 거요.”
“하!”
별안간 청명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법정이 노여운 얼굴로 물었다.
“……뭐가 우스운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던 청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방장께서 여전히 화산을 이해 못 하시는 모양인데.”
“내가 이해를 못 했다고?”
그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더 이상 이해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청명은 잠깐을 더 소리 내어 웃다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모른다면 알려 드릴 테니, 똑똑히 들으세요. 화산은 아무것도 없을 때도 저 만인방과 싸웠고, 모두가 제 목숨 구걸하기에 바쁜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사패련과 싸운 문파예요.”
“…….”
그 말을 들은 화산의 문도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게 다가 아니지. 백 년 전에는 무려 마교랑 치고받았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이쯤 되면 겁대가리 없는 것도 전통 아닌가?”
별안간 자기들끼리 웃어 대는 화산의 문도들을 보며 법정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화산인데.”
그 순간 청명의 목소리가 그의 시선을 강제로 잡아끌었다.
“소림 따위가 새삼 위협이나 될 것 같아?”
“…….”
“미안하지만 여기는 자기가 납득 못 하면, 마교고 나발이고 서로 뒈질 때까지 붙어 싸워야 직성이 풀리는 미친놈들만 모여 있는 문파거든.”
“크흠.”
“아니, 거기까진 좀.”
“……너무 가는데.”
청명은 다른 제자들의 항의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러니까 협박하려면 상대를 보고 하시지.”
법정이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혹시 몰라 하나 알려 줄 테니, 기억해 두쇼.”
청명의 싸늘한 눈빛이 법정을 꿰뚫었다.
“역사상 소림을 상대하고 무사한 문파는 있지만, 지금까지 화산을 적으로 돌리고 무사한 문파는 단 하나도 없었어.”
“…….”
“그러니까 먹히지도 않는 협박은 거기까지 하고, 당장 화산에서 나가. 내 인내심 끊기기 전에.”
법정의 얼굴이 시퍼런 핏줄이 돋아났다. 적어도 지금 그의 얼굴은 부처를 모시는 승려라기보다는 지옥의 아수라처럼 보였다.
“소림은…….”
그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나직이 말했다.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
“그러시든지.”
그는 청명과 현종, 그리고 다른 화산의 제자들까지 모두 뇌리에 새기겠다는 듯 똑똑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릎 꿇은 혜연마저 노려본 후 말없이 몸을 획 돌렸다.
“바, 방장!”
“가자!”
찬바람이 나도록 돌아선 그는 법계를 이끌고 성큼성큼 걸어 화산을 빠져나갔다.
“어…….”
혜연은 황망한 눈으로 자신을 두고 가는 법정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덥석 움켜잡았다.
“……조, 조걸 도장.”
“거, 무릎에 흙 묻게 왜 그러고 있습니까. 일어나십시오.”
“저는…….”
윤종 역시 웃으며 다른 쪽 어깨를 잡아 혜연을 일으켰다.
“우리 스님 이제 큰일 나셨네. 소림에도 못 돌아가실 것 같은데.”
“…….”
혜연은 입술을 꽉 짓깨물었다.
이 마음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겠는가?
“……감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이것뿐이었다.
백천은 말없이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물론 뒷일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망설일 이유는 없다.’
청명의 말이, 현종의 말이 그들의 가슴에 길을 세운다.
“옳지 못하면 화산이 아니다.”
이것이 화산이 이어 가야 할 의지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