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화. 저의 역할입니다. (3)
법계의 노기가 감정적이고 사적인 데서만 비롯한 건 아니다. 그는 소림의 계율원주를 역임하는 자. 이건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서는 일이다.
“지금.”
어느 때보다 그는 딱딱 끊으며 말에 힘을 실었다. 반드시 혜연에게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장문방장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혜연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말에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라?”
“한 사람의 불자로서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는데, 어찌 거역이라 하십니까?”
법계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네가 아무리 불자라고는 하나, 소림에 속한 몸이다. 장문방장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정녕 모르더냐?”
“…….”
이번엔 혜연도 답을 하지 않았다. 법계가 노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항명이다.”
“…….”
“그리고 정당한 이유 없는 항명은 파문으로 다스린다. 소림의 파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느냐?”
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다고?”
“예, 알고 있습니다.”
법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소림에서 파문된 제자는 단근참맥(斷筋斬脈)의 형(刑)에 처한다.”
단근참맥이라는 말이 나오자 혜연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단전을 부수고, 팔다리의 근맥을 자르면 다시는 무학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지금 너는 기사멸조의 죄를 저지르고 파문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냐?”
그 목소리에는 한 점의 자비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혜연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법정과 법계는 그에게 삶을 열어 준 이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이들이 그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보이는 것은 견디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옳지 않다면 그 또한 집착일 뿐이다.’
다시 고개를 내린 혜연의 얼굴에는 더 이상의 망설임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두 눈이 차분하고 맑았다.
“그게 소림의 율법이고, 제가 소림에 받은 은혜를 갚는 길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이 미련한…….”
이번엔 법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설마 혜연이 이런 대답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단근참맥.
손발의 힘줄을 자르고, 단전을 부수고, 기혈을 부수는 잔혹한 형벌. 그 형벌을 받은 이는 다시는 무학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내력을 잃고 손발을 쓰지 못하게 된 이는 평범한 양민만도 못하다. 제 손으로 수저도 들지 못하게 되는 처지를 어느 누가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이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결국 법계가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지르는 순간, 법정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방장!”
법계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법정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으며 만류했다. 그리고 혜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빛이 싸늘했다. 법계를 말린 이유가 결코 혜연에 대한 호의 때문이 아님이 확연히 드러났다.
“하나 묻겠다, 혜연.”
법정의 목소리에 혜연이 살짝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신색을 정비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방장.”
“이유가 무엇이더냐?”
“…….”
법정이 싸늘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저 소림으로 따라가면 된다. 그러면 네게는 수많은 것이 주어진다. 후대의 소림 방장 자리는 물론이고, 천하제일인의 자리와 더없는 영광까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
“그럼에도 굳이 내 말을 거역하여 파문까지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동안 네가 수련한 모든 것들을 버릴 만큼의 이유가 있느냐?”
법정의 눈에선 냉기가 뚝뚝 흘렀다. 자문의 제자를 보는 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혜연이 언제 법정에게서 그런 눈빛과 말을 받은 적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 순간 혜연의 입가에는 오히려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이상하게도 법정의 말이 혼란스러운 그의 마음을 정리해 주었다.
그는 마치 선문답을 하는 것처럼 법정에게 되물었다.
“그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뭐라?”
“집착이고, 공(空)입니다.”
“…….”
법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그가 혜연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듯이.
“방장의 자리, 천하제일인의 자리, 더없는 영광…….”
가만 읊어 보던 혜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유라 하셨습니까?”
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무인이 아닌 불자이기 때문입니다.”
“…….”
“방장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을 제가 더 확실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방장, 어찌하여 영광을 논하십니까? 불도를 걷는 이에게 어찌 영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자가 걸어가야 할 길은 그저 중생을 위한 길. 그 길에 영광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순간 법정은 말문이 막힌 듯 혜연을 바라만 보았다.
“이 한 몸에 쌓은 무학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하늘에 닿을 무학을 지닌다 한들, 한 사람의 중생을 구원하는 것만 못한 잡기일 뿐입니다.”
“네놈이…….”
법정이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모두 참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소림의 제자에게 설법을 받는 것만큼 그에게 치욕적인 일이 있겠는가?
“저는 무인이기 이전에 불자입니다. 그곳에 제가 걸을 불도(佛道)가 없는데, 어찌 저를 끌고 가려 하십니까? 몸이 극락에 있다 한들, 마음이 지옥에 있다면 그곳이 어찌 지옥과 다르겠습니까?”
“……혜연.”
“거두시겠다면.”
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 점 미혹 없는 그윽한 얼굴로.
“거둬 가야 한다면 거둬 가십시오. 소림에서 쫓겨난다 해도, 무학을 잃는다 해도 소승이 불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거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혜연이 빙긋 웃으며 양손을 내렸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겠다는 듯 순순했다.
이리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법계였다.
혜연이 어떤 이던가?
천년소림의 기대를 한 몸에 품은 기재 중의 기재다. 그가 지금의 소림을 족히 한 단계는 더 끌어올릴 것이라는 기대를 모두가 가졌다. 그는 곧 소림의 미래였다.
소림의 제자인 그가 이런 원칙에 어긋나는 외유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도 오직 혜연의 성장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 하나 때문 아니었던가?
그런 이가 지금 제 발로 소림을 떠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 몸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무학을 버리면서까지.
‘대체 어째서!’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천하의 모두가 소림의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사던 이는 스스로 그 길을 걷어차려 하고 있었다.
“이 미련한 놈이…….”
그 누구보다 엄정해야 할 법계의 입에서 안타까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런 법계와는 달리, 법정의 눈은 갈수록 더 싸늘해지기만 했다.
“그게 네 뜻이더냐?”
“그렇습니다, 방장.”
그는 말없이 혜연을 노려보았다.
다른 때였다면 이런 혜연의 투정을 웃어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 법정이 보기에는 그가 애지중지 키운 제자가 그와 소림이 아닌 화산을 선택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화산이 네 눈을 가렸구나.”
“화산이 제 길을 알려 준 것뿐입니다.”
“그때 너를 화산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저를 화산으로 보내 주신 것에는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법정의 얼굴에 칼날 같은 예기가 어렸다.
한 문파를 이끌어 가는 이는 더없이 온화해야 하지만, 때로는 더없이 냉정해야 한다. 장문의 앞에서 기사멸조를 범한 이를 단죄하지 않는다면 소림의 율법 자체가 흔들린다.
아니.
‘나는 지금 저 아이가 율법을 어긴 것에 화를 내고 있는가? 그게 아니면 자존심의 상처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가?’
법정은 순간 스스로에게 찾아온 미혹을 필사적으로 떨쳐 냈다.
“법계.”
“……예.”
“혜연을 파문한다.”
“바, 방장!”
“제자 혜연에게 기사멸조의 죄를 물어, 소림에서 내린 모든 것을 회수하겠다. 소림의 계율원주로서 형을 집행하라.”
“바, 방장!”
차마 혜연의 무공을 폐할 수 없었던 법계가 필사적으로 상황을 무마해 보려 했다.
“이곳은 소림이 아닙니다. 화산입니다! 방장! 정 혜연을……. 아니, 죄인을 벌하셔야겠다면, 우선 소림으로 압송한 뒤에…….”
“규율을 집행함에 있어서 어찌 장소가 따로 있겠느냐?”
“……하지만.”
“아니면?”
법정이 눈으로 법계를 꿰뚫을 듯 노려보았다.
“소림이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화산의 눈치를 보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더냐?”
“그, 그건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사특한 생각을 품겠습니까?”
“그렇다면 시행하라.”
“…….”
“어서!”
법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법정이 이리 단호하게 나온다면 그로서도 사태를 되돌릴 방도가 없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단 말인가?’
모든 일이 꼬였다. 모든 시기가 좋지 않았다.
‘멍청한 놈이……. 차라리 도망이라도 칠 것이지!’
왜 하필 이때 제 발로 방장의 앞에 스스로 나타난 것인가? 법정이 노기를 진정시킨 뒤였다면 다른 길이 있었을 것을.
법계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소란이 벌어진 걸 알고 슬금슬금 몰려오는 화산의 제자들이 보였다. 방장이 바라는 것은 저들의 앞에서 소림의 위엄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가 혜연이라면 저희가 잃는 것이 너무도 크지 않습니까, 방장.’
하지만 그 속내가 어찌 되었든 방장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일. 법계가 이를 악물고 혜연에게 말했다.
“죄인은 무릎을 꿇어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연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법계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 그런 그의 뒤로 돌아갔다.
“저거 뭐 하는 거야?”
“혜연 스님이 왜 저러고 있어?”
화산의 제자들이 그 광경을 보고 웅성거리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쨌거나 혜연은 소림의 제자다. 소림의 일에 그들이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와중에 뭔가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눈치 빠른 몇몇이 전력을 다해 장문인의 처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집행하라.”
법계가 수도(手刀)를 세웠다. 그의 손날에 푸른빛 경기가 어렸다. 칼보다 날카로운 이 손이 혜연의 전신 근육을 끊고, 단전을 폐할 것이다.
“혜연.”
차마 손을 뻗지 못한 법계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혜연을 설득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린다면 방장께서는 네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고개를 가로젓는 혜연의 단호한 뒷모습뿐이었다.
“장로께서는 망설이지 마십시오.”
“…….”
법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체 화산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이리 어리석게 구는 것이더냐! 화산의 가르침이 소림의 가르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 있다고? 사특한 미혹일 뿐이다.”
그 말에 혜연이 차분히 대답했다.
“화산에서 딱히 배운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저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습니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하면! 하면 왜 이러는 것이더냐!”
“그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깨달았다고?”
“예.”
가만히 반장을 한 혜연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소림에서 찾지 못했던 ‘이타(利他)’가 무엇이었는지 말입니다.”
“…….”
“제가 찾던 길이 이곳에 있음을 알았는데,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장로께서 정말 저를 아끼신다면, 망설이지 마십시오. 그게 저를 위하는 길입니다.”
법계가 눈을 감았다.
소림의 장로로서는 차마 들어 줄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불도를 걷는 한 사람으로서는 그 말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알 수 없구나.’
혜연이 그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불자로서 자신의 불법을 세워 가는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다.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 속에서 법계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나는 소림의 장로다.’
망설임은 있어서는 안 될 터.
“죄인이…….”
법계가 입술을 깨문다.
고개를 잠깐 들어 바라보니 법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에서 받은 모든 것들을 소림의 이름으로 다시 가져가겠노라.”
“아미……타불.”
혜연의 불호가 끝나는 순간, 날카로운 경기가 어린 법계의 수도가 혜연의 발목을 향해 내리쳐졌다.
“아악!”
“스니이이임!”
화산의 제자들이 일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이들이 다급히 땅을 박차며 쇄도했지만, 이미 그들이 닿기에는 늦은 뒤였다.
“안돼에에에에!”
법계의 수도가 혜연의 발목 힘줄을 막 끊어 놓으려는 그 순간.
카가아앙!
커다란 소음과 함께 법계가 제 손을 움켜잡고 뒤로 급히 몇 발짝 물러났다. 그의 손이 혜연의 발목에 닿는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검기가 그의 손을 후려쳐 날린 것이다.
“감히!”
이건 소림의 행사다. 소림의 행사를 누가 감히 무력으로 방해한단 말인가?
당황하고 진노한 법계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가 본 것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 사람이었다.
화산검협.
그가 뽑은 검을 검집으로 밀어 넣으며 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청명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감히 화산에서 이딴 짓을 해도 된다고 허락했지?”
“…….”
“대답해 봐.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그가 뿜어낸 분노가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