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화. 저의 역할입니다. (2)
“……장문인.”
백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무도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차마 바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법정이 내뱉은 말들은 옆에서 듣는 이들의 폐부마저 찔러 댈 만큼 날카로웠다.
만일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대체 뭐라 답했을지, 백천은 고민해 볼 수밖에 없었다. 옳음을 따르기 위해서 소림과 척을 진다는 선택을 과감히 할 수 있었을까?
물론 화산의 이대제자 백천은 할 수 있다.
하지만 화산의 장문인 백천이 과연 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기에 현종을 바라보는 백천의 가슴은 절로 달아올랐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종을 바라보는 화산의 문도들의 두 눈에 담긴 건 오직 신뢰와 자랑스러움뿐이었다. 소림의 법정을 상대로도 결코 물러서지 않으며, 자신의 정의, 화산의 정도를 관철하지 않았는가!
물론 법정과 법계는 그 들끓는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했다.
법정의 얼굴에 황망함이 어렸다.
“어찌…….”
거부를 당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리 면전에서 그와 다른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는 이를 만나는 것은 그의 일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저 구파와 오대세가마저도 그의 제안을 거부했을지언정, 차마 그를 마주보지 못하고 먼 곳에서 겨우 서찰이나 보내고 꽁무니를 빼지 않았는가.
그들이 만일 법정의 앞에 앉아 있었다면,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을 저렇게 하진 못했으리라.
그런데…… 현종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를 앞에다 두고 이런 말을 당당히 해 댄단 말인가?
천년소림의 방장인 법정을 앞에 두고?
“맹주님……. 아니, 장문인.”
법정이 말을 이어 가기 힘들다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이게 정녕 화산의 뜻입니까? 이것이 정녕?”
울분과 노기가 묻어났다.
법정도 사람인 이상 이 기억은 앞으로 이어질 그의 판단을 흐리게 될 것이다. 천년 소림의 방장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긴다는 것은 현종에게 있어서도 실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현종은 그저 담담한 눈으로 법정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대지에 깊게 뿌리를 내린 매화나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까.
“그렇습니다.”
법정은 살짝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문다. 그의 깊은 수양으로도 이 감정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처럼.
“제가 소림의 영화를 위하여 이 모든 제안을 드렸다고 생각하십니까?”
“…….”
“비록 길은 다를지 모르나, 이 모든 것은 천하만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화산은 끝끝내 소림의 손을 잡기를 거부하시는 것입니까?”
청명의 눈이 사나워졌다. 당장 입을 열려는 순간, 백천이 그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마치 현종을 믿으라는 듯이.
“천하만민을 위한 길이라…….”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은 소림의 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방법이야 어찌되었든, 방장께서 원하는 것이 평화라는 사실도 의심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면 어찌하여 거부하시는 겁니까?”
현종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방장. 어찌 길이 하나뿐이겠습니까?”
“…….”
“화산 역시 천하만민들을 위하는 곳입니다. 어떤 일을 하건 그 가슴에 협의라는 두 글자를 지우지 않기 위해 애쓰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현종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뜻이 같다고 해서 길이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림은 소림대로, 화산은 화산대로 같은 결과를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천하를 평화로이 만들기 위한 방법이 오직 소림과 함께하는 것뿐이라 생각하시는 것은 방장의 오만이 아니겠습니까?”
법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들은 그 어떤 말보다 저 오만이라는 말이 그를 분노하게 했다.
“오만한 것은 소림이 아니라 화산이겠지요!”
“그런데 저 인간이……!”
참다못한 청명이 발끈하자 오검들이 그런 그의 옷자락을 사방에서 움켜잡았다.
“이…….”
잠깐 욱하긴 했지만 청명 역시 여기서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제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잠깐 정적이 흐른 후, 법정은 제 말이 과했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깊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침착함은 되찾았을지 모르나 눈빛은 여전히 사나웠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겠군요.”
“죄송합니다, 방장.”
“장문인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법정의 두 눈이 현종을 똑바로 주시했다.
“한 가지는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선택에는 그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몇몇 제자들의 안색이 바뀔 만큼 노골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현종은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치를 것이 있다면 치러야겠지요.”
“치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장문인께서 조금만 더 현명하셨더라면 말입니다.”
현종은 말없이 법정을 마주 보았다. 그 심유한 눈이 마치 법정을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확실히 제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방장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면 어찌……!”
“본디 협의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
“현명한 자는 이익을 따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협의를 품으려 하는 자는 이익이 아니라 마음의 길을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법정이 입을 다물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화산의 길입니다.”
법정이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손에 들린 염주만이 빠르게 손가락을 타고 돌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협의라…….”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마치 소림은 협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화산의 뜻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법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 이상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은 치욕을 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미 아군이라 볼 수 없는 이들과 얼굴을 더 맞댈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차 잘 마셨습니다. 장문인.”
“……예.”
“배웅은 괜찮습니다. 그럼.”
법정이 방 안에 있는 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가 닿은 건 다름 아닌 청명이었다.
“뜻대로 되어 흡족하겠군, 화산검협?”
“그런 방장께서는 뜻대로 되지 않아 심통이 나신 모양이네요.”
청명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좋은 말이로군.”
법정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그 험난함을 알아야 하는 것은 소림이 아니라 화산이 될 걸세. 소림이 막아 주던 바람을 스스로 상대해야 할 테니까.”
“아, 그렇죠. 그런데 어깨가 좀 좁으신 모양이네요. 사파 새끼들이 술술 쳐들어오는 것도 못 막으시고.”
법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야 너무도 많지만, 이 상황에서 말을 더 섞어 봐야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는가.
단순히 협상에 실패한 게 아니다.
통렬한 패배였다.
그가 모든 것을 걸고 전격적으로 나섰음에도 스스로의 뜻을 이루지 못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아니, 아니지.’
정확하게는 두 번째다. 그의 뜻이 무위로 돌아간 첫 번째 사건은 천하후기지수비무대회였으니까.
‘그때 알았어야 했다.’
화산이 언젠가는 소림의 앞을 가로막고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미타불.”
낮은 불호를 왼 법정은 청명을 외면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그리고 단 한 치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를 따르는 법계는 다른 이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흔한 인사조차 남기지 않았다.
탁!
문이 세게 닫히는 순간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화산의 제자들의 몸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휘유우우우우우!”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무서웠다.”
법정은 법정이다.
소림의 방장이 직접적으로 내뿜는 압박감은 그들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추태를 보이지 않고 마지막까지 잘도 버텨 내었다.
“장문인……. 괜찮겠습니까?”
“으음.”
현영의 걱정 어린 말에 현종이 침음성을 흘렸다.
“내 결정이 옳았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현영아. 잠시 잠깐 쉬운 길에 미혹됨이 더 큰 화를 부를 수도 있단 것을 우리는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모르겠구나. 어쩌면 내 자존심 때문에 너희에게 힘든 짐을 안겨 준 것일지도.”
“소림 따위가 뭐 대단한 짐이나 되나요? 그래 봐야 모여 사는 민머리들인데.”
그래도 여전히 근심을 떨치지 못한 듯 보이는 현종을 향해, 청명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이상 완벽한 대답은 없었을 겁니다, 장문인.”
“맞습니다.”
“저희는 장문인의 말씀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로소 현종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녀석들도 참.’
이 아이들이 있으니 섣불리 편한 길을 택할 수가 없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지만, 때로는 더없이 맑은 아랫물이 윗물을 스스로 맑아지게 한다.
탁.
그 순간 현종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말없이 법정을 따라 나간 한 사람의 모습을 본 그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찌 저리 무도할 수가 있습니까! 어찌 감히 방장에게!”
법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법정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폭발을 해도 몇 번은 더 폭발했을 것이다. 그가 보았을 때, 저건 소림의 방장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강호의 평화를 지키고 수많은 문파들을 중재해 온 소림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런 법계를 나무랐을 법정조차도 이번에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닫은 채 큰 보폭으로 산문을 향해 걸을 뿐이었다.
“화산검협……. 현종.”
법정의 입에서 끓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생을 통틀어 이런 치욕을 경험한 일이 또 있었던가? 달군 숯을 삼킨 것처럼 속이 들끓고 타들어 갔다.
‘언제부터 소림이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단 말인가?’
그동안 천하를 위하여 그토록 노력해 왔거늘, 어찌 다들 제 생각밖에 하지 않는단 말인가!
으득.
법정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미타불…….”
치솟는 노기를 감당하지 못하여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화산에는 정도가 있으리라 믿었건만, 내가 잘못 보았구나.”
“방장…….”
“소림으로 돌아가자.”
천우맹이 돕지 않는다고 해서 사패련을 상대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저 피해를 줄여 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게 통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알려 주어야 한다.
소림이 힘이 없어서 참고 있었던 게 아님을, 어째서 소림이 천년소림이라 불리며 수백 년간 강호의 북두자리를 놓치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저 간악한 사파와 도의를 잊은 정파들에게!
그 순간 법정의 발이 우뚝 멈췄다.
“법계!”
“예, 방장!”
“혜연을 데리고 오너라! 더는 이런 곳에 소림의 제자를 둘 수 없다.”
“아, 알겠습니다.”
법정의 노기에 질려 있던 법계가 다급하게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방장.”
그들의 등 뒤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법정과 법계의 시선이 뒤로 향한다.
그곳에 혜연이 서서 반장을 하고 있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화산의 도복을 입고서는 말이다.
“마침 잘 왔구나. 짐을 꾸려라! 소림으로 함께 갈 것이다. 아니, 짐을 꾸릴 필요도 없다! 이대로 바로 출발하자꾸나.”
“방장.”
혜연이 반장한 손을 내리고 법정을 응시했다.
그의 맑고 커다란 눈은 그저 고요한 호수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저는 가지 않습니다.”
“……뭐라 했느냐?”
법정이 귀를 의심하며 되물으니 혜연은 아예 고개까지 저었다.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법계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게 변했다. 이윽고, 그의 폭풍 같은 노기가 혜연을 향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