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화. 저의 역할입니다. (1)
진득한 살기로 이루어진 검이 목에 닿아 있는 것만 같다.
이 감각이 전해 주는 사실은 하나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군.’
사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법정의 감각이 또렷하게 말하고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잘못된 답변을 한다면, 저 청명은 정말로 그의 목을 베려 나설 수도 있다고 말이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는가?’
법정은 도무지 청명의 저 뿌리 깊은 분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림과 척을 져서 화산이 얻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미타불…….”
법정의 입에서 당혹감 뒤섞인 불호가 흘러나왔다. 불호를 외는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미타불.”
불호에는 그의 답답한 속내가 모조리 드러났다.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우맹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천우맹의 중심인 화산검협이 저리 강경하게 나온다면, 이들을 끌어들일 방법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애초에 화산검협은 예측하기 힘든 인물이다. 손해 보는 거래는 절대 하지 않고, 협박 같은 건 먹히지도 않는다. 소림의 방장을 협박해 오는 인간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대화로 이자를 흔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화산검협에게 약점이 하나 있다면 오직…….
“맹주님.”
법정의 시선이 청명을 떠나 현종에게로 향했다.
현종이 어두운 얼굴로 그런 법정을 마주 보았다. 현종을 부르는 소리에 청명의 어깨가 아주 잠깐 들썩였고, 법정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확실히.’
저 화산검협은 세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지만, 오직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만은 존중한다. 그게 사문의 존장이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법정도 알기 어렵지만, 어차피 이유야 중요하지 않다.
결론은, 현종을 공략하면 저 화산검협조차 반대하고 나서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맹주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화산검협과 그 뜻을 같이하십니까?”
“방장, 저는…….”
“제자들의 뜻이 곧 맹주님의 뜻이라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그저 회피일 뿐이라는 걸 맹주님이라면 아시겠지요.”
법정이 현종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화산의 장문인이 아닌 천우맹의 맹주님께 요청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화산검협이 화산의 뜻을 대변할 수 있다고 해도, 천우맹 전체의 뜻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천우맹의 다른 문파들도 화산검협과 그 뜻이 무조건 같으리라 확신하십니까?”
“으음.”
현종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지금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법정의 말에 담겨 있는 내용이 아니라 그 어투였다,
처음과는 분명히 달라진 어투. 현종을 압박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일문을 이끄는 이라면 때로는 문파의 미래를 위해서 독단에 가까운 결정도 내릴 줄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 당장은 답답하고 손해처럼 보이는 일이라 해도, 결과적으로는 문파를 위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걸 맹주님이라면 이해하시겠지요.”
“이…….”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끼어들어 법정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그의 입은 함부로 열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힐끗 살핀 법정이 내심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화산검협은 현종의 권위에는 결코 도전하지 않는다. 저 종잡을 수 없는 이를 유일하게 억제할 수 있는 올무가 바로 현종인 것이다.
그리고 현종은 사실상 유약한 인물.
화산검협이라면 몰라도 현종을 설득하는 것 정도는 법정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가 소림이라는 문파의 방장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짐짓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점점 여유가 돌아오고 있었다.
“처음 제가 실감한 것은 그 무거운 무게였습니다.”
현종이 낮은 침음을 흘린다. 이 말은 한 문파의 수장이 되어 본 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제 선택 하나로 소림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고, 천하의 운명이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그건 그 자리에 올라보지 않은 이라면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지요.”
“음…….”
“맹주께서도 그렇지 않으셨습니까?”
“…….”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도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다잡아 준 것은 소림이라는 두 글자였지요.”
“…….”
“저는 소림의 방장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소림의 방장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내가 하고픈 것을 참아 내고 문파의 미래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담담하고도 힘이 실린 목소리가 현종을 휘감고 들었다.
현종의 표정이 조금 더 무거워진 것을 확인한 법정이 천천히 쐐기를 박아 넣었다.
“제가 아무런 조건 없이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림은 은혜를 잊지 않는 문파입니다. 만약 맹주께서 천우맹의 맹주로서, 그리고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저희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신다면 소림은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화산의 구파 복귀는 물론이고, 그 어떤 문파에게도 내어 주지 않던 권한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까각.
법정의 손에 들려있던 염주가 거칠게 마찰했다. 그 소리가 집중하던 이들을 움찔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주변의 분위기를 장악한 법정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화산이 과거의 영화를 되찾는 것도 정해진 수순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눈에 밟히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수장은 그 아이들을 넘어 문파의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콰득.
그 순간 법정의 귀에 작은 파공음이 들려왔다. 아마 저 화산검협이 분노를 참느라 무언가를 콱 움켜잡는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그에게로 돌아가는 시선을 다잡았다.
지금 이 순간 화산검협을 완전히 배제해야 현종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현종이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화산이 구파로 돌아간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법정이 가라앉은 눈으로 현종을 똑바로 보았다. 그에게 현실을 알려 주겠다는 듯.
“분명 천우맹의 기세는 굉장합니다. 그러니 지금이야 구파의 이름이 작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맹주님. 기나긴 강호사에 어디 천우맹만 한 곳이 한둘이었겠습니까?”
그 말에 현종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법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삐를 죄었다.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명성을 날린 곳도 있었고, 또 때로는 구파일방 이상의 힘을 과시하던 곳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남은 것은 오직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뿐입니다. 그 과거의 문파들은 지금 다들 어찌 되었겠습니까?”
소매 안에 감춰진 현종의 주먹이 조용히 쥐어졌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천우맹은 굉장한 곳입니다. 하지만 맹주님께서도 아시겠지요. 새외 문파와의 연대는 긴 세월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 연대가 끊어지는 순간, 화산이 직면해야 할 현실은 화산에 악감정을 가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분명 지금 같은 관계가 아닐 사천당가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 순간.
법정의 시선이 현종을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청명에게로 돌아갔다. 이 말은 현종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화산검협이 더는 화산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순간, 화산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과 조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장문인께서는 정말 구파와 오대세가를 적으로 돌리고도 화산이 존속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이…….”
청명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현종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말은 그가 가진 고민을 정확하게 찔러 왔다.
화산은 가공할 기세로 그 세를 넓혀 왔다. 그건 오직 청명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임을 현종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청명은 한없이 고맙고도 소중한 존재였다.
하지만 빛이 있다면 어둠도 있다.
화산은 사천당가와 새외의 문파, 녹림과는 더없이 막역한 사이가 되었지만, 기존 강호의 질서를 대변하던 구파일방, 오대세가와는 확연히 관계가 나빠졌다.
천우맹이 지금 같은 기세로 계속 뻗어 나갈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청명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화산은?
저 사패련과의 전쟁 중에 청명이 변을 당하거나,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청명의 천수를 누린 후의 화산은?
정말 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견제를 버텨 낼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아닐 것이다.
이미 화산은 한 문파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넘어 발전해 왔다. 훗날 화산을 이어 갈 이들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는 건 기대라는 이름의 폭력에 불과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지독한 무게가 현종을 짓눌렀다.
이 모든 것을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지켜볼 수 있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삶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 그는 선택을 하면 그만이지만, 그 선택의 대가는 남은 이들이 온전히 지불해야 한다.
잠시 잠깐의 통쾌함을 위해서 후대에 이 큰 무게를 짊어지게 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 지난 수백 년간 강호를 지탱해 온 거인들이 화산에게 악감정을 품게 만드는 선택을 정말 선뜻 할 수 있는가?
법정은 생각에 잠긴 현종을 보며 말했다.
“진정으로 화산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맹주님……. 아니, 장문인!”
마지막 쐐기였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저 모두가 현종의 대답을 기다렸다.
눈을 감은 채 오래도록 고심하던 현종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면면에 떠오른 표정들이 각양각색이었다.
누군가는 간절히 그를 바라보고 있고, 누군가는 그에게 더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다. 또 누군가의 눈에는 이런 말을 들어 주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고, 누군가는 깊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저 많은 생각, 저 많은 뜻 중에서 옳은 길을 찾아내는 것이 장문인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이의 역할일 터.
그동안 그는 수많은 선택을 저들에게 맡겨 왔다.
홀로 선택을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현종은 직감했다.
이건 온전히 그에게 주어진 선택이다.
이걸 미루는 것은 그 책임을 어린 제자들에게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외로운 싸움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영원한 밤길을 홀로 걷는 듯한 고행이다.
그러나 현종은 그 어둠을 밝혀 줄 하나의 별빛을 알고 있었다. 저 하늘 위에 무엇보다 찬란히 빛나는 하나의 별을.
“방장.”
고민을 끝낸 현종이 법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방장께서 하고자 하신 말씀, 빈도가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하면…….”
“확실히 지금 소림과 척을 진다면 후대의 화산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크나큰 위기를 넘겨 겨우 이어진 화산의 이름이 영원히 사라지는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법정은 속으로 흡족해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종이 확실히 그의 말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 문파의 장으로서 해야 할 선택은 너무도 간명하지 않습니까?”
“예, 방장. 너무도 간명합니다.”
현종이 담담한 얼굴로 법정을 마주 본다.
그 순간 법정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폈다. 늘 사람 좋게 온화하기만 하던 현종에게서 범접하기 힘든 기세가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과거 본문의 제자가 운남을 방문했을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예?”
그런데 현종의 입에서 나온 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법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운남에서 빈궁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목도한 본문의 제자가 지니고 갔던 매화검을 팔아 곡식을 구해다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더군요. 누구도 그 사실을 일러바치지 않았지만, 그 제자는 스스로 그 사실을 제게 밝히며 죄를 청해 왔습니다.”
그러자 오검의 시선이 일제히 윤종에게로 향한다. 윤종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현종 역시 윤종을 한번 바라보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때의 일을 야수궁주께서 제게 말씀해 주시더군요. 그 제자가 야수궁주께 했던 말을 지금 방장께 들려드리겠습니다.”
“…….”
“화산의 영광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좀 더 편히 만든다면, 화산의 모든 제자들은 당당히 그 영광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저 화산만의 영광에 머무른다면, 화산은 언제든 다른 문파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 문파가 될 뿐입니다.”
법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반면 현종의 얼굴은 모든 미혹을 떨쳐 낸 듯 부드러웠다.
“방장, 화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허울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화산이 후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남기지 못한다면 아무리 대단한 영광을 누린다고 한들, 그건 화산의 이름을 가진 다른 문파일 뿐입니다.”
“…….”
“옳음을 꺾고 존속을 택한다면, 화산은 더 이상 화산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그리 변한 화산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그 끝을 이 두 눈으로 보겠습니다. 그게…….”
현종의 두 눈에 현기가 듬뿍 어렸다. 법정조차 마주하기 힘든 현기였다.
“부족하기 짝이 없음에도 감히 대 화산의 장문인직을 역임한 저의 역할입니다.”
나지막하고 조곤조곤하지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가 법정의 귀로 파고들었다.
“돌아가십시오, 방장. 화산은 귀사의 청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화산의 뜻을 돌리고자 했다면 방장은 논리 대신에 진심을 가져오셔야 했습니다.”
대 화산파 장문인, 현종의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