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25화 (926/1,567)

925화. 거, 진짜 염치 더럽게 없네. (5)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 방을 채우고 있는 이들의 수가 그리 적지 않음에도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청명과 법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세상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분명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청명이 법정을 좋게 생각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증명된 사실이고, 이번 사파의 일로 그 악감정은 극에 달해 버렸으니까. 그러니 청명은 아무리 상대가 법정이라고 해도 적당히 넘어가 주지 않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소림의 방장이야.’

무림의 북두. 소림.

그 이름을 동경하지 않는 강호인들이 어디 있겠는가? 백천 역시 종남 출신이며, 화산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에게도 소림이란 차마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무언가였다.

하지만 그 신성한 곳을 대표하는 소림의 방장이 지금 그의 사질이 쏟아낸 독설에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살아생전 설마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려야 한다는 건 알지만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저 숨을 죽인 채 둘의 대화를 단 한 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게 지금 백천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빈승은…….”

한참의 침묵 끝에 법정이 입을 열었다.

“그저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이네. 미리 생각했더라면 당연히 장강으로 갔을 것이네. 이건 그저…….”

“아아.”

청명이 짧은 탄성으로 법정의 말을 끊어 버렸다.

“장강으로 가셨을 거다?”

“……그야…….”

“장강으로 달려가 사파와 싸우는 남궁세가를 뜯어 말려서 매화도를 다시 사파에 내주고, 소림이 사파에 굴복했다는 굴욕을 다시 한번 감수하셨을 거다?”

“…….”

청명의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어렸다.

“당신이?”

법정은 어렵게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누군가가 강제로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열리질 않았다.

반사적으로 그랬을 거란 대답을 하려 했지만, 그 역시 느껴 버린 것이다.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것을 저 화산검협이 믿으려 하겠는가. 법정 본인보다 법정의 속내를 더 잘 아는 듯한 저자가?

결국 법정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애초에 설득이 먹힐 상황이 아니다.

“방장께서 불가의 이치만 연구하셔서 세상의 이치를 모르시는 모양인데, 모르신다면 제가 알려 드리죠.”

청명이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은 자기가 수습하는 겁니다.”

“…….”

“다른 사람한테 달려와서 수습해 달라고 울고불고하는 게 아니라 말이죠.”

그 순간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한 것은 법정이 아니라 법계였다. 저 어린 도사가 감히 소림의 방장을 두고 어린아이 가르치듯 말하는 걸 더는 참아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말이 지나치지 않은가!”

법계가 일갈하자 청명은 아주 천천히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나쳐요?”

순간 법계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조곤조곤 타이르듯 말했다.

“물론 소림이 실수를 저지른 건 사실이네. 잘못을 한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지금 방장께서는 그 일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애쓰고 계시지 않은가? 비난을 늘어놓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은 더없이 어려운 일이네. 그런데 어찌 이리 각박하단 말인가?”

그러자 청명은 말없이 법계를 빤히 바라보다 작게 탄성을 흘렸다.

“아, 누군가 했네. 우리 구면이죠?”

“…….”

“그때 장강에서는 인사도 못 하고 헤어졌네요. 잘 지내셨어요?”

“크, 크흠.”

법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장강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있어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원죄와도 같은 말이었다.

“수습이라. 수습……. 네, 뭐 말씀이야 다 맞죠. 그런데…… 그래서 지난 삼 년간은 대체 뭘 하셨기에, 이제 와 그걸 수습하겠다고 애쓰고 계시죠? 마음만 먹었으면 벌써 다 정리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이보게!”

“흐음, 참 희한하네.”

청명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스님이 됐다고 사람이 아닌 건 아닐 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염치가 없지?”

“지금 뭐라고…….”

“아, 돌려 말하면 이해를 못 하시는 모양이네요. 그럼 제대로 말씀해 드리죠. 그 입 닥치라고 한 겁니다, 선사.”

할 말을 잃은 법계가 황망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화산검협이 막 나가는 사람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경우가 없을 거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니, 지금 법계가 딱 그런 심정이었다.

“잘못을 수습하려 하는 사람이 비난만 하는 사람보다 낫다. 그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잘도 그 말을 제 입으로 꺼내시네요.”

“…….”

“그리고 뭐? 수습?”

법정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그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 덜컥 겁이 나서였다.

“그 수습이라는 게, 여길 찾아와서 같이 싸워 달라고 비는 거라고?”

“…….”

“소림은 그딴 걸 수습이라고 하는 모양이죠?”

법계가 고개를 숙이고 만다.

거칠긴 했지만, 청명의 말이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장강참변의 주역 중 하나로서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는 법계는 할 말이 있다 해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그에게도 최소한의 염치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러나게.”

“……방장.”

“그만 됐네.”

법정이 가만히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 두 눈에서 소림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본 법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단 말인가?’

요 근래 천하에서 가장 대의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 문파가 화산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화산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화산검협이 이토록 소림에게 뿌리 깊은 불신을 보인다는 게 지금 소림의 입지를 말해 주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소림은…….”

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린 법정은 작게 불호를 외고는 말을 이었다.

“……완벽하지 않네. 나 역시 완벽하지 않지.”

“…….”

“완벽하지 않은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법이네. 우리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받아야 할 비난은 감수할 수 있네. 하지만…… 나와 소림의 잘못으로 죄 없는 이들이 고통을 받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네.”

청명이 차가운 시선으로 법정을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법정은 꿋꿋하게 말했다.

“어떤 조건이라도 좋네. 한 번만 도와주게나. 천우맹이 없으면 장강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가 되어 버릴 걸세.”

법정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에는 현종을 향해 고개를 숙였지만, 지금은 청명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는 점이 조금 달랐다.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청명의 말도 맞다. 하지만 지금 법정은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만일 법정이 상황을 이야기하고, 당위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그 말에 흔들릴 이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법정은 그 어떤 논리도 내세우지 않고 그저 낮은 자세로 호소할 뿐이었다. 그 진심이 담긴 호소에 현종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조차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법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그들의 도움이 없이는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한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저 법정이 저리 굽실대며 그들에게 빌 이유는 없지 않을까?

고작 소림의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란 이유만으로 저 소림의 방장이 타문의 어린 제자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수 있을까? 그건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오직 한 사람의 눈빛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변함은커녕 흔들림조차 없었다.

“방장은 변한 게 없군요.”

청명의 목소리에서 내내 끓던 노기가 사라진다. 이제 그의 말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되니 이상하게도 이전에 쏟아냈던 말들보다 배는 더 섬뜩하게 들렸다.

“잘못했다, 후회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천하만민들과 고통받을 양민들을 위한 일이니 지난 잘못은 접어 두고 도와달라.”

법정이 움찔했다. 청명이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대충 반성하는 척해 주고, 고개를 숙여 주면, 호구 같은 것들이 협심이 마구 솟구쳐서 대신 화살받이라도 해 줄 줄 아셨던 모양이죠?”

“도, 도장.”

“이젠 정말 확실히 알겠어요.”

“…….”

“방장은 위선자가 아니네요. 그래서 내가 방장을 싫어하는 거고.”

법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위선자가 아니라서 싫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보통은 위선자이기 때문에 싫다고 하지 않는가?

그 의아함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청명이 부연했다.

“위선자는 적어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사람이죠. 최소한 자기가 악을 행한다는 자각은 있다는 의미지. 하지만…….”

서릿발 같은 청명의 시선이 법정을 꿰뚫었다.

“방장은 아니죠.”

“…….”

“방장은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사람이에요. 스스로 선인이라고 완벽하게 믿고 있는.”

말하다 보니 구역이 치민다는 듯 청명은 이를 갈았다.

그래, 위선자라는 건 허도진인 같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문파의 이득을 위해서 악을 행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자각하고 있는 이다.

하지만 법정은 아니다.

법정은 스스로가 옳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설령 지금은 고난을 겪는다고 해도, 결국 그가 옳음이라는 결과를 손에 넣게 되리란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법정은 자신이 화산을 설득시켜 장강의 전쟁에 참여시키는 것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길임을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옳다고 믿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스스로 옳다고 완벽하게 믿고 있기에 새파랗게 어린놈에게도 고개를 숙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청명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온전한 결론으로 나아가는 거룩한 과정에 지나지 않으니까.

‘나는 의심했다.’

그 십만대산의 지옥도 한가운데서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도, 청명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했다. 이것이 정말 옳은 방법이었는지, 스스로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지를.

그뿐 아니라 청문도. 아니, 그곳의 모두가 의심하고 또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뒤에 서서 죽음을 구경하던 이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거룩한 희생이라는 말을 지껄여 대며, 그 지옥에 수많은 이들을 몰아넣은 것을 그저 옳은 일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 지금의 법정처럼.

이런 이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옳은 일을 행하고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이면 됐어.”

청명에게서 흘러나온 기세가 천천히 법정을 압박했다.

“세상을 위한다, 사람을 위한다, 그런 더러운 궤변에 놀아나 죽어 나가는 건 한 번으로도 과해. 지독하게 과하지.”

저 기세는 무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무위에서 나온 것이라면 법정이 이토록 버겁게 느낄 리 없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독한 무게의 기세 앞에 법정은 숨을 내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살아 있는 이상, 당신의 세 치 혀로 화산을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직이 선언하는 청명의 모습은 흡사 상처 입은 맹수가 으르렁대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 여기서 꺼져. 아니면 그 잘난 목을 부러뜨려 버릴 테니까.”

법정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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