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화. 거, 진짜 염치 더럽게 없네. (4)
천하의 법정이 고개를 숙였다. 그 광경은 지켜보는 화산의 제자들마저 함구하게 만들었다.
‘소림의 방장이…….’
우리 장문인께.
어쩌면 뿌듯함을 느껴야 할 광경인지도 모른다. 화산이 몰락하여 그 건물마저 빼앗길 뻔했던 일이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그 지경으로 몰락하는 삼류 문파의 장문인에 지나지 않았던 현종이 몇 해 사이에 소림 방장에게 절을 받는 위치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뿌듯함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경악하고 놀랄 뿐이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방장.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주님.”
법정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현종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소림이 화산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여력이 부족했다고는 하지만, 화산이 봉문 했다면 섬서로 몰려오는 사파들은 저희가 처리를 했어야 합니다.”
“…….”
“그러지 못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걸 어찌 잘못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현영의 입에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림과 화산은 오랜 시간 동안 악감정을 쌓아 왔다. 특히나 그 결정타가 된 부분이 법정의 입에서 나온 저 사건이다. 그 전까지는 나름 입장 차이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리라 치부할 수 있었으나, 이 일에는 분명한 악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림이 화산을 동료라 생각했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일.
그런데 법정이 바로 그 부분을 먼저 언급하며 고개를 숙여 버렸다. 소림의 방장이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진 이가 저리 저자세로 나와 버리면 현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현종이 자세를 높인다면 깊은 사정을 모르는 채 이 일을 전해 들은 이들은 현종을 비난할 것이 분명했다.
‘무섭구나.’
말은 쉽다. 논리는 간단하다.
하지만 강호의 북두라는 소림의 방장이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단순히 고개를 숙이는 것조차 쉽지 않을 텐데, 저리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겠는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일격이다. 얻어맞은 이가 온화한 현종이 아니었다 해도 딱히 대응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화산은 소림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소림이 하남의 안정을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아는데, 어찌 소림을 원망하겠습니까.”
“……맹주님.”
“다만…… 그 간악한 사파의 손에 희생된 이들이 있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현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이러지 마십시오, 방장.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법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정좌했다. 그제야 현종이 법정에게서 손을 떼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운암이 다기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장문인.”
“그래.”
현종은 차라리 잘되었다는 심정으로 운암이 내민 다기를 받아 들었다.
“순서가 조금 바뀐 것 같지만,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천하의 천우맹주께서 우려 주시는 차라니, 이보다 큰 호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종이 살짝 희게 변한 안색으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다기를 쥐고 있으니 놀랐던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법정은 현종이 내민 차를 한 모금 머금더니 빙그레 미소 지었다.
“화산의 매화차는 과연 일품입니다. 제가 먹은 어떤 차보다도 뛰어난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다른 곳만큼 좋은 차를 구하지 못하여 산에 널려 있는 매화를 말린 것일 뿐입니다. 어찌 천하의 명차들에 비하겠습니까?”
“그만의 특색이 있다면 진귀한 차에 비해 어찌 모자라다 하겠습니까.”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하지만 눈치 빠른 이들은 여전히 법정이 주도권을 쥐고 상황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소림의 방장…….’
딱히 위압을 가한 것도 아니고, 신분을 내세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윽박지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방 안에 있는 이들 모두가 법정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탁.
법정이 조심스레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맹주님.”
“말씀하시지요, 방장.”
“말씀드렸다시피 장강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예.”
“남궁세가가 독자적으로 매화도를 점령했습니다. 자신들의 영역 바로 앞에서 비수를 겨누고 있는 남궁세가의 존재를 저 사패련이 용납할 리가 없습니다.”
현종이 눈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상황이 급박해지겠습니까? 사실 그 매화도라 명명된 섬은…….”
“예. 분명 그 섬은 화산이 차지하고 있던 섬이었지요.”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삼 년간 문제가 생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화산과 남궁세가는 다릅니다. 화산은 강남을 칠 생각이 없었지만, 남궁세가는 분명 저들을 도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원래 나와야 했을 말은, 사패련이 구파와 천우맹을 달리 취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그 말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이건 그에게도 화산에게도 좋을 게 없는 말이다.
“공격을 당한 흑룡왕이 참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패군, 그자도 분명 움직이겠지요. 사패련의 주축이 되는 두 곳이 움직인다면 결국 사패련 전체가 움직이게 됩니다.”
법정은 잠시 입을 꾹 닫고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한 명씩 바라보는 눈빛이 단호하고 힘이 넘쳤다.
“그리되면 결국 고통받는 것은 양민들입니다.”
“…….”
“부끄럽지만, 지금 구파일방은 사패련을 제어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니, 맹주님. 부디 힘을 빌려주십시오. 천우맹이 함께해 주신다면 감히 저 사패련도 쉬이 강북을 침탈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으으음.”
현종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침음했다. 양민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어차피 소림이 속내를 모두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다. 그리고 어차피 현종도 이들에게 속내를 모두 털어놓진 못한다.
하지만 숨겨져 있는 속내가 어찌되었건, 지금의 소림은 사패련을 제어할 수 없다. 그 피해는 소림이 아닌 양민들에게 고스란히 향할 것이 분명하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현종은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뗐다.
“쉬이 이해할 수 없는 건…….”
“예.”
“정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힘으로 사패련을 상대하기가 어렵습니까?”
이번엔 법정이 잠깐 눈을 감았다.
차마 그의 입으로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지금은 숨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
현종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미 청명에게 들은 바가 있으니까.
‘하면 이 일을 어찌 해야 하는가?’
상황은 간단하다. 지금 소림을 따르는 문파들만으로는 장강으로 북상할 사패련을 막아 낼 수 없다.
그리고 사천과 중원 북부에 있는 문파들은 굳이 자신들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피를 흘려 가며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패련이 정말 손도 대지 못할 만큼 강대했다면 표면적으로나마 하나로 뭉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사패련은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강하지는 않다는 게 문제였다.
현종 역시 굳이 소림과 함께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게다가 사패련을 상대하는 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희생이 따른다. 다른 이들이 나서지 않는데, 굳이 화산이 나설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 저 양민들만 아니라면 말이다.
“으음.”
현종의 고민이 길어지니 법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고통받을 천하만민을 생각해 주십시오, 맹주…….”
“천하만민?”
그 순간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법정이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네, 천하만민.”
“아아. 확실히 소림은 다르시네요. 천하만민을 위해서 고개를 숙일 줄도 아시고. 솔직히 좀 놀랐어요.”
청명이 빙그레 웃으며 법정을 바라본다. 하지만 법정을 포함한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 웃음은 결코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청명의 웃음은 점점 삐뚜름하게 비웃음으로 변해 갔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상황이 좀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무슨 의미인가?”
“제가 보기에는 전쟁을 바라는 건 오히려 방장 같으신데요?”
“청명아!”
청명의 말에 백천이 놀라 일갈했다. 이건 그가 봐도 선을 많이 넘은 발언이었다.
역시 온화한 얼굴을 유지하던 법정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간단하죠. 양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사패련을 막아야지.”
“틀렸어요.”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막아야 하는 건 사패련이 아니라 전쟁이죠. 사패련이 있다고 해서 양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적어도 강북은.”
“…….”
“강남으로 밀고 들어갈 생각이 아니라면, 양민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 자체를 일으키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방장께선 싸워 이길 생각만 하고 계시네요. 안 그래요?”
“저들이 전쟁을 원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막는다는 말인가?”
“설마 소림의 방장께서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시죠?”
청명의 비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정말 전쟁을 막고 싶었다면, 여기로 달려올 게 아니라 장강으로 갔어야지. 그리고 남궁황을 두들겨 패서라도 남궁세가를 매화도에서 끌어냈어야지.”
“…….”
“남궁세가가 강북을 수복하는 데서 만족하고, 매화도까지 치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방장께서 말씀하신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형국은 아니게 될 테니까. 수로채가 망신을 당했다고는 하나 매화도를 다시 돌려준다면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하겠죠.”
법정이 멍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뭐, 알아요. 그렇게 되면 소림은 온갖 욕을 다 얻어먹겠죠. 기껏 남궁세가가 수복한 땅을 적에게 내어 준다, 소림이 사패련에 겁을 집어먹어 싸움을 피한다, 소림 방장은 겁쟁이다…….”
“…….”
“하지만.”
잠깐 말을 멈춘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소림이 욕을 먹는 대신에 사람을 살릴 수 있겠지.”
법정의 몸이 살짝 떨렸다. 청명의 마지막 말이 그의 폐부를 찔러 왔기 때문이다.
“왜? 생각조차 안 하셨던 모양이죠?”
법정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이 방법은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의 머릿속에서 존재한 사실조차 없다.
그 이유가 청명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긴, 당연히 생각을 안 하셨겠죠. 방장의 머릿속에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소림이 먼저니까. 남궁세가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소림이 욕을 먹는 상황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소림이 사패련을 두려워한다는 인식을 주는 것도 참을 수 없었겠죠.”
“나는 그저…….”
“아뇨, 뭐…… 비난하려는 건 아니에요.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솔직히 정말 기분 나쁜 일이잖아요. 방장 입장에서는 억울하시겠죠. 내가 한 잘못이 아니니까. 충분히 이해해요. 그런데…….”
차가운 시선이 법정에게 내리꽂혔다.
이윽고, 청명의 입꼬리가 뒤틀리며 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렇다면 적어도 양민이 어쩌니, 천하만민이 어쩌니 해 대며 사람들을 생각하는 척하지는 말았어야지. 이 위선자 양반아.”
법정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하지만 뚫린 두 귀를 통해 들어오는 그 목소리만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