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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23화 (924/1,567)

923화. 거, 진짜 염치 더럽게 없네. (3)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아니, 사실 지금의 분위기는 어색하다기보단 싸늘한 것에 더 가까웠다.

‘저 미친놈이…….’

물론 과거에도 청명이 법정에게 딱히 예의를 차렸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소림과 화산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을 때였다.

백천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 격차도 극심할 때였지.’

범은 하룻강아지가 짖는다고 굳이 화를 내지 않는다. 적당히 무시하다가 정 거슬리면 그때 물어 죽여 버릴 뿐이다. 그건 거꾸로 말하자면 하룻강아지에게는 범에게 까불거릴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법정의 눈에 과연 청명이 하룻강아지로 보일까?

백천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법정이 소림의 방장이자 이 강호에서 비할 바 없는 지고한 이라고 해도, 화산검협 청명을 하룻강아지 취급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청명이 가진 입지는 저 소림의 방장마저 거슬리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으니까.

그러니 지금 분위기가 살얼음판 같을 수밖에.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법정이 아니라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서던 법계였다.

“이보게, 시주.”

법계는 싸늘한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웃어른을 대하는 데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한 법일세. 화산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치지 않던가?”

평소의 법계라면 절대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소림의 율법을 다루는 규율각의 각주가 바로 그였으니까.

하지만 방장이 이곳까지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에 이 정도로 쏘아붙이는 선에서 말을 다듬은 것이다.

하지만 청명의 반응은 그런 그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예의?”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 예의 좋죠. 저도 좋아해요, 그거.”

그러더니 법계를 가만 보며 말했다.

“그런데 스님은 산에만 사셔서 그런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모양인데.”

“……내가 뭘 모른단 말인가?”

“윗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는 건 당연히 기본이지만, 강호에는 또 하나의 기본이 있죠.”

“……그게 무엇인가?”

청명은 불청객 둘을 빤히 바라보며 입가를 뒤틀었다.

“아쉬운 사람이 예의를 갖추는 것.”

“…….”

법계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아닌가요?”

청명의 삐딱한 미소가 법계의 눈을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노기가 솟구쳤지만, 제아무리 법계라고 해도 이곳에서 분노를 터트릴 순 없었다.

바로 앞에 법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산…….’

그 이름이 법계를 쉽사리 경거망동할 수 없도록 억눌렀다. 어느새 그의 안에서도 화산의 무게가 그만큼이나 무거워진 것이다.

치미는 노기와 그 무게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법계의 귓가에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맞는 말이네. 소도장, 아니 화산검협. 자네 말대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지.”

“바, 방장.”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이 경직된 분위기를 아주 조금이나마 풀어내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거라 성격이 변했을까 봐 걱정했더니, 자네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군.”

“사람이 변하면 뒈질 때가 된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방장께서는 좀 변하신 것 같네요?”

“…….”

밑도 끝도 말에 법정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대체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놈이!”

하지만 다행히도 법정에게는 아군이라 할 만한 이가 있었다. 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젊은 도사 놈의 장문인을 아군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현종이 크게 일갈했다.

“소림의 방장이시다. 예의를 갖추지 못하겠느냐!”

“아니, 이 이상 어떻게 예의를 갖춥니까, 장문인?”

하지만 청명은 되레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현종이 움찔했다.

“……예의를 갖췄다고?”

“예!”

“그게?”

“당연하죠!”

청명이 제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그래도 소림의 방장쯤 되니까 내가 인사도 하고 대화도 해 주는 거지. 아니었으면 어휴, 지금 여기 피바다 됐어요. 누구 하나는 뒈졌지, 누구 하나는!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누가 뒈질 때가 됐다고 한 것 같은데?”

“아무도 그런 소리 안 했다! 저리 가거라!”

“아, 이상하네. 한 것 같은데.”

“썩 가지 못할까, 이놈!”

“에이.”

청명은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뒤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법정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치 지금이라도 빨리 열받아서 자기랑 한번 붙어 보자는 듯이.

“……아미타불.”

법정이 뭐라 설명하기 힘든 속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짧게 불호를 외었다.

소림의 방장인 그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시비를 걸어오는 망종이 현종의 말은 어찌 저리 잘 듣는단 말인가?

현종은 면목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방장. 제자라고 거둬 놓고는 가르치질 못해서…….”

“아니, 거기다 대고 왜 사과를……!”

“조용히 못 하겠느냐!”

현종이 눈을 부릅뜨고 침목을 금방이라도 던져 버릴 듯 콱 움켜잡자 청명이 움찔하며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풀이 죽어선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무어라 구시렁거렸지만 현종은 그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내보내자니 법정이 껄끄럽고, 그냥 두자니 내 속이 터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판이니 미칠 노릇이었다.

“장문인.”

그때 법정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저 부럽습니다. 화산에 이리 훌륭한 후인들이 있으니 장문인께서는 얼마나 든든하시겠습니까?”

“그냥 골칫덩어리들이지요. 제가 죽기 전에 저놈들은 어떻게든 도사로 만들어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현종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묻어났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법정도 그런 그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앉으시지요.”

“예.”

법정이 중앙에 앉자 안으로 들어온 이들이 그를 중심으로 둘러앉는다.

현종은 두 사람을 가만히 보았다. 그저 법정과 법계 두 사람이 앞에 앉았을 뿐인데,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어깨를 눌러 왔다. 이 방 안이 저 두 사람의 존재감으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소림의 방장이라.’

상대의 크기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격이 충분해야 한다 했던가?

어떻게든 화산을 살리기 위해서 아등바등할 때는 법정이 얼마나 큰 사람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여러 일을 겪어 온 지금에서야 소림이라는 거대한 문파를 무탈하게 운영해 온 법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큰 무게를 버티고 있는지도 말이다.

“크흠.”

법정의 존재감을 털어 내려는 듯 현종이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먼 길을 오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

법정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섬서라 하여 멀게만 느꼈거늘, 이번에 급히 와 보니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좀 더 자주 찾아뵈었을 텐데요.”

“그 말씀이 자주 걸음 못 한 저를 탓하시는 것 같아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진작에 찾아뵈었어야 하는 것을, 이리 먼저 오셔서 저를 부끄럽게 만드십니다.”

“장문인께서 지금 천하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분인 것을 제가……. 아, 이런 실수를.”

“예?”

법정이 결례를 저질렀다는 듯 뒷머리를 슬쩍 문질렀다. 민머리에 닿는 손을 본 순간 청명이 옳다구나 하고 뭔가를 외치려 들었지만, 이미 대기하고 있던 백천의 손이 단숨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 덕에 법정은 무난히 하려던 말을 이었다.

“장문인이 아니시지요. 맹주님이라 불러야 하는 것을 제가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 용서라니요. 장문인으로 충분합니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모든 이들에게는 지위에 맞는 호칭이 있는 법이지요.”

그러자 옆에 있던 현영이 슬쩍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저 중이…….’

굳이 화산에 올라 현종을 맹주라 칭하겠다 하는 것은, 이번 그의 방문이 단순히 화산에 국한된 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즉, 화산의 장문인 현종이 아니라, 천우맹의 맹주인 현종을 상대하겠다는 뜻이다.

“크흠.”

현종도 그 의도를 이해했는지 다시 한번 헛기침했다.

“공사가 다망하신 방장을 앞에 두니 언행이 조심스럽습니다. 궁금한 것을 묻자니 재촉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환담을 나누자니 시간을 뺏는 것만 같고.”

“하하하. 제가 찾아온 것이거늘 시간을 뺏다니요.”

“방장.”

현종이 한숨을 내쉬고는 법정을 바라보았다.

“말씀대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화산에 오르신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법정이 뭔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놓고 말해…….”

그리고 살짝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소림과 화산의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여러 일들이 있었고, 격조했던 기간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현종이 긴장한 얼굴로 법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설마 차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할 줄은 몰랐습니다. 일전에 장문인께서 주신 매화차가 일품이었는데 말이지요.”

“아…….”

현종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소림의 방장이 손님으로 왔는데, 차 한 잔 내어 놓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테지만, 소림의 방장이 갑작스레 화산을 찾아온 상황이 그를 흔들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제가 실수를 하였습니다. 운암! 가서 다기를 가져오너라, 어서!”

“예!”

운암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는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 나갔다.

“죄송합니다, 방장. 제가 경황이 없어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실수랄 것도 없지요. 저는 그저 이제 맹주님께서 저를 과거처럼 생각하지 않으시는 건지 저어했을 뿐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허허허허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청명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 뱀 같은 민머리가!’

법정은 가벼운 말 몇 마디로 이 방 안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휘어잡고, 상황의 주도권까지 완전하게 틀어쥐었다.

게다가 과거의 일을 언급할 때는 다시 ‘장문인’이란 호칭을 사용하고 지금을 논할 때는 ‘맹주님’이란 호칭을 사용해, 지위가 달라지니 대접이 달라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해 대고 있다.

사람에 대한 호오를 떠나서, 말 몇 마디로 원하는 것을 이뤄 내는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소림의 방장 자리까지 올라갔겠지만.

“차를 곧…….”

“맹주님.”

법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장강의 일 말입니다.”

법정은 현종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예상한 듯 입을 열었다. 장강에서 남궁이 매화도를 점령한 것이 바로 어제거늘 말이다.

“……예, 들었습니다.”

“과연.”

법정이 슬쩍 뒤쪽을 돌아보았다. 분명 이곳으로 올 때 보았던 거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생각 이상으로 좋지 않게 흐르고 있습니다, 맹주님.”

“예. 듣자 하니 그렇더군요.”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맹주님.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 순간 법정이 그 자리에서 현종을 향해 깊이 읍을 했다. 마치 엎드려 빌듯이 말이다.

“이, 이, 이게 무슨!”

사색이 된 현종이 기겁하여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앞에 있던 다탁을 뛰어넘으면서 법정을 붙잡아 일으켰다.

“왜, 왜 이러십니까, 방장!”

천하의 소림 방장이 절이라니!

아무리 현종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청명의 입에선 끝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

늙은 뱀이 지금 그 긴 꼬리로 현종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청명의 두 눈에서 새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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