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2화. 거, 진짜 염치 더럽게 없네. (2)
법정은 말없이 화산의 산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산문을 그 두 눈으로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니 조금은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오히려 처음보다 더 낯설기만 했다.
‘아마도 내 처지가 그때와 다르기 때문이겠지.’
같은 물건이라 해도 상황이 바뀌면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법.
그가 처음 화산을 방문했을 때는 딱히 아쉬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화산의 본산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 즉 흥미가 더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미타불.”
법정이 마음에 이는 껄끄러움을 떨치기 위해서 불호를 외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
만민을 위한 일이다.
사사로운 수치스러움에 머뭇거릴 만한 상황이 아니다.
“방장.”
“으음.”
법계의 목소리에 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산문 근처에 있다가 소란을 듣고 달려온 운검이 얼어붙은 채 법정을 가만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우선은 이리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도장.”
운검은 드물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법정을 안내했다. 하지만 이건 운검을 탓할 일이 아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소림의 방장이 찾아온 상황인데, 천하의 누가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 법정은 또 다른 이유로 운검을 새삼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이가 있었나?’
우수가 없는 외팔의 검수.
풍겨 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 그 느낌만으로도 이자가 고도로 단련된 절정의 검수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이자가 법정의 기억 속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 불과 삼 년 만에, 이렇게나 성장을 했다는 말인가?’
보아하니 나이도 적지 않아 보인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경지의 급격한 상승은 어렵다는 것이 상식이다. 게다가 우수도 아닌 좌수로 익힌 검으로 그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큰 발전을 이루었다는 말인가?
그저 한 사람을 본 것뿐인데도, 지난 삼 년간 화산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나이 든 사람이 이럴진대, 아직 어린 화산의 제자들은 대체 얼마나 더 강해졌겠는가?
법정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미타불.’
물론 같은 정파인 화산이 강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산은 지금 온 천하에 태풍을 몰고 오는 문파다. 이런 문파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천하에 불어오는 태풍도 거세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법정이 고개를 저어 버렸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마음속에 혼돈이 가득하구나.’
그토록 오래 수양했음에도 이리 작은 것에도 흔들리고 만다. 그가 그토록 추구해 오던 부동심이 다 무색하도록.
그때,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화산 장문 현종의 모습이 보였다.
“…….”
누구보다 앞서서 버선발로 달려오는 현종을 보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맑구나.’
과거였다면 현종이 저리 뛰어나온다 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몰락하는 문파의 장문인이 소림 방장이 방문했단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당연히 그리 반응할 테니까.
하지만 어디 화산이 몰락한 문파던가? 한때는 그랬을지언정 이제는 아니다.
천우맹의 맹주이자, 섬서의 패자.
과거와는 비교하는 것조차 무의미해진 곳이 바로 화산이다. 지금의 화산에는 구파일방이라는 허울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화산의 장문인, 현종은 과거 화산이 몰락한 삼류 문파로 불렸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달라지지 않은 게 아니구나.’
처지가 바뀐다면 태도는 당연히 바뀌는 법. 처지가 바뀌었음에도 처음과 다름없는 태도를 견지한다는 건 과거보다 더욱 깊은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다.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변해야 하는 법.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 아니던가?
“방장, 어찌 이곳까지…….”
단숨에 그에게 달려온 현종이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멍하니 법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퍼뜩 정신을 차렸다는 듯 깊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 했다.
“잘 오셨습니다.”
그 환대에 걱정으로 가득 찼던 법정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저 현종이 제 속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법정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현종의 인사를 받았다.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은 아니겠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화산을 대표하여 방장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주 포권 한 법정이 슬쩍 현종의 뒤를 살폈다.
‘……없는가?’
안면이 있는 화산의 장로들은 보였지만, 그가 가장 신경 쓰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소란을 듣고 달려 나온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빼고는 법정을 보며 수군거렸다.
“뭔 일인데?”
“소림의 방장께서 오셨다는데?”
“방장께서? 방장께서 여긴 웬일로?”
그는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세인들의 시선에 이미 익숙했다. 소림의 방장이 된 순간부터 이런 시선들은 피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의 면면들을 확인하고 나니, 내심 불편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강하구나.’
아직 앳됨이 가시지 않은 얼굴들이다. 치기는 벗었지만 완숙에는 이르지 못한 젊은 검수들. 하지만 그 젊은 검수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더없이 날카로운 동시에 한없이 진중했다.
저 남궁이나 무당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기세.
이제는 화산을 표현하는 데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상전벽해라는 말도 괄목상대라는 말도 이들의 성장세를 표현하기에는 모자라게만 느껴졌다.
더욱 법정을 감탄하게 하는 것은 이들이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를 기웃거리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저잣거리의 아이들과 다를 게 없다.
순진하다?
아니다.
도가에서는 이런 모습을 두고 ‘청정’하다고 표현한다. 격식을 차리지 않고 쓸데없이 과한 예의를 갖추지 않으며, 본인의 감정에 솔직한 것. 그것이 자연을 닮아 가려는 도인들이 갖춰야 할 태도인 것이다.
‘강함과 청정함이라.’
어째서 화산이 무당의 자리를 위협하게 되었는지 이들의 모습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법정이 잘 알고 있다.
“방장을 뵙습니다.”
“방장을 뵙습니다.”
법정이 자신에게 포권 하는 이들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오검.’
이들은 이제 화산을 대표하는 무인이 되었다. 물론 아직은 그 이름이 후기지수를 논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천하의 검을 대표하는 이름이 될 것이다.
“반갑네, 백천 도장.”
“제 이름을 아십니까?”
“천하의 화산정검을 어찌 모르겠는가?”
“……영광입니다.”
백천이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고개를 숙인다.
헌앙하다는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모습. 인재가 넘쳐나는 소림의 방장임에도 이 순간만큼은 현종에 대한 미묘한 시샘이 느껴질 정도였다.
“……정진하게나.”
백천의 인사를 받아 준 법정의 시선이 그 뒤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한때는 그의 자랑이었던, 어쩌면 법정에게 백천과 같은 존재가 되어 줄 수 있었을 이에게로.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혜연을 향해 법정은 빙그레 웃었다.
“많이 배웠더냐?”
“방장…….”
혜연의 얼굴을 가만 보던 법정이 문득 시선을 내려 그가 입은 무복을 물끄러미 보았다.
‘화산의 무복이라.’
어찌 된 상황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혜연의 마음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면, 넝마를 걸치는 한이 있더라도 타 문의 옷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와는 할 이야기가 많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 조금 뒤에 보자꾸나.”
“……예, 방장.”
혜연이 묵묵히 고개를 숙이자 현종이 난처한 얼굴로 슬쩍 혜연을 비호하고 나섰다.
“방장. 여기에는 사정이 있습니다……. 모두 신경을 써 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장문인. 저 아이를 탓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저 오랫동안 본사를 떠나 있었던 제자와 할 이야기가 많을 뿐입니다.”
“그러시다면…….”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법정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돌렸다.
“깊이 논의해야 할 문제가 있어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내, 내 정신도 참. 죄송합니다, 방장. 이쪽으로 드시지요.”
“예, 장문인.”
현종이 얼른 법정을 안내했다.
조금 소란스러운 화산을 걸으며 법정은 그 분위기를 면밀히 살폈다. 고요한 소림에 비해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쳤다.
나아가는 문파란 이런 분위기겠지.
채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현종은 법정과 함께 화산 장문인 처소 앞에 섰다.
“이곳입니다. 객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탓하지 말아 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불청객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미지근한 물 한 잔만 내어 주셔도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드시지요.”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법정의 시선을 가장 먼저 잡아끈 것은 방문 앞에 놓인 한 쌍의 신발이었다.
현종이 신는다기에는 조금 작은.
그건 천하의 법정이 왔음에도 고개를 내밀지 않는 이가 이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정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미타불.”
법정이 제 마음을 달래려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불호를 외었다. 그가 화산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진정으로 만나고자 했던 이가 지금 이 안에 있다.
방문을 물끄러미 보던 법정이 마침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법정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당연히 한쪽 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은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청명은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한눈에 알아볼 만큼.
아니, 오히려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할 만큼 변화가 없다. 굳이 찾자면 조금 키가 큰 것 같고,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지만, 일전에 그가 보았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풍겨 오는 분위기와 눈빛조차도.
법정이 들어오는 걸 보았음에도 청명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동그란 눈으로 법정을 빤히 바라볼 뿐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법정이 먼저 빙그레 웃음 지으며 말했다.
“잘 지냈는가, 소도장? 아니, 이제는 소도장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군.”
친근한 이에게 말을 건네는 듯 말투가 몹시 부드러웠다.
청명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 아주 잘 지냈죠.”
“그런가? 내가 딱히 해 준 것은 없는 것 같네만.”
“에이. 왜 해 주신 게 없어요.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가?”
“네.”
청명이 환히 웃었다. 하지만 입만 그랬을 뿐, 그의 두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질 않았다.
“그렇게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 주시는데, 억울해서라도 잘 지내야 하지 않겠어요? 덕분에 아주, 아아주 잘 지냈죠.”
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던 화산의 제자들이 입을 쩌억 벌렸다.
‘저…… 저……!’
‘저 미친놈이.’
시작부터 법정을 정면으로 들이받아 버리는 청명을 보니 이 자리가 얼마나 살얼음판 같을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그들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