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화. 거, 진짜 염치 더럽게 없네. (1)
화산의 산문에 사람들이 가득가득 들어찼다.
“아, 밀지 말라니까!”
“아니, 이 사람이? 당신이 끼어들어 놓고는 어디다 남 탓이오!”
“끼어들다니? 내가 오늘 새벽부터 줄을 섰는데!”
“새벽? 새벼어억? 나는 어젯밤부터 여기서 밤이슬 맞으면서 기다렸소! 어디 느지막이 새벽에 와 놓고는 빨리 온 척하고 있어! 이거 안 될 사람이구먼!”
“그, 그럴 리가 있나! 어디서 허세를……!”
두 사람이 서로 드잡이하려 하자 옆에 서 있던 이들이 뜯어말렸다.
“이 양반들이 미쳤나? 여기가 어디라고 드잡이질을!”
“여기 화산이요, 화산! 날벼락 맞을 일 있소?”
“당신들 때문에 우리까지 쫓겨나면 절벽에서 밀어 버릴 줄 아쇼!”
연무장을 쓸다 그 모습을 본 윤종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걸아.”
“예, 사형.”
“저분들은 왜 저렇게 다들 몰려온 것이더냐? 저 짐들은 다 뭐고?”
“아니, 장차 장문인이 되실 양반이 그런 것도 몰라서 어떻게 합니까? 화산이 봉문을 풀었다는 말을 듣고 얼굴 비추러 온 사람들 아닙니까?”
“……저렇게나?”
“많지도 않……. 아니, 뭐 많기는 한데.”
산문 너머로 끝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줄을 선 인원들을 보며 조걸이 헛기침했다.
“따져 보면 그렇게 신기할 일도 아닙니다. 원래 봉문 전에도 화산에는 방문자가 많았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삼 년 동안 못 본 사람들이 인사를 하러 일제히 들르고 있으니 이 정도야 당연한 거지요. 게다가 예전에 비해서 화산의 입지가 더 오르기도 했고요.”
봉문 전에도 화산의 섬서의 대표 문파 자리를 거의 차지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이번 사파의 침입을 막으며 그 자리를 거의 확고하게 굳혔다.
종남이 봉문을 푼다 해도 이 상황을 뒤집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이니만큼, 섬서의 유력자들은 하나같이 화산에 줄을 대지 못해 안달이었다.
심지어 천우맹에 줄을 대려 하는 외지인들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몰려드는 상황이니 저 줄은 날이 갈수록 줄기는커녕 더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참 세상일이라는 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윤종을 보며 조걸이 낄낄대며 웃어 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형은 익숙해져야 합니다. 나중에 장문인이 되시면 저 사람들을 사형이 상대해야 할 텐데.”
“…….”
윤종은 질린 얼굴로 산문에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을? 그가 다?
“아니, 아니지. 겨우 저 정도가 아니겠구나. 지금도 이 정도니 사형이 장문인이 되었을 때쯤에는 거의 화산 입구까지 줄을 설지도 모릅니다.”
“서, 설마 그렇게까지야…….”
“거, 속 편한 소리를 하십니다. 그것도 최소로 잡은 겁니다.”
“최, 최소로?”
“당연하죠. 사형이 장문인의 자리에 오를 때면 적어도 이삼십 년은 뒤 아닙니까? 아직 장문인도 정정하시고, 사숙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으니까.”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한데. 여하튼.”
“그 삼십 년 뒤에 청명이 놈이 어떻게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
화산이 아니라 청명이?
“처, 청명이가 어떻게 되다니. 삼십 년 뒤면…….”
윤종이 입을 닫았다.
“얼마 전까지는 화산신룡이다가 이제는 화삼검협인데, 삼십 년쯤 지나면 뭐……. 환우제일매화무적검황(寰宇第一梅花無敵劍皇)쯤 되어 있겠죠.”
“……농담에는 같이 웃어 줘야 하는데, 농담같이 안 들려서 문제구나.”
“농담 아닌데요?”
“…….”
“그런 놈을 데리고 장문인 노릇 하려면 사형도 골머리 좀 썩어야 할 겁니다.”
조걸이 낄낄대며 웃었다. 윤종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장문인 자리를 조걸에게 넘겨줄까를 고민했다.
“……장문인도 고생이 많으시겠구나.”
그때였다.
“화산신료오오오오오옹! 아니, 화산검혀어어어어어업! 크, 큰일 났다아아아아아!”
누군가가 화산의 산문을 벼락같이 뛰어넘으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댔다.
“……저런 양반들도 상대해야 할 테니.”
“그러게요.”
산문을 뛰어넘은 거지, 홍대광을 확인한 두 사람이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매화도를요?”
“그, 그렇다니까!”
홍대광은 현영이 준비해 준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바짝 타는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남궁세가가 매화도를 점령했다! 우리 귀여운 천리청구가 말 그대로 천 리를 날아와서 전한 소식이다!”
“……그쯤 되면 동물 학대 같은데.”
그래 봐야 비둘긴데, 날개 좀 파랗다고 심심하면 천 리씩 날려 대네. 불쌍한 것.
청명은 홍대광의 어깨에서 깃을 고르고 있는 푸른색 비둘기를 뚫어지게 보았다.
저건 뭐 맛난 걸 얻어먹는다고, 천 리씩 오가면서 도망도 안 가나? 우리 백아 같았으면 도중에 멧돼지 두 마리는 잡아먹고 배 까고 드러누워 술까지 한잔 걸치고 올 텐데.
그것참…… 그러네. 생각해 보니 참 유용한…….
“아, 안 된다!”
홍대광이 화들짝 놀라며 어깨에 올려진 천리청구를 양손으로 감싸 잡았다.
“뭐가요?”
“너 지금 우리 천리청구한테 눈독 들이고 있는 거지? 이건 개방의 영물이란 말이다! 절대 안 돼!”
“아니 뭐 그렇게 쩨쩨하게 구세요. 좋은 건 같이 쓰고 그러는 거지.”
“안 된다니까!”
“쯧. 개방도 각박해졌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대체 네놈이 말하는 옛날은 언제냐?”
“그런 게 있어요.”
그렇지. 그때는 안 그랬지.
품에 술 단지 숨겨 가다가도 나랑 마주치면 드시라고 공손히 양손으로 바치고, 괜찮다고 해도 굳이굳이 주고 가는 그런 정이 있었는데, 쯧쯧. 요새는 영…….
“아니. 그건 됐고.”
그때 현영이 상황을 딱 끊고 다시 물었다.
“남궁세가가 수적들을 몰아내고 매화도를 점거했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장로님. 장강에서 그 사실을 확인한 개방의 제자들이 바로 천리청구를 날려 왔습니다. 본단에서 가장 먼저 저희에게 보내온 따끈따끈한 소식입니다.”
“흐음. 남궁세가가…….”
현영이 영 마뜩잖은 얼굴로 현종을 돌아보았다.
“일이 심상찮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장문인.”
“……그렇구나. 설마 남궁세가가…….”
현종과 현영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홍대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명을 흘끗 보았다.
‘이건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이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청명은 그를 찾아와 남궁세가의 움직임에 대해 물었다. 아무도, 심지어 개방조차도 남궁세가라는 변수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 이놈은 이 먼 섬서에 앉아서 혼자 저 장강에서 벌어질 일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그냥 똑똑하다고 가능한 일인가?’
이제는 청명에 대해서 충분히 알 만큼 알았다고 자신했는데, 이 괴상한 도사 놈은 알면 알수록 더 예측이 힘들었다.
“이보오. 홍 분타주.”
“예, 장문인.”
홍대광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현종을 바라보았다. 한 문파의 장문인, 특히 화산의 장문인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개방은 이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고 있는가? 아무래도 사패련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개방 역시 장강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홍대광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쉬이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워낙에 변수가 많아서…….”
일반적인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흐름을 예측하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이의 수가 많아진다고 해도 그 군을 움직이는 이들은 결국 몇몇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강호의 전쟁은 그 궤를 달리한다.
워낙 각 문파의 개성이 강하고, 각각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보니 명령이라는 게 잘 먹히질 않는다. 그렇기에 전쟁을 구상한 이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만 해도 삼 년간 쥐 죽은 듯 지내던 남궁세가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장강으로 달려가서 수적들을 때려잡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아니, 거의 모두가 생각조차 못 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개방에서는 화산의 의견도 물어왔습니다.”
“우리 의견을?”
“예.”
홍대광의 눈알이 옆으로 슬쩍 돌아갔다.
그 눈빛을 놓치지 않은 현종이 쓰게 웃었다. 정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개방이, 굳이 화산의 의견을 물을 이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청명이 놈이로군.’
아마 그가 모르는 새 청명이가 장강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홍대광에게 뭔가를 말한 모양이었다. 그 말이 옳게 흘러간 것이겠지.
“청명아.”
“네?”
“너는 저 사패련이 어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거야 뭐…….”
청명이 태연히 어깨를 으쓱했다.
“장일소 마음이겠죠.”
“그, 그렇긴 한데.”
정말 옳은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건 별로 안 중요하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사패련은 상수예요. 그 새끼들이 이제 어떻게 나올지는 너무 뻔하죠.”
“그런데?”
“변수는 오히려 저 새끼들이죠. 민머리랑 말코 새끼.”
“마, 말코…….”
물론 민머리는 소림을 말하는 것이고, 말코는 무당을 말하는 것이다.
“일단 말코가 어떻게 나올지 봐야죠.”
청명이 낄낄댔다.
“아무리 봉문을 했더라도 귀를 다 막고 있는 건 아닐 텐데, 저 남궁세가가 사파를 때려잡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히 부글부글 할 거란 말이죠.”
“……분명 그렇겠구나.”
지금 누구보다 명예 회복을 원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무당이다. 아무리 남궁세가가 장강참변의 치욕에 몸을 떨어 왔다고 해도, 그 치욕과 분노가 무당에 비할 수 있겠는가?
“저 같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봉문을 풀고 장강으로 달려갔을 건데……. 거긴 하필 장문인이 허도란 말이죠.”
청명이 뺨을 긁적였다.
허도진인의 생각은 너무 예상이 가다 보니 오히려 예상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민머린데…….”
“끄응.”
구석에 앉아 있던 혜연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혜연의 반응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양반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많이 달라지겠죠.”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제 생각이요?”
“그래. 네 생각 말이다.”
“제 생각이라면…….”
청명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 것 같긴 한데.”
“그래.”
“가급적 안 그랬으면 좋겠네요. 사람이 최소한의 염치라는 게 있으면 안 그러겠죠. 그런데 염치가 없는 인간이니까 그럴 것 같거든요?”
“그,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그게 참 설명하기가 힘든데, 그러니까 제 생각이 맞으면 아마 지금쯤…….”
그때였다.
“장문인!”
벌컥!
운암이 급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얼굴이 살짝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냐?”
뭔가 심상찮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현종이 물었다. 운암이 당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응?”
운암의 말이 채 흘러나오기도 전에 누군가가 먼저 입을 뗐다. 모두의 시선이 입을 연 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산문에.”
“…….”
“소림의 방장께서 오셨습니다.”
“…….”
“맞죠?”
운암은 귀신이라도 맞닥뜨린 것 같은 얼굴로 멍하니 그를 보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떻게 알았느냐? 내 보자마자 뛰어왔거늘.”
“허.”
청명이 피식 웃고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 진짜 염치 더럽게 없네. 차라리 빌어먹는 거지가 더 염치 있겠다. 썩을 대머리 새끼. 돈도 많은 중놈이 거지만도 못해.”
“…….”
구석에 앉은 혜연의 머리가 매화처럼 빨갛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