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18화 (919/1,567)

918화. 있더라고, 미친놈이 하나. (3)

병장기를 든 수로채의 수적들이 함성을 터뜨리며, 창궁검대와 충돌했다.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난 놈들이 뻔뻔하게 다시 얼굴을 들이밀다니! 정파라는 놈들은 수치도 모르는 모양이군!”

“나 같으면 혀 깨물고 죽었다!”

수적들은 창궁검대를 맞상대하며 연신 남궁세가를 비웃고 조롱했다. 굳건한 각오로 이곳에 선 창궁검대이지만,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도 여전히 생생한 것이다. 바로 이 장강에서 살아남았던 순간이, 저 간악한 사파에게 목숨을 구걸했던 순간이!

“자리를 지켜라!”

치욕스러움에 검에 과한 힘이 실리려는 순간, 등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궁가의 소가주, 남궁도위가 남궁세가 특유의 철검을 든 채 전방으로 빛살처럼 달려 나오고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 거기에 사로잡혀 잘못을 만회하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이곳에 선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곳에 설 수 있음을 감사해라!”

그 말에 창궁검대의 눈빛이 다시 칼날처럼 벼려졌다.

어찌 잊겠는가? 그 치욕스러움을. 살아남기 위해 의기를 꺾어야 했던 그 비참함을.

지난 삼 년간 창궁검대는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 치욕을 만회하고 남궁세가의 의기를 다시 세울 순간을 위해서!

“죽어라아아앗!”

그때, 보기만 해도 섬뜩한 언월도(偃月刀)가 남궁도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남궁도위의 짙은 검미(劍眉)가 일순 꿈틀댔다.

콰아아아아아!

벼락처럼 휘둘러진 그의 검이 날아드는 언월도를 단번에 두 동강 내고, 도를 휘두른 수적의 몸에 틀어박혔다.

“컥!”

수적의 얼굴에 순간 경악이 어렸다.

콰득!

힘을 받아 밀고 들어간 검은 이내 적의 몸을 순식간에 두 쪽 내어 버렸다. 갈라진 수적의 시신이 튕겨 나가며 붉은 피를 흩뿌렸다.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남궁도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소리쳤다.

“내가 앞장서겠다! 창궁검대는 내 뒤를 따라라!”

“충!”

남궁도위가 단번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단호한 그의 얼굴에선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치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하찮은 인간이다.’

따라잡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저 화산검협에 뒤질지 모르지만, 그 역시 남궁세가의 남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와 같은 곳에 설 수 있으리라 믿었다.

누구보다 더 노력할 자신이 있고, 누구보다 더 끈기 있게 버틸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거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지금은 저 청명이 가진 재능에 힘입어 좀 더 빨리 달려 나가는 것뿐이니, 평생을 두고 스스로 자세를 지켜 나간다면 언젠가는 그와 같은 곳에 설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웃기지도 않는 소리.’

지금은 안다. 그 생각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그건 강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남궁도위가 청명만큼 강했다면, 과연 그곳에서 장일소와 맞설 수 있었을까?

그만큼 강했다면, 과연 모두가 제 목숨 아까워 침묵하는 그곳에서 홀로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싸울 수 있었을까?

치기로조차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남궁도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그는 청명이 장일소와 맞설 때도, 화의가 일어날 때도, 청명의 주먹이 무당 장문의 얼굴에 틀어박힐 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의기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남궁가의 철검에 부끄러운 일이었다.

‘강하기에 그런 사람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 사람이기에 강한 거지.’

무학에서 패한 것은 변명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패한 것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강자든 약자든 목숨은 하나뿐이다. 그 목숨을 걸고 나설 수 있는가는 무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날, 남궁도위는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인간이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가장 강하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이건 그의 뒤를 지키는 이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검으로는 패해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의기로는 패하지 마라! 우리는 창천남궁세가다!”

“충!”

창궁검대가 단숨에 수적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검이 수적들을 순식간에 참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서 남궁도위의 검은 그 누구보다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 * *

법정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법계를 바라보는 두 눈엔 경악과 분노가 잔뜩 실려 있었다.

“……그게 사실이더냐?”

“예, 방장! 지금 남궁세가의 가주 제왕검 남궁황이 창궁검대를 이끌고 구강으로 달려갔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자오개가 슬쩍 문 쪽을 바라보았다. 법계에게 이 사실을 전한 거지 하나가 차마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기웃대고 있다가, 자오개와 눈이 마주친 순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사실이란 뜻이었다.

“남궁황. 남궁황이라…….”

작게 중얼대던 자오개가 끌끌 웃었다. 재밌다기보다는 허탈하다는 얼굴이었다.

‘그 양반의 성정이라면…… 그래. 가능한 일이지.’

성격이 폭급하기로 따지자면 천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남궁황이다.

안 그래도 삼 년 전 장강참변에서 겪었던 굴욕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텐데, 그런 이의 귀에 사패련이 장강을 넘어 강북 땅을 밟았다는 소식이 들어갔으니…….

자오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명백히 개방의 실책이었다. 정보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후에 벌어질 일을 예측할 수 있어야 의미를 가지는 법이다.

사패련이 강북 땅을 밟았을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했어야 하거늘, 남궁세가가 움직였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뒤늦게 깨닫고 만 것이다.

‘아니, 아니지. 그 급박한 상황에 그런 걸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천하의 몇이나 있었겠는가?’

천하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조리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니, 스스로 칩거에 들어간 문파의 반응쯤은 조금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었던 탓이리라.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쓰린 속을 달래던 자오개의 귀에 노한 법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가주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말이냐! 장강으로 갔다고? 남궁세가 혼자 사패련과 맞붙기라도 하겠다고?”

법정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법계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호통을 친들 상황이 달라질 리야 있겠냐마는, 그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달리기 시작한 상황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어서였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곳이 어디라고 문파 하나가 단독으로 공략에 나섰단 말인가?

구강. 아니, 매화도는 말 그대로 화약고다. 전 강호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고, 전 세력의 알력이 모여 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섬이 어쩌다 이리 중요한 곳이 되어 버렸는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그곳이 사패련과 구파의 자존심과 실리가 충돌하는 천혜의 중지(重地)가 되어 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아무런 협의 없이 홀로 공격해 버린다고?

만약 이 일로 인해 사패련과 구파 간의 전면전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대체 그 뒷일을 어찌 감당하려 하는 것인가?

“대체 무슨 생각이더냐! 대체!”

카각!

법정의 손안에 있던 염주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마찰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흘러가는 기분이다.

“이 일로 천하만민이 도탄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그 모든 죄악은 남궁세가가 감당해야 할 터! 한 가문의 가주이자, 오대세가의 수장이라는 자가 어찌 이리 경솔할 수 있다는 말인가!”

노기 어린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지만 누구도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다만 자오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경솔하다?

그래.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강호에서는 저런 행위를 경솔하다고 하지 않는다.

‘의기롭다고 하지.’

제 피해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고, 악과 맞서 싸우는 것이 곧 협의가 아니던가?

남궁세가는 정의 이름을 쓰는 이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리 비난부터 하고 본다면, 결국 그동안 그들이 강조해 온 모든 것들이 사실 허울에 지나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차마 법정의 비난을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자오개가 입을 열었다.

“방장.”

법정은 얼굴의 노기를 채 다 걷어 내지도 못하고 자오개를 바라보았다.

“남궁세가가 예상치 못한 일을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걸 탓해 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입니다.”

그는 말하다 말고 잠시 뜸을 들였다. 법정이 혼란한 속을 정리할 수 있도록. 그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폐부를 찌르는 질문이다.

“남궁세가가 포문을 열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저들을 도와서 수로채를 칠 것인지, 남궁세가의 독단적인 행동임을 선언하고 발을 뺄 것인지.”

법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남궁세가를 지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남궁세가를 지원하고 나섰는데, 저 사패련이 장강으로 몰려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부터는 정말로 전면전이다.’

한번 일어난 전면전은 그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이기든 지든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장로님.”

법정의 대답이 지체되니 법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이 저 장일소의 계략일 확률도 있지 않겠습니까?”

“계략이라 하셨습니까?”

“예, 계략 말입니다. 삼 년 전에도 저 수로채의 움직임과 함께 모두가 장강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자오개는 저도 모르게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멀끔히 지웠다. 속내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건 당신들이 공명심(功名心)에 눈이 멀어 앞뒤 안 가리고 장강으로 몰려갔던 것이고!’

하고픈 말은 많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소림이고, 앞에 앉아 있는 이는 소림의 방장과 장로니까.

“그럴 확률은 높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입니까? 그 장일소라면…….”

“설명하자면 길지만…… 지금은 그런 말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은 흑룡왕의 독단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 순간 법정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독단이라…….”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성격만 급한 두 작자가 상황을 지옥으로 몰고 가는구나.’

흑룡왕과 제왕검.

둘 다 각 세력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진 대단한 위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두 사람의 영향력이 중원의 판세를 뒤흔들 만큼 대단한 건 또 결코 아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독단이 동시에 벌어진 결과, 구파도 사패련도 원치 않았던 시기에 원치 않는 전쟁으로 제멋대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전쟁이란 게 본디 이런 것이었는가?’

적어도 법정이 생각하던 건 이렇지 않았다. 수뇌와 수뇌가 자신들이 보유한 병력을 부려 치열하게 맞붙는 것이 그가 아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는 그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르다. 모든 말들이 제각각 마음대로 움직여 댄다. 이런 이들을 이끌고 대체 어떻게 전면전을 벌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때 팽엽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오만한 남궁세가가 제멋대로 일을 벌인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미 상황이 벌어졌다면 남은 길은 지원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종리형은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팽가주님께서는 조금 침착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지금 장강으로 몰려가면 수로채가 아닌 다른 사패련 역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경만 하다가 사패련이 먼저 움직이면 지원해도 늦습니다. 남궁세가가 먼저 무너질 겁니다.”

“압니다. 알지만 경거망동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이게 어찌 경거망동입니까!”

두 사람의 논쟁에 삽시간에 불이 붙으니 법정의 낯빛은 컴컴해졌다.

상식적으로야 당장 남궁세가를 지원해 수로채를 몰아내는 게 우선이다. 팽가와 공동이 도와준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사패련이 북상해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이곳에 있는 문파들만으로 정말 사패련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 장일소가 이끄는 사패련을?

‘부족하다.’

구파와 오대세가가 모두 소림을 지원하고 나섰다면 망설일 일도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는 저 사패련을 감당하기 어렵다.

어떻게든 승리한다고 해도 양패구상해 버린 그들의 등 뒤로, 상황을 지켜만 보던 승냥이들이 슬그머니 다가오는 꼴을 목도해야 할 것이다.

고민에 잠긴 법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부끄러움은 그의 몫이지만, 죽음은 다른 이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불자로서 당연히 부끄러움을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마침내 그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의 말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는 듯.

“지금 당장 장강으로 달려간다 해도 늦은 뒤겠지요. 그때쯤엔 남궁과 수로채 사이에 결판이 지어진 뒤일 겁니다.”

“으음. 그건 그렇습니다.”

“하면, 우리는 결국 그 뒷일을 대비해야 할 터.”

법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게 하루의 말미만 주십시오.”

“하루라 하셨습니까?”

자오개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법정을 바라본다. 이런 상황에 고작 하루로 뭘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예. 하루면 충분합니다.”

“실례지만, 방장.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섬서에 다녀오겠습니다.”

“서, 섬서요? 설마……?”

모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법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의 두 눈은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

“당장 천우맹주와 화산검협을 직접 만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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