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화. 있더라고, 미친놈이 하나. (2)
“남궁황?”
“제왕검?”
청명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온 오검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남궁황이 창궁검대를 이끌고 구강으로 갔다고?”
“소림이 불렀는데, 소림으로 안 가고 매화도로 쳐들어간다고?”
“그런가 봐.”
백천은 얼빠진 듯 멍청한 표정으로 청명을 보았다. 평소에는 표정도 잘 관리하는 백천이지만 이번엔 그 충격이 지나쳐서였다.
“……왜?”
청명이 히죽 웃었다.
“사숙. 사숙이 앞으로 사람을 이끌려면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아 둬야 하는데 말이야.”
“그게 뭔데?”
백천이 불안한 얼굴로 묻자 청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는 이유를 찾는 것만큼 허무한 게 없어.”
“…….”
“잘 이해가 안 될 테니 다시 설명하자면…….”
“아니, 청명아. 바로 이해했다.”
“……응?”
윤종이 옆에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해했다.”
“저도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나도.”
“……근데 이 새끼들이? 왜 날 보면서 이야기해?”
그럼 누굴 보면서 이야기하겠니?
네 이야긴데.
잠시 말을 고르는 듯 고민하던 윤종이 말했다.
“생각해 보면 이유가 있기는 하죠. 남궁세가도 그때 장강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했을 테니까요. 얼핏 본 게 전부지만, 그 제왕검 남궁황의 성정이면…….”
“그래. 지금까지 칼을…… 아니, 검을 갈아 왔겠지.”
눈을 까뒤집고 검을 휘두르는 남궁황의 모습을 떠올린 모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격이라는 말로는 채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그 어마어마한 검기를 떠올리니 살이 떨리다 못해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그럼 지금…….”
“응.”
청명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미쳐 날뛰고 있지 않을까? 낄낄낄낄.”
* * *
콰아아아아아아앙!
전각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
군에서 사용하는 화포 수십 발이 떨어져도 일어나지 않을,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만들어 낸 것은 어이없게도 네 자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철검이었다.
“이 간악한 사파 놈들!”
남궁황의 입에서 사자와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감히 겁도 없이 강북 땅을 밟은 저 물개 새끼들을 모조리 이 땅에서 몰아내라!”
“충!”
남궁황의 명을 받은 창궁검대가 빛살이 되어 곳곳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이 달려 나가는 기세만 보더라도 지난 삼 년의 시간 동안 이들이 얼마나 절치부심하여 갈고닦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남궁황이 두 눈이 무시무시한 안광을 뿜었다.
“흑룡왕!”
삼 년.
누군가에게는 길었을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짧았을 시간.
남궁황에게 있어서는 그 시간이 억겁과도 같았다.
치욕과 굴욕,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을 매일매일 곱씹었다.
내장을 끊어 내는 것 같은 그 고통의 시간을 버티게 한 것은 오로지 삼 년만 버텨 내면 그 가증스러운 장일소와 흑룡왕의 목을 그의 검으로 베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하필이면 사패련 중에서도 그 흑룡왕이 수로채를 이끌고 강북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이다.
“이 개 같은 놈!”
빠드드득!
남궁황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의 뇌리에 남궁(南宮)이라는 두 글자가 남아 있었다면 감히 사패련과 함께도 아니라, 단독으로 이렇게 장강을 넘지는 못했을 터.
분노를 터트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창궁검대를 이끌고 구강으로 달리고 있었다.
“도위!”
“예! 가주님!”
남궁도위.
지난 삼 년간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수련을 버텨 낸 남궁황의 아들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삼 년의 세월은 그를 가능성을 가진 후기지수에서 한 사람의 검수로, 당당한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로 성장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창궁검대를 이끌고 수적 놈들을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라! 한번 굴욕을 겪었다 해도 창천의 이름에 여전히 협의와 정의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천하만민에게 알려라!”
“예!”
남궁도위가 앞으로 달려나가자 남궁황의 두 눈이 전방을 주시했다.
“흥!”
소림의 서찰은 분명 받았다. 하지만 남궁황은 그 내용에 일말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겁쟁이 놈들!’
사람은 죽을 자리를 피할 줄 알아야 하지만, 무인은 죽을 자리를 피해서는 안 된다. 특히나 협과 정의를 그 기치로 내세우는 이는 목숨이 아까워 발을 빼는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
무당 그 말코 놈들이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소림과 청성이 그 헛짓거리에 동조하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가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일 따위는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에 창천남궁세가라는 찬란한 이름을 거름통에 처박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쿠웅!
남궁황의 발이 땅을 내밟았다.
“아니. 다 변명에 불과하지!”
정말 남궁황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의기를 가졌더라면, 남궁세가라는 이름이 협의라는 이름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문파가 되길 원했더라면 그 상황에서도 검을 들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그의 검을 무겁게 하고 붙들고 늘어진 것은 다름 아닌 남궁황의 나약함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남궁황을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엎어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하지만!”
남궁황의 두 눈이 타오르는 듯한 안광을 뿜어냈다.
“새 물을 담아 낼 수는 있겠지. 오늘 남궁의 이름을 되찾을 것이다!”
그때, 그의 눈에 그를 향해 어마어마한 기세로 달려오는 수적 무리들이 보였다.
“막아라!”
“빌어먹을, 이 새끼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남궁세가 따위 별거 아니다! 모조리 쳐 죽여!”
마치 벌떼처럼 달려드는 수적들을 바라본 남궁황이 부러져라 검을 움켜잡았다.
“이…….”
남궁황이 다시 한번 땅을 거세게 내리찍듯 밟았다. 그와 동시에 검 손잡이 부분부터 내뿜어진 백색의 검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너무나 짙어서 검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기운이 남궁황의 검을 완전히 휘감고 눈 부신 빛을 발했다.
쾅!
그 일 보는 제왕의 걸음(帝王步).
그리고 그 일 검은 제왕의 검.
“오오오오오오오!”
머리 위로 치켜 올려진 남궁황의 검이 단번에 내리그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검을 휘둘러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말 그대로 화포가 발포되는 소리와도 같았다.
하지만 더욱 믿기 힘든 것은 그 검이 만들어 낸 소리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낸 검강의 크기였다.
작은 검 끝에서 말 그대로 집채만 한 크기의 백색 검강이 발출된 것이다. 시야 전면을 모두 뒤덮으며 날아드는 거대한 검강을 본 이들의 얼굴에선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피, 피…….”
피하라는 말을 채 다 내뱉기도 전에 백색 검강이 달려들던 수적들을 뒤덮었다. 그것도 모자라 중앙의 대로에 거대한 상흔을 남기며 앞으로, 또 앞으로 뻗어 나갔다.
콰콰콰콰콰콰쾅!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위력.
장력이라고 해도 어안이 벙벙할 지경인데, 이 어마어마한 기운을 검으로 발출해 냈다?
어째서 남궁세가가 창천남궁세가로 불리며 오대세가 수장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 어째서 남궁세가의 가주가 항상 천하제일검수의 후보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려 왔는지를 강제로 이해하게 되는 광경이었다.
“하찮은 사파 놈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앞을 가로막느냐!”
일 검으로 전방을 휩쓸어 버리고, 홀로 서서 포효하는 남궁황의 모습은 신장(神將)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우와아아아아아!”
“남궁세가다! 남궁세가가 우리를 구하러 왔다!”
“창천남궁세가!”
“오대세가가 왔다!”
비교적 안전한 전각에 숨어 눈치만 보고 있던 이들이 그 광경을 보고서야 마침내 밖으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질러 댔다. 남궁세가가 과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나, 저 수적들과 비교할 순 없었다.
그들이 이리 직접 구강으로 찾아와 수적들을 참살하는 모습을 보니 지난 악감정이 모두 씻겨 나갔고, 그 자리를 믿음이 채우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아직 저 더러운 수적 놈들이 남아 있으니! 내 곧 마음을 편히 놓게 해 주겠소!”
그 말을 들은 중인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이 길었던 기다림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흠!”
남궁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힘차게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그의 옆으로 다가온 한 사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뭐냐?”
남궁황이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사자검(獅子劍) 남궁명(南宮明). 그의 동생이자 창궁검대의 대주를 맡은 이다.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이냐?”
“……형님의 기분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신중하지 못하게 움직인 듯한 느낌이 듭니다. 혹 이 일이 너무 커지진 않을지…….”
“남궁명!”
남궁황의 화포 소리 같은 목소리에 남궁명이 찔끔하여 목을 움츠렸다.
“너는 언제부터 겁쟁이가 되어 버렸느냐?”
“그, 그게 아니고…….”
“똑똑히 알아 두어라!”
남궁황이 죽일 듯한 눈으로 남궁명을 바라보다 말했다.
“머저리들이 사는 세상에서 홀로 현명한 이는 되레 멍청이 취급을 받는 법이다.”
“……예?”
“검을 쓰는 이가 사파를 무찌르는 데 대체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단 말이냐!”
남궁황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의혹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로지 굳건한 확신만이 가득했다.
“그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고통을 겪은 것이다! 옳은 것을 옳다 말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 가주님. 저는 그저…….”
“시끄럽다!”
남궁황은 남궁명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물론 남궁황도 이 일로 인하여 남궁세가가 입을 피해를 걱정하는 남궁명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득을 따지는 문파는 고작 백 년을 갈 뿐이다.
그 시간을 넘어 천년, 만년 그 가치를 이어 가기 위해서는 득실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작은 것에 눈이 멀어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이는 결국 패망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남궁황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상처투성이의 작은 검수.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울부짖던 한 사람.
그때 남궁황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어린 검수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감히 마주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어린 검수가 그를 돌아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지난 세월 남궁황을 진정한 고통에 밀어 넣은 것은, 그 순간 그 눈을 마주할 수 없었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다시는…….”
남궁황이 주먹을 움켜잡는다.
“다시는 누군가의 눈을 피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할 일을 벌이는 일 따위도 절대 없을 것이다! 나는 남궁황이다! 남궁세가의 가주, 제왕검 남궁황!”
“형님…….”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검을 들어라. 남궁가의 검수는 주둥이가 아니라 검으로 말하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가주님!”
이내 남궁명의 눈에도 단호함이 깃들었다.
옳고 그름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그의 가주가 이곳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동생이자, 남궁세가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자랑스러운 창궁검대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그 의지에 화답해야 한다.
“가자!”
“예!”
부두에서부터 새까맣게 달려오는 수적 무리를 보며 남궁황이 검을 움켜잡았다.
“사파를 물리쳐라!”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검기가 하늘 높이 충천했다.
더없이 맑은 하늘(蒼天)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