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15화 (916/1,567)

915화. 아귀다툼이 따로 없구나. (5)

소림.

법정이 자신의 앞에 둘러앉은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개방의 방주 대신 자리에 참석한 자오개(慈烏丐) 능삼(能三). 공동파의 장문인인 복마산인(伏魔山人) 종리형(宗利形). 그리고 하북 팽가의 가주인 섬전쾌도(閃電快刀) 팽엽(彭曄).

하나같이 쟁쟁한 이름들이다.

하지만 대소림의 방장이 직접 초청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세 명이라는 숫자는 너무도 초라하다. 그 하나하나가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말이다.

거리 때문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곤륜을 포함해도 넷, 도무지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제갈세가마저 포함한다고 해도 다섯에 지나지 않는다.

소림의 이름이 천하의 북두로 우뚝 서 있을 때였다면, 적어도 이 자리에 열 이상의 장문들이 모였을 터.

애가 끓고 속이 바짝바짝 탔지만, 법정은 그런 속내를 이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런 속내는 굳이 그가 드러낼 필요도 없이 이곳에 모인 이들의 눈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다.

“더 오실 분이 없는 겁니까?”

그때 자오개 능삼이 눈치도 없게 슬쩍 물어 왔다. 법정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곤륜의 장문인께서 오고 계십니다. 제갈세가도 곧 온다고 하시더이다.”

“곤륜에 제갈세가라……. 그럼 나머지는 오지 않는 겁니까?”

“아직 확답을 받지 못하여.”

짧게 대답하며 법정이 능삼을 슬쩍 쏘아보았다.

다른 곳도 아닌 개방이다. 그 정보력으로 이곳을 채울 이들이 이게 전부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려 법정의 속을 긁어 대고 있는 것이다.

“방장께서 논의가 필요하다 하시어 오긴 했습니다만…… 저희만으로 논의가 되겠습니까?”

법정은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내었다.

“논의에 빠지신 분들은 이곳에서 결정한 것을 받아들이실 테니, 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좋겠지만…… 이를 저희 방장께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법정은 대답 대신 손에 쥔 염주를 가만히 굴렸다. 심기가 복잡할 때에 나오는 그의 버릇 중 하나였다.

그는 지금 화가 났다기보단 허탈했다.

소림에서 성대하게 천하비무대회가 열렸던 것이 몇 해 전이었던가? 그때만 해도 소림이 천하의 북두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천하 각지에 존재하는 유력 문파의 장문들이 모두 소림을 방문하여 그와 친교를 나누고자 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이토록 상황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안 온 사람들은 됐소. 없는 이들 찾아 봐야 소용도 없고! 사람이 많아져 봐야 말만 많아질 뿐이지.”

팽엽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법정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지만, 팽엽은 볼 때마다 하북팽가의 사람 같지 않았다.

팽씨 성을 쓰는 이들은 본디 커다란 체구로도 유명하다. 그 타고나길 커다란 체구가 도를 쓰는 데 이점이 되기에 하북팽가가 도의 명문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팽엽의 체구는 크기는커녕 오히려 법정보다도 조금 작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팽엽에게서는 패기보다는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마치 절정에 오른 검수처럼.

“그보다.”

팽엽이 날카로운 눈으로 법정을 응시하며 물었다.

“어찌하실 셈입니까, 방장. 저들을 이대로 두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하지만 팽가 특유의 급한 성정만은 제대로 물려받았는지, 다짜고짜 본론부터 물어 왔다.

“그걸 논의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인…….”

“시간을 끌면 늦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패련 놈들이 구강으로 몰려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시간을 준다면 더욱 상황은 어려워질 겁니다.”

하지만 그 내용만은 틀림이 없었다. 법정 역시 그리 생각했으니까.

하나 생각이 다른 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 급하게 생각하실 일은 아닙니다.”

공동의 장문인 복마산인 종리형이 조용히 말을 얹었다.

“적은 사패련입니다.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다른 구대문파들이 제때에 지원을 해 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화가 퍼져 나간다면 어쩔 수 없이 다들 참전을 해야겠지만, 제대로 된 전력이 갖춰지기 전에 피해가 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버려 둘 수는 없잖습니까.”

“괜히 화약고를 건드리는 결과가 될지도 모릅니다. 기껏해야 장강 어귀에 머물고 있는 것 아닙니까?”

팽엽이 그 말을 듣고 싸늘하게 대답한다.

“장강 어귀라니요, 장문인. 그곳은 강북입니다.”

“강북이라 해서 사패련이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종리형이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강남불침의 조약 때문에 사패련과 우리의 영역이 나뉜 느낌이 생겨 버렸지만, 본디 저희는 사파가 강북 땅을 막는 것을 막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지금 새삼 걸고넘어질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자오개 능삼이 피식 웃었다.

“장문인의 말씀도 맞습니다만, 세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지요.”

“세인들은…….”

“그렇다고 우리는 강남으로 넘어갈 수 없는데, 저 사파 놈들은 강북에 발을 들여도 괜찮다고 선언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음. 그건…….”

이번에는 종리형도 딱히 반론하지 못했다.

“명분이야 그렇습니다만, 문제는 현실이겠지요. 방장.”

능삼의 시선이 이번엔 법정에게로 향했다.

“솔직하게 말씀을 해 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곳에 십만 개방도의 목숨을 걸고 왔습니다.”

“……그리하지요.”

“저희가 앞장선다면 다른 구파나 오대세가에서 정말 제때 뒤를 받쳐 주러 오는 것입니까?”

법정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기는 민망하고, 불자의 입으로 허언을 내뱉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역시나.”

능삼이 짧게 혀를 찼다. 소림의 방장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 사실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그럼 또 하나 묻겠습니다.”

“무엇입니까?”

“소림은 이 일의 전면에 나설 생각이 정말 있습니까?”

“……전면이라 하시면?”

“다른 문파들이 지원하지 않는다 해도 이곳에 있는 문파들을 이끌고 가장 선두에서 사패련과 싸울 생각이 있으시냐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법정의 말끝이 흐지부지 흐려졌다. 혀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이 말을 내뱉어 버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선봉.

그 아무것도 아닌 말이, 그 아무렇지도 않게 써 오던 말이 얼마나 깊은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이제야 새삼스레 실감이 난 것이다.

그런 그를 살피던 자오개는 내심 혀를 찼다.

‘글렀군.’

아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 소림이 누구보다 앞에서 사패련과 치열하게 싸운다면 눈치를 보던 다른 문파들도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천하만민의 비난이 두렵기도 할 것이고, 만일 소림이 사패련과의 전투에서 전력을 보존한 채 승리를 거둔다면 더는 소림의 독주를 막을 방법이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법정은 차마 칼을 뽑지 못했다.

‘무엇이 그리 겁나시오?’

천하비무대회에서 본 그였다면, 지금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법정은 끄덕이려던 고개를 멈추고 말았다. 마음에 무언가가 걸린다는 의미다.

‘이끈다는 것은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게 아니라, 앞에 서서 먼저 달려 나가야 하는 것을.’

소림이 그 사실을 잊었다면 그도 더는 방법이 없었다.

“그럼 결론이 난 것 같습니다.”

자오개가 어깨를 으쓱한다.

“장강을 내어 주고 더 올라오지 못하도록 견제만 하시지요.”

“자오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팽엽이 즉각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하지만 자오개는 완고하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가주님. 저는 개방의 장로입니다. 개방의 방주가 아니라는 의미지요.”

“……무시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소.”

“그런 말이 아닙니다. 모두를 책임지는 방주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잖습니까.”

“…….”

“여기서 저희가 수로채를 건드리면 반드시 전쟁이 벌어집니다.”

“어째서? 그들이 물러날 수도 있지 않소?”

“흑룡왕은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장일소가 그러겠습니까?”

장일소라는 이름이 나오자 팽엽이 입을 닫았다.

패군 장일소의 위명은 장강참변에 참여하지 않은 정파들에게도 깊은 화인처럼 남았다.

게다가 장일소는 상대를 완벽한 음모에 빠뜨리는 계략과 섬뜩할 정도의 결단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편치를 않았다.

“수로채를 상대하러 온 문파의 수가 몇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장일소는 반드시 그 틈을 타 이득을 취하려 할 것입니다. 굳이 우리가 스스로 약점을 노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약점.

구파일방에 간 커다란 균열. 그 균열을 장일소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한 발 뒤로 물러난 채 감시하는 척만 하면, 저들이 이 상황을 모두 짐작하기는 어려우리란 뜻.

그 말을 완전히 이해했음에도 팽엽은 분통을 터뜨렸다.

“대체 다른 문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이건 사패련을 상대하는 일이 아닙니까! 모두가 앞장을 서고자 다퉈도 시원찮을 판에!”

법정의 얼굴에 짙은 수심이 어렸다.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자오개를 바라보았다.

“장로님.”

“예, 방장.”

“한 가지 묻고 싶소이다.”

“그러시지요.”

살짝 뜸을 들인 법정이 입을 열었다.

“만약 저 천우맹이 이 전쟁에 나서 준다면 개방은 소림과 함께 싸워 줄 용의가 있소이까?”

“……지금 천우맹이라 하셨습니까?”

“예.”

자오개는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빙궁이나 야수궁이 중원까지 올 수는 없을 테니, 당가와 화산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러합니다.”

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답은 받지 못했습니다만, 천우맹의 맹주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일입니다.”

“가능성이라…….”

자오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가 가장 예측하기 힘든 것이 천우맹, 특히나 화산의 움직임이었다. 그 기괴한 문파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지 감도 잡히지 않는 곳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호북이나 하남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천우맹이 같은 구파조차 발을 빼는 일에 동조하고 나설 이유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화산 아닌가?’

저 사패련과 원한이 깊으니 이 기회에 사패련을 쓸어 버리려 나설 수도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문파라 영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천우맹이 나서 주기만 한다면, 분명 상황이 바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적들을 지켜보고 있을 이유가 없지요. 당가도 분명 참전할 터이니.”

“으음.”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단은 천우맹의 답변을 기다려야겠군요.”

“만약 방장께서 저들과 대적하기를 원하신다면…… 발을 뺀 다른 구파의 마음을 돌리거나, 천우맹을 끌어들이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해내셔야 합니다.”

“……아미타불.”

법정이 나지막이 불호를 외었다.

‘결국은 천우맹이거나.’

오지 않은 문파들의 마음을 돌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지금 자오개가 한 말은 어떻게든 천우맹을 끌어들이라는 말과 같다.

결국은 또 천우맹, 또 화산에 우는소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쏟아졌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기꺼운 마음도 들었다.

이 말은 적어도 지금 당장 소림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지금의 그에게는 천우맹의 답변을 기다리고, 그들을 찾아가 호소하느라 소모할 시간마저도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일은 언제나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벌컥!

그 순간 문이 거세게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박차고 들어왔다.

법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엄히 말했다.

“장문인들이 계시는 자리다. 어찌 경거망동하느냐?”

“크, 큰일 났습니다! 방장!”

하지만 법계는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그의 표정을 본 순간 법정은 뭔가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법계의 말이 이어졌다.

법정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왜, 왜 지금! 어째서!”

그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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