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화. 아귀다툼이 따로 없구나. (1)
“수, 수로채다!”
“수적들이야!”
그 거대한 배는 시선을 잡아끌 수밖에 없었다.
매화도에 인접한 검고 거대한 배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물론 수적이란 알려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함부로 참살하거나 피해를 주는 존재는 아니다.
산적이 굳이 산을 내려와 민가를 습격하지 않는 것처럼, 수적들 역시 뭍에 발을 댄 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건 수적들이 생존을 위해 지켜 온 나름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수적은 수적!
지금껏 오가던 매화도를 수적들이 점령하는 모습은 모두를 겁먹게 할 만했다.
“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화산은 왜 이런 일을 방조하는 거지? 이렇게 물러나 버리면 정말 매화도가 저들의 손에 넘어가 버릴 텐데?”
“……장사는 할 수 있는 건가?”
그 광경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곧장 달아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 상인이기 때문이다. 매화도를 이용하는 이들도, 매화도에 인접한 도시를 채운 이들도 대부분 상인이고, 또 그들의 식솔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런 상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러 몰려온 이들, 즉 이곳에서 달아난다면 다시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하는 이들이다.
터전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 이리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뭐?”
누군가의 외침에 다들 눈을 크게 떴다.
과연 매화도에 접안했던 배가 천천히 뱃머리를 돌려 부두 쪽으로 향해 왔다.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달아나야 하나?”
“달아나면 뭘 또 어떻게 하자고? 어차피 장사 못 하면 다 굶어 죽는 것 아닌가? 그럴 바에야 버티다 죽는 게 낫지.”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 그래도 먹고야 살겠지.”
“나는 못 가네. 자네들이나 가게.”
생각이 있는 이들은 이미 창고에 있는 물건들을 빼놓은 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이곳을 떠나진 못하고 있었다.
강북에서 자생할 수 있는 상가들이야 별걱정이 없겠지만, 강남과의 교역으로 먹고사는 이들에게는 이 매화도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일단 말을 들어 보세. 수적들은 뭍에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게 원칙 아니던가?”
“빌어먹을, 그 말을 믿는단 말이야? 전에 물가에 있던 마을이 수적 놈들 소행에 초토화된 것을 잊었는가?”
“그건 그런데…….”
“사파 놈들의 원칙이라는 건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일세. 제 좋을 대로 바뀌는 게 어찌 원칙이 될 수 있는가?”
“그럼 뭘 어쩌자고?”
중인들이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와중에도 거대한 검은 색 배는 점점 더 부두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배가 속력을 천천히 줄이더니 선착장에 접안하기 시작했다.
꿀꺽.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과연 다리나 댈 수 있을지 의심이 될 만큼 높디높은 배에서 푸른색 수로채 의복을 입은 무리가 우르르 뛰어내렸다. 그리고 단숨에 달려와 부두 주변을 점령했다.
“물러서라!”
“당장 뒤로 물러나, 목이 잘리고 싶지 않으면!”
수적들의 위협에 상인들이 기겁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 잠시만요. 하나 여쭐 것이…….”
“이 멍청한 놈이!”
그 와중에도 상인 하나가 물러나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하려 하자, 순간적으로 살심이 동한 수적 하나가 아미자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상인의 목이 꿰뚫리기 바로 직전.
“노오오오옴!”
우레와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미자를 든 수적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저, 저는…….”
드높은 배의 갑판 위로 한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고 긴 수염과 장대한 체구.
황금의 용이 새겨진 검은 장포만 봐도 이 사내의 정체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흐, 흑룡왕이시여.”
흑룡왕의 부리부리한 두 눈에서 안광이 쏟아졌다.
그는 본디 체구가 장대하고 사람을 겁먹게 만들기에 충분한 용모를 지녔다. 그런 이가 노기까지 뿜어내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 중 몇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흐, 흑룡왕이시여. 저는 그저…….”
“이 버러지 같은 놈이!”
쿵, 소리와 함께 배에서 뛰어내린 흑룡왕이 수적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대번에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사, 살려…….”
“머리나 식히고 와라!”
흑룡왕은 한 손으로 수적을 집어 던져 버렸다.
단숨에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수적은 비명을 내지르며 장강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첨벙 소리가 들린 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 사람을…….’
‘저게 인간의 용력인가?’
상인들은 방금 본 광경을 믿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흑룡왕을 바라보았다.
“흠!”
흑룡왕이 주변을 노려보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노려보는 이가 상인들이 아니라 수적들이라는 점이었다.
“다시 한번 말한다. 이곳에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 놈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사람을 때리는 이는 그 팔을 자를 것이고, 사람을 베는 이는 그 목을 자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죽이는 이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장강 물고기들의 배를 채우도록 할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흑룡왕이 그제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이곳은 우리 수로채가 관리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전과 같이 돌아갈 것이다!”
그 기세에 눌려 있던 상인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주춤주춤 손을 들었다. 온 얼굴이 식은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뭐냐?”
“흐, 흑룡왕이시여. 그 말씀은…… 저희가 예전처럼 매화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흑룡왕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흑룡왕의 이름으로 이 매화도 안에서는 어떠한 약탈도 없을 것을 선언한다! 우리가 너희를 보호할 것이다!”
“그, 그럼 이용료는…….”
“흐음.”
흑룡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돈 이야기가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임소병과는 달리, 흑룡왕은 아직 제 입으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언짢은 탓이었다.
그 내심을 짐작한 수적 중 하나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흑룡왕께서는 기존 이용료의 두 배를 말씀하셨다. 사람이 달라졌으니 당연히 돈도 달라져야 한다!”
상인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배라면 납득할 만한 금액이다. 물론 내심 불만이 있는 이도 있었지만, 불만도 사람을 봐 가며 표출해야 한다. 감히 흑룡왕을 앞에 두고 흥정하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 푼 아끼겠다고 어설프게 흥정을 시도했다간 목숨을 두고 흥정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까.
“가라.”
흑룡왕이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이 도시도 지금부터 장강수로십팔채의 영역이다. 이곳에 묵거나 장사를 하려는 이는 모두 수로채에 세금을 내야 할 것이다!”
“예!”
수적들이 도시를 점거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누군가는 그 광경을 보며 그래도 수로채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준 것에 안심했다. 또 누군가는 매화도의 이용료가 두 배로 올랐다는 사실에 한탄했으며, 누군가는 과연 수로채의 말을 믿어도 될지 의심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패련 최초의 강북 진출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 * *
“수로채가 구강을 점령했습니다.”
천천히 돌아가던 염주가 손안에서 우뚝 멈추었다.
감겨 있던 법정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점령이라 했느냐?”
“예, 방장. 정확하게는 구강이 아니라 그 옆에 생긴 새로운 도시입니다만, 아직 나라에서 명칭을 정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곳을 매화도라 불렀었지.”
“예. 그렇습니다, 방장.”
법계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법정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녹림이 매화도에서 발을 뺀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바로 하루 전이다. 그런데 하루 만에 수로채가 매화도를 점령했다고?”
“……예.”
“화산……. 아니, 녹림에서 사패련에 언질을 준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고서야…….”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화산의 성정을 감안한다면…….”
“……그렇겠지.”
법정이 눈을 감았다.
의심암귀가 차오르면 모든 것에 의혹이 들어찬다고 하더니, 그마저도 잠시간 이성이 뒤흔들린 모양이었다. 세상 모두가 사패련과 거래하는 일이 있어도, 저 화산만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수로채가 어디까지 진출했는가?”
“강을 넘어온 것으로…….”
법계가 말끝을 흐린다. 법정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강북으로 넘어왔다는 말이로군.”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방장.”
“……일시적으로 넘어온 것도 아니고, 점거하여 자신들의 영역으로 선언하셨다고.”
법정의 눈이 순간적으로 어둑해졌다.
“방장. 이는 사패련이 강북진출을 선언한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다.”
“……예?”
법정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답했다.
“사패련이 아니다. 수로채의 단독 행동이겠지.”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 연유에 대해 물으려던 법계는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법정이 저리 확신에 차 말을 한다는 건 분명 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다를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 물음에는 법정도 답하지 않았다. 법계의 말이 옳단 걸 그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로채가 사패련에 소속된 이상, 이 행위는 사패련의 강북 진출로 인식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은 강북이니, 지금껏 구파를 억제해 오던 강남불침의 조약과는 관련이 없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법정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왜 모른단 말인가?
지금껏 구파는 장강참변을 일으킨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런 이상 구파를 지켜보던 이들은 이번 사태에 대한 구파의 대답을 요구할 것이다.
너희가 장강을 넘지 않은 게 정말 그 조약을 지키기 위함이었는지, 그게 아니면 사패련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는지를 밝히라는 투로 말이다.
그리고 구파와 오대세가는 그 요구에 대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었다.
‘이건 물러설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의지가 어떤지는 상관이 없다. 그들이 사패련을 상대로 강호의 정기를 수호하는 정파라 자부하기 위해서는 강북을 침범한 저들을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응징이 정말 응징으로 끝날 일인가?’
수로채와의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사패련도 결국은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단숨에 불길이 퍼져 나갈 수밖에 없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작자가……. 별것도 아닌 욕심으로 전화를 불러오는구나. 이 가짜 평화가 전쟁보다는 나은 것을.”
한참 동안 번뇌하던 법정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청명.”
“바, 방장?”
“허허. 화산검협……. 화산!”
우드득.
손에 쥐여 있던 염주가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법정은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화산의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하지만 지난 삼 년간 매화도를 지키고 호북을 안정시킨 그들의 공 때문에라도, 소림과 구파는 천우맹의 이런 행위에 어떠한 지적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방장…….”
“구파와 오대세가에 연통을 넣어라. 지금 당장 소림으로 모이라고.”
“봉문 한 곳은…….”
“모든 문파다.”
“하지만 방장…….”
“내 모든 문파라 말하지 않았느냐?”
법정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법계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서두르거라.”
“예!”
법계가 빠르게 나간 후, 법정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형편없이 금이 가 버린 염주가 보였다.
“허허.”
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귀다툼이 따로 없구나. 허허허. 허허허허허허!”
커다란 웃음소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소림에 싸늘하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