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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10화 (907/1,567)

910화. 어디 엿 한번 처먹어 봐라. (5)

“두고 가요?”

“그렇다니까.”

“저걸 말입니까? 저걸 다?”

일장로가 입을 쩌억 벌렸다.

아니, 물론 건물을 두고 가는 건 이해한다. 그걸 떼서 옮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섬을 나간다고 다 부숴 버릴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배를 왜 두고 갑니까, 배를?! 저 한 척이 돈이 얼만데!”

“쯧쯧. 산적이 배에 욕심을 내다니. 물가에서 오래 살더니 수적질에 취미라도 들리셨나?”

“그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저걸 가져다 팔기만 해도……!”

“이 사람아. 팔 데가 있어야 팔지. 배 파는 게 뭐 어디 하루아침에 될 일도 아니고.”

임소병이 부채를 촥 펼쳐 들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돈이 아니야. 의도지. 돈, 돈 하다가는 정말 중요한 걸 놓치게 되는 법이야.”

일장로는 차마 말도 못 하고 애꿎은 제 가슴만 쾅쾅 쳐 댔다.

예전부터 그들의 녹림왕은 이상한 면이 있었지만, 저 화산의 도사 놈을 만난 이후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진 느낌이다. 도무지 이 양반이 벌이는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철수는?”

“……대충은 다 끝났습니다. 모인 재물은 호위를 붙여 은하상단으로 보냈고, 매화도에 있던 놈들도 다들 뭍으로 옮겼습니다. 남은 놈들도 짐 챙겨 떠났으니 이제 저희만 가면 됩니다.”

“그렇군. 그래.”

임소병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 작은 바람이 그의 볼을 간질였다. 그는 살짝 아쉬움이 담긴 눈으로 매화도를 바라보았다.

“좋은 곳이었는데.”

“저는 영 성미에 맞지 않았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자랑스러운 녹림의 호걸들이 남의 짐이나 날라 주고 돈을 벌어먹는 게 어디 할 일입니까?”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비싼 옷을 입고 있는데? 새로 샀나?”

“크, 크흠. 이건…….”

일장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매화도가 벌어들이는 금액이 워낙에 많다 보니 그중 녹림이 나눠 받는 돈만 챙겨도 막대한 수익이 들어왔다. 그러니 장로들도 주머니에 은전이 제법 빵빵하게 찬 것이다.

일장로가 몸을 뒤틀었지만, 그렇다고 온몸에 걸친 비싼 비단옷이 어디 가려지겠는가?

“일장로가 굳이 산에 다시 들어가서 산적질이나 해 먹고살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는데?”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말이…….”

“쯧쯧. 비단옷 입고 영업하는 산적이라니, 선대가 알면 거품을 무시겠군.”

“끄으응.”

선대라는 말이 나오자 일장로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선대 녹림왕이 이 꼴을 봤다면 옷뿐 아니라 일장로를 통째로 찢어 버리려 들었을 것이다.

임소병은 강 건너편을 물끄러미 보며 혀를 찼다.

‘삼 년이라.’

지난 삼 년간 임소병과 녹림은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임소병 개인으로는 혼란했던 녹림을 안정시킬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돈이란 세상 모든 것을 해결할 수단은 되지 못하지만,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 정도는 되니까.

임소병이 녹림왕이 되는 데 반발하던 이들도 제 손에 떨어지는 재물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녹림이 진짜 얻은 것에 비하면 재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큰 것은 양민들이 더 이상 녹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산을 오가는 이들을 해하지 않고, 통행세를 받으며 안전하게 호위하는 식으로 업종을 전환한 것이 확연한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매화도를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 역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역시나 사패련이다.

사패련은 사파일통을 선언하고 모든 사파를 제 휘하로 빨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세상 사람들의 증오마저도 모조리 빨아 갔다.

그런 와중에 녹림이 사패련에 반목하고 천우맹을 지지하고 나섰으니, 사패련을 증오하는 이들이 녹림에는 꽤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게 된 것이다.

“화산의 후광도 한몫했지. 여하튼 쓸모가 많은 도사님이라니까.”

“예?”

“아니야, 아무것도.”

임소병은 나직이 웃었다.

‘도박은 이렇게 하는 거지.’

녹림의 수장인 그가 화산과 손을 잡는다고 했을 때, 그를 정신 나간 사람쯤으로 여긴 이가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대별채 등을 쓸어 버리며 그에게 권력이 모인 상황이라 대놓고 말은 못 했겠지만, 그의 생각에 진심으로 찬동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도박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아니. 아니지.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임소병의 눈은 다시금 차갑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사패련을 쓸어 버리고, 장일소의 목에 칼을 박아 넣은 다음에야 성공을 논할 수 있겠지.’

그 광경을 잠깐 머릿속으로 그려 본 그는 이내 낄낄대며 웃었다.

“뭐, 그건 내 몫이 아니겠지만.”

“아까부터 혼자 대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정신 나가신 분처럼.”

“…….”

별안간에 날아든 막말에 임소병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 기회에 정파로 탈바꿈하든 해야지, 이거 원…….’

가주의 말 한마디면 죽는 시늉도 마다하지 않는 당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화산의 미친 도사 놈도 장문인의 말에는 토를 달지 않는데, 녹림 돌아가는 꼴은 대체 왜 이 지경인가.

속이 다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일장로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보다, 정말로 이렇게 발을 빼는 겁니까?”

“다 끝난 이야기를 뭐 하러 다시 해?”

“아까워서 그럽니다, 아까워서. 매화도도 매화도지만…….”

일장로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부두로부터 쭉 이어진 커다란 전각들이 보였다.

이 도시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간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 이 모든 걸 홀랑 남겨두고 발을 빼려니 팔 한쪽을 잘라 내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소병은 손을 휘저으며 장로의 아쉬움을 뚝 잘랐다.

“됐으니 준비나 해. 이제 슬슬 손님이 올 거야.”

“손님이요?”

“그래, 손님. 아주 시커먼……. 흠. 저기 벌써 오는 것 같군.”

“예?”

일장로는 임소병의 시선이 놓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과연 저 멀리에서 검은 배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작아 보이기만 했는데, 다가올수록 드러나는 위용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저, 저거?”

옆을 호위하는 다른 배들보다 적어도 세 배는 더 커 보이는 배. 돛에는 장강을 누비는 흑룡의 형상이 살아 있는 듯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일장로는 이 배의 정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 중 하나였다.

“흐, 흑룡선 아닙니까?!”

일장로가 놀라 묻자 임소병은 태연한 낯으로 부채질을 했다.

“흐음, 설마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흑룡왕이 어지간히도 몸이 달았던 모양이네.”

저 배와 그 배에 걸린 흑룡기는 흑룡왕이 이곳이 직접 왕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은 섬을 제 손에 넣기 위해서 말이다.

임소병이 낄낄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흑룡왕이 직접……?”

일장로는 금할 길 없는 충격에 입을 쩍 벌렸다.

임소병이야 녹림왕이되 녹림왕답지 않은 이이니, 속되게 말해 엉덩이 가볍게 돌아다니는 것도 그리 놀랍진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왕’이라 불리는 자는 그리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흑룡왕이 이곳에 직접 나타났다고?

“우리가 빠지니 매화도를 손에 넣으러 온 거겠지. 다른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말이야.”

돌아가는 상황을 곧장 이해하지 못한 일장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흑룡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임소병의 머리에는 다른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하루란 말이지?’

입가가 묘한 미소가 걸렸다.

화산을 떠나기 직전, 청명이 그를 불러 한 가지를 확인하라고 말했다. 그들이 매화도에서 물러난 뒤 가장 먼저 누가 오는지, 얼마 만에 나타나는지를.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수로채가 이쪽을 점거하러 왔다는 건, 사패련주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는 뜻.’

이틀 정도 내에만 나타나도 성공이라 할 수 있는데, 단 하루 만에 흑룡왕이 직접 나타났다?

그건 저들의 사이에 명백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천우맹의 계책이 생각보다 더 확실하게 먹혀들었다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인 셈이다.

“큭큭큭. 내가 이래서 도사님을 좋아한다니까.”

임소병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지난 삼 년간 강호의 주도권을 쥔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사패련의 장일소였다. 한때 강호의 패권을 쥐었던 소림은 사패련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저 촉각을 곤두세운 채 칩거했을 뿐이다.

커다란 충돌이 없었을 뿐이지, 장일소의 의도대로 강호가 놀아났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화산이 돌아오자마자 장일소의 패권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검 한 번 들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어떤 검격보다 통렬한 일격을 날려 댔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임소병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만 가지. 괜히 여기 있다간 불벼락을 맞을 테니까.”

“아, 아니, 녹림왕이시여. 수로채가 여길 먹어 버리면…….”

“별일은 없을 걸세.”

일장로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도 임소병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산을 버린 우리가 양민들과 어울리며 편히 재물을 긁어모으는 모습에 가장 속이 뒤틀렸을 이는 당연히 흑룡왕이었을 테니까.”

“…….”

“더구나 우리는 화산에 고개를 숙일 줄 알지만, 저 자존심 강한 작자는 장일소에게 도통 숙일 줄 모르거든. 그러니 어떻게든 이곳에서 재물을 모아 수로채의 전력을 강화하려 들겠지.”

“말은 그럴싸합니다만…….”

“그리될 거야.”

임소병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 장일소가 힘을 긁어모으는 모습에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 게 누구였을 것 같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만 가자고.”

부채를 탁, 접으며 몸을 돌린 임소병이 혼자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녹림왕이시여! 가, 같이 가시지요!”

일장로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그러면서 무어라 더 질문을 던졌지만 임소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저 발걸음만 재촉했다.

‘자 이제 소림이 어찌 나올까?’

역시나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

* * *

“도착했습니다! 흑룡왕이시여!”

“흠!”

선수에 선 흑룡왕은 눈앞의 작은 섬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 별것도 아닌 것이 이리도 속을 썩일 줄이야.”

장일소 그 작자가 대놓고 막아서지만 않았어도 진즉에 쓸어 버렸을 것이다. 저 섬 하나 때문에 장강을 틀어쥐려던 수로채의 계획이 모조리 박살 나 버렸으니까.

하지만…….

‘전화위복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지난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어설프게 물건을 털어 대는 것보다 제대로 통행료를 받아 내는 쪽이 몇 배는 더 큰 이득을 올릴 수 있다는 걸 그동안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더구나 그는 수로채의 수장이다. 저들과는 다르게 장강을 오가는 이들을 확실하게 틀어쥘 수 있는 입장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저 매화도에서 화산이 벌어들이던 돈의 몇 배를 벌어들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만 된다면…… 저 흑귀보의 돈귀신들 이상 가는 세력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럼 장일소 따위는 별것도 아니지.”

흑룡왕이 이를 갈아붙였다.

사패련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졌지만, 흑룡왕의 위세는 오히려 과거만 못하다. 심지어 세인들은 그를 저 장일소의 수하쯤으로 여기고 있다.

사패련의 련주는 장일소이고, 그는 부련주에 불과하니 그 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제 보여 줄 것이다. 사패련의 진정한 수장이 누구인지 말이다.

“접안합니다!”

흑룡왕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하여 점령해라!”

“예!”

잠잠했던 장강이 다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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