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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09화 (906/1,567)

909화. 어디 엿 한번 처먹어 봐라. (4)

정파는 협의와 가치로 제자를 이끈다.

하지만 사파는 그 실체 없는 허울을 경멸하는 이들.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득뿐이다.

물론 지금 장일소는 그가 가진 위압감으로 사패련을 지배하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분명 한계가 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황제를 상대로도 반란을 일으키는 게 사람 아닌가?

“……젖줄을 끊겠다는 거로군요.”

상황을 이해한 호가명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금은 매화도라 불리게 된 섬을 처음 화산에 내줄 생각을 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저 구파와 천우맹의 관계를 벌릴 요소로 활용될 거라 생각했건만.

저 정신 나간 화산검협이 일을 끝도 없이 키워 여기까지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련주님. 이건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

“괴이해?”

“예. 매화도는 장강이 봉쇄되어야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수로채가 장강의 봉쇄를 풀어 버리면 무의미해지는 곳이 아닙니까? 이건 계책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겠지.”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그 돼지 새끼 같은 흑룡왕이 장강의 봉쇄를 풀 생각이 있다면 말이야.”

“……예?”

호가명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수로채는 매화도의 존재 때문에 자금난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벌써 몇 번이고 매화도를 공격하게 해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만.”

“그건 매화도가 남의 것이었을 때의 이야기지.”

장일소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칼쟁이과 폐병쟁이는 그 별것도 아닌 섬을 건드려 장강 전역의 물류를 한곳으로 몰아 버렸다. 적당히 짐을 실어 옮겨 주는 것만으로도 수로채가 약탈을 통해 버는 돈 따위는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막대한 돈을 챙겨 왔다는 거지.”

“그건…… 그렇습니다.”

반쯤은 사패련이 깔아 준 판이지만, 그걸 완벽하게 받아먹다 못해 그들의 예상 이상으로 키워 낸 것은 분명 그들의 능력이었다.

“네가 흑룡왕이라면 어떻게 할까?”

장일소의 입꼬리가 한껏 말려 올라갔다.

“그 매화도를 없애서 예전으로 돌아가려 할까? 아니면 지금 상황을 유지한 뒤 자기가 매화도를 먹으려 할까?”

호가명의 눈이 흔들렸다.

“아, 아니, 물론 이득은 매화도를 차지하는 쪽이 더 납니다. 하지만 매화도가 선호되었던 이유는 그곳을 운영하는 이들이 화산이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수로채가 그곳을 점령한다면 누가 거길 신뢰하고 짐을 맡기겠습니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인데.”

“매화도를 실제로 운영한 게 어디였지?”

호가명이 입을 닫았다.

차마 대답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장일소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녹…림입니다.”

“산적에게는 잘도 짐을 맡겼구나.”

장일소가 코웃음을 쳤다.

“평범한 양민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상인들에게 수채나 산채나 그리 멀지 않다. 게다가 상인들이 어떤 존재니. 안전만 보장된다면 수적이 아니라 귀신과도 거래하겠지. 수로채가 매화도 내의 약탈을 금지하기만 해도 곧 너도나도 매화도를 다시 이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

“아니면 적당히 대리인을 내세워도 그만이지. 의심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도 없지 않으냐?”

“흑룡왕이 거기까지 생각을 하겠습니까?”

“물론 그 돼지는 게으르고 욕심만 가득하지.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

“특히나 이득에 대한 것은 누구보다 계산이 빠르단다.”

장일소가 혀를 찼다.

“거기까지라면 어떻게 수습해 보겠지만, 문제는 그 매화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놈이 흑룡왕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

장일소가 하고자 하는 말을, 호가명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막대한 이문이 걸린 일이야. 하오문과 흑귀보가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다.”

“확실히…….”

호가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건 아픈 수다.

장일소는 지난 삼 년간 사패련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 애를 써 왔다. 하지만 장일소가 실제로 손에 넣은 부분은 수로채와 하오문, 그리고 흑귀보를 제외한 남은 부분들이다.

만인방을 위시로 한 사패련의 자체 세력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강해졌지만, 아무리 장일소라고 한들, 수십 년간 견고한 체계를 구축해 온 신주오패의 세력을 삽시간에 부수고 흡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결국 사패련 내에서 언젠가는 터질 화약고와도 같다.

“작은 계기 하나를 기다리며 움츠리고 있던 돼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심지에 불이 붙을 수도 있겠군요.”

“쯧. 이래서 지금껏 조심스레 움직여 온 것인데.”

장일소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만일 저들이 매화도에서 천천히 철수했다면 대비할 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산은 너무도 전격적으로 장강에서 발을 빼 버렸다.

균형이 무너진 곳에서는 새로운 균형을 만들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지는 법. 그 막대한 이득이 사패련 내부에 문제를 만들어 낼 거란 사실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하지만.”

그때 호가명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찌 생각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잖습니까, 련주님.”

“기회?”

“예. 기회입니다.”

그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는 그들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 이들을 이끌고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부담되었던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적당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쯧쯧. 가명아, 가명아.”

하지만 장일소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너는 이상하게도 화산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시야가 좁아지는구나. 전에도 그렇고.”

“……무슨 말씀이신지?”

“왜 이해를 못 하느냐. 매화도를 점령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이냐?”

장일소가 손가락을 뻗어 매화도를 가리켰다.

“짐은 육지에서 섬을 통해 강 건너로 넘어가지.”

장일소의 손가락 끝이 매화도에서 천천히 움직여 건너편의 강변에 닿았을 때, 호가명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

“매화도를 점령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강 건너 부두마저도 점령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곳은…….”

“……강북이군요.”

호가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이 땅에 뭐가 있지?”

“……거대한 도시. 삼 년 만에 말도 안 되는 크기로 커져 버린 도시가 있습니다.”

“그렇지. 저 돼지 새끼들이 과연 매화도를 손에 넣고 거길 탐내지 않을 것 같으냐?”

불가능하다.

섬만이라면 모를까, 섬을 건너 부두까지 장악한 이들이 부두에서 이어진 도시를 내버려 둔다? 그건 강함에 미쳐 있는 무인이 절세의 신공절학을 앞에 두고도 삼류 무공만 익힌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매화도를 손에 넣는다는 건, 강북으로 진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싫든 좋든 문제가 벌어지겠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

“그런데…… 그럴 상황을, 발을 빼지도 못하고, 눈을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천우맹은 뒤로 쭉 물러나 버렸구나. 마치 구파와 우리가 알아서 잘 싸워 보라는 듯이.”

호가명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단순한 한 수가 여기까지 이어질 수가 있지?’

처음엔 그저 막대한 이득을 제 손으로 내다 버린 멍청한 한 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멍청한 건 청명이 아니라 바로 호가명이었다.

중요한 것 무엇을 포기하냐가 아니라, 그 포기를 대가로 얼마나 큰 걸 얻어 내느냐니까.

매화도가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득을 포기함으로써, 화산은 사패련 안에 내분을 만들고, 그 내분이 터진 사패련이 구파와 충돌할 계기마저 만들어 놓은 것이다.

더 지독한 것은 그걸 빤히 알면서도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죽을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지금 그들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게 대체…….’

이 지독한 수를 머리로 완벽히 이해는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이 단순한 한 수가 여기까기 이어질 수가 있는가?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내달렸다.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 하하하하하하핫!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이런 기분을 느껴 보는군! 정말 재미있어! 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허리를 젖혀 가며 쩌렁쩌렁 웃어 대었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처럼 얼굴까지 가린 채 끅끅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 호가명은 보았다. 기다랗고 흰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장일소의 눈을. 그 소름 끼치는 눈빛을.

“가명아.”

“예, 련주님.”

“천하의 나라도 후회가 되는구나.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죽여 둘 걸 그랬나?”

장일소가 제 붉은 입술을 핥았다.

“흐트러지는구나. 기껏 세워 둔 계획이 순식간에 어그러져. 속이 쓰리구나, 속이 쓰려.”

가장 장일소를 못마땅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그리지 않은 판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단 점이었다.

이건 장일소의 취향이 아니다. 그는 남을 자신의 판으로 끌어들이는 이지, 남이 만들어 놓은 판 위에서 춤을 추는 배우가 아니니까.

“……그 화산검협이 정말 이 모든 걸 예측하고 움직였다고 보십니까? 삼 년 전부터?”

“그럴 리가.”

장일소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사람인 이상 그럴 수는 없지. 그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에 불과할 것이다.”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도 장일소와 같았다.

“하지만…….”

그러나 이어진 말은 호가명의 예상과 다소 달랐다.

“설령 매화도라는 수단을 이용하지 못했다고 한들, 결과는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장일소가 낄낄대며 웃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허를 찌르는 기책을 천재성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 넓은 시야와 빠른 머리 회전이 만들어 낸 놀라운 발상이라고 말이야.”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아니야. 전혀 아니지.”

장일소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의 손목에 매달린 장신구들이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렸다.

“애초에 그리 뛰어난 이라면 위험성 높은 기기묘묘한 묘책을 짜내야 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아.”

“…….”

“기책이란 강자의 수단이 아니다. 약자의 수단이지. 정석적인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는 자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쥐어짜듯 만들어 내는 것이 기책이야.”

장일소의 입가에 귀기 어린 미소가 피어났다.

“찐득하군. 끈적거리는 악의(惡意)야. 어떻게든 내 얼굴에 똥물을 끼얹어 주겠다는 악취가 풀풀 풍기는 일 수다. 이런 놈이라면 다른 상황이었다 해도 어떻게든 나를 지옥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강구했을 테지.”

“…….”

“큭큭. 빌어먹을 놈 같으니.”

제 얼굴을 잡은 장일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면…….”

호가명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을 쥐어짰다.

군사라는 직책을 맡은 이라면 결코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을 그 말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을 들은 장일소가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늘어졌다.

어찌 보면 나른하고, 어찌 보면 심드렁해 보이는 표정으로. 좋아하는 장남감을 빼앗긴 아이 같기도 하고, 귀찮은 일을 떠맡은 이 같기도 한 얼굴로.

“놀아나 줘야지.”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늪에 빠졌을 때, 어설프게 벗어나겠다고 발악을 하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니. 우선은 당해 주는 것도 방법이지.”

장일소의 표정이 순식간에 여유를 되찾는다.

“우리 귀에 들어왔을 정도라면 이미 흑룡왕은 움직이고 있을 것이고, 하오문이 우리보다 정보가 느릴 리 없으니, 그쪽도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겠구나. 남은 건 만금대부 정도인가.”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듯한 장일소가 손을 휘휘 저었다.

“골치가 아프구나. 다들 나가 보아라.”

“예.”

시비들이 조심스레 물러나자 호가명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장일소에게는 그조차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색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가 물러나고 나니 마침내 홀로 남은 장일소는 가볍게 다탁을 두드렸다.

“화산검협…….”

이를 드러낸 장일소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쏘아져 나왔다.

“삼 년 만에 전하는 인사로는 좀 과한 것 같은데……. 이번에는 내가 한 방 먹었어. 네게 무엇을 돌려주어야 답례가 될지 고민될 정도야…….”

탁탁 소리를 내며 다탁을 두드리던 장일소가 이내 그 모서리를 콱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얼굴이 풀렸다.

그리고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농락하는 듯, 어찌 보면 걱정하는 듯, 아니면 그저 희롱하는 듯.

“너는 모르는군. 아직 몰라. 사람의 악의가 어디까지 지독해질 수 있는지 말이야.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핫!”

침전의 그늘이 장일소의 웃음을 따라 일렁였다. 흡사 더 깊고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드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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