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8화. 어디 엿 한번 처먹어 봐라. (3)
“끄으으. 가명아, 꿀물……. 꿀물 좀 가져오너라…….”
“……련주님.”
호가명의 입에서 한숨을 푹푹 새어 나왔다.
아니, 이 양반은 무공도 고강하면서 왜 이렇게 주독을 내공으로 풀지 않고 미련하게 군단 말인가.
“……꿀물.”
“예.”
하지만 호가명은 장일소를 타박하는 대신 시비를 시켜 바로 꿀물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시비가 날라 온 꿀물을 직접 받아 들고 굳이 냉기까지 주입했다. 장일소가 시원한 꿀물을 들이켤 수 있게 말이다.
“여기 있습니다. 드십시오.”
“끄으응.”
장일소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호가명이 내민 그릇을 받아 들고는 꿀꺽꿀꺽 넘겨 댔다.
그러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 외쳤다.
“차갑잖아!”
“…….”
‘군사고 나발이고 때려치우든 해야지.’라는 말이 혀끝까지 밀고 올라왔지만, 호가명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꾹 눌러 삼켰다.
사실 지금만은 장일소를 타박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가 저지른……. 아니, 해낸 일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설마.’
장일소가 만난 이가 설마 그 사람일 줄이야. 천하의 호가명도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 없던 이였다.
‘그릇이 다르다.’
상상이 현실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건 군주와 군사의 차이이다.
일을 실행해 나감에 있어 정확하고 세세하게 계책을 짜는 것을 중점으로 본다면 호가명은 장일소보다 확연히 뛰어나다. 하지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는 군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큰 그림을 그린다.
꿈같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이가 바로 장일소다.
호가명은 제 군주가 그렇게 대단한 걸 알기에…… 오히려 더 불만스러웠다.
“……왜 그러시는지 모르는 바 아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조무래기들까지 일일이 련주님께서 상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쯧쯧. 그리 말을 해 줘도 매번.”
퉁명스러워 보이는 호가명을 보며 장일소가 혀를 찼다.
그리고 덮고 있던 이불을 휙 걷어냈다. 침상에서 내려온 그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시비들이 재빠르게 다가와 그의 침의를 벗겨 내고 단장해 주기 시작했다. 젖은 수건으로 장일소의 몸을 적시고 마른 수건으로 그 물기를 말끔히 닦아 냈다. 드러난 상체 위로 고급 비단으로 만든 내의가 입혀졌다.
“그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는 순간, 나 역시 돼지가 될 뿐이라고 내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내가 기름 낀 돼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냐?”
익숙하게 시비의 옷시중을 받던 장일소가 호가명을 흘긋 돌아보았다. 칼날 같은 시선이었다.
의 칼날 같은 시선이 호가명에게로 향한다.
호가명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저 시선의 의미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명백한 질책.
호가명의 발언이 장일소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는 경고다.
“속하가 멍청했습니다, 련주님!”
호가명이 바로 그 자리에 부복했다.
말없이 호가명을 쏘아보던 장일소의 눈빛이 다시금 부드럽게 풀렸다.
“쯧쯧. 가명아, 가명아.”
“…….”
“네 그리 말하는 이유를 내 왜 모르겠느냐? 그래도 련주인데 천한 것들과 술잔을 나누고 낄낄거리며 웃어 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그런 마음을 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네 말도 틀리지 않다.”
시비의 손길이 장일소의 옷매무새를 매만진다.
“사람에게는 격이 필요하겠지. 무사에게 필요한 격과 방주에게 필요한 격, 그리고 련주에게 필요한 격은 다 다른 법.”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 자리에 만족할 이의 태도일 뿐. 제 위치에 취하면 남는 건 추락이다.”
장일소의 얼굴이 표독하게 변해 갔다.
“한낱 련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면, 나 역시 그런 이들과 잔을 섞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더 큰 것을 원한다면, 내가 아직 허기가 진다면!”
그는 손으로 그런 제 얼굴을 움켜쥐듯 덮었다.
“그들이 뱉은 침이 섞인 잔이라 해도 기쁜 마음으로 마실 줄 알아야지. 권위라는 건 태도에서 오는 게 아니라 힘에서 오는 것이니까.”
“…….”
“나는…….”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얼굴을 쥐었던 손을 거두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더 강해지는 중이란다, 가명아. 무인이 강해지는 것을 멈춰서야 되겠느냐?”
“련주의 말씀이 백 번 천 번 옳습니다!”
부복하여 그 말을 듣던 호가명이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장일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왜 머리를 박고 그러니. 아프게.”
“…….”
“일어나라. 일어나. 그렇게 쓸데없이 엎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너도 참 말을 안 듣는구나. 쯧쯧.”
호가명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때마다 장일소가 패군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장일소는 그가 감히 쉬이 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어떤 행동을 하건 마찬가지다. 장일소의 권력이 강대하기 때문도, 그 힘이 강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그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비가 천천히 장일소의 얼굴을 단장했다. 새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눈두덩에 붉은 분을 살짝 찍고 눈썹까지 그려 낸 후 조심스레 물러나자 장일소가 스스로 입술연지를 손가락으로 찍어 제 입술에 바르기 시작했다.
“여하튼 그러…….”
쾅!
“련주님!”
그 순간 문이 갑자기 콱 열리며 터진 고함에 섬세하게 입술 위로 움직이던 장일소의 새끼손가락이 살짝 흐트러진다.
“……쯧.”
장일소의 얼굴에 진득한 불쾌함이 어렸다.
순간적으로 눈에 살기마저 어린 것을 눈치챈 호가명이 빠르게 고함쳤다.
“이곳이 어디라고 소란스레 뛰어 들어온단 말이냐! 이 멍청한 놈이!”
“죄, 죄송합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
“닥쳐라! 이……!”
“……됐다.”
받아 든 수건으로 흐트러진 연지를 닦아 낸 장일소가 고개를 돌려 뛰쳐 들어온 이를 바라본다. 두 눈에 어렸던 살심은 이미 씻은 듯 사라진 뒤였다.
“바쁜 일인가 보지. 그래서, 무슨 일이냐?”
“매화……. 아니, 구강의 섬에서 녹림 놈들과 수적 놈들이 물러났습니다.”
“어디에서?”
“그 섬 말입니다. 화산 놈들이 점거한…….”
“……매화도 말이로군.”
장일소가 손가락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위로 올렸다. 그러자 시비가 재빨리 다가와 그의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고는 머리 위에 관을 씌운다.
“매화도를 비우고 물러났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천당가 역시 장강에서 손을 떼고 사천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호가명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렇게 갑자기?”
“……여기까지 소식이 전해진 걸로 보아 이미 발을 빼고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이게…….”
호가명이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정보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해는 간다.
그들이 장강을 넘게 되면 그 매화도와 장강을 지키는 사천당가가 가장 위험하니, 상황이 정리된 지금 그들을 물리는 게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호가명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 급박함이었다.
‘아직 우리가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른 곳이라면 그럴 수 있다. 겁을 집어먹은 이는 무슨 일이든 서두르는 법이니까.
하지만 화산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게 문제다.
문파가 단체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곳, 도대체 뭘 처먹고 살아야 그렇게 정신이 나가 버릴 수 있는지 궁금한 화산검협이 있는 곳이 바로 화산 아니던가?
심지어는 그 무당마저 겁을 집어먹고 항복하는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장일소와 만인방에게 달려들던 곳이 바로 화산이다.
그런 화산이 이끄는 게 천우맹인데, 벌써 겁을 집어먹고 장강을 버린다? 버티고만 있어도 막대한 이득이 보장되는 곳을?
‘그럴 리가 없지.’
화산이라면, 그가 아는 천우맹이라면 그저 우려만으로 막대한 이익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대체 무엇을 위해서…….
“여하튼…….”
그때 장일소가 한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혀를 찼다.
“맹랑한 꼬맹이 놈이, 우리에서 풀려나자마자 사람의 옆구리에 칼을 박아 대는구나. 쯧쯧쯧.”
호가명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순간 움찔했다.
이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무척 짜증이 나 있는 듯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기꺼움이 가득 담긴 표정.
“순순히 놀아나지는 않겠다는 건가?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그럼.”
장일소의 말을 들은 호가명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누구겠느냐?”
“……이번에도 화산검협을 말씀하심입니까?”
장일소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이 곧 긍정이라는 걸 모를 호가명이 아니다.
하지만 호가명은 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장일소가 존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영역에 어떻게 감히 화산검협 같은 애송이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련주님. 속하가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해 보거라.”
“……제 생각에는 련주님께서 화산검협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감히 련주님과 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 화산검협이란 거창한 별호마저도 저희가 붙여 준 것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 어린놈이…….”
“쯧쯧. 가명아.”
“……예?”
“내가 처음 강호에 출두했을 때가 몇 살이었는지 알고 있느냐?”
호가명이 대답을 않자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때에 비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연륜이 생겼고, 조금 더 신중해졌지. 그리고 비할 바 없이 강해졌다.”
“그렇습니다, 련주님.”
“하지만 더 똑똑해지지는 않았어.”
“…….”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성장이란 결국 가지고 있는 것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일 뿐, 범은 새끼라도 범이고, 개는 다 커도 개일 뿐이다. 그런데 용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호가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장일소의 말이 틀릴 리 없다. 하지만 호가명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낱 질투 때문에?
아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화산검협이 그보다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감히 장일소의 존재를 침범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건 신성에 대한 모독과 다름없다.
“그리고 네 말이 맞다 해도 다를 게 없다. 중요한 것은 그놈이 나와 수를 나눌 만한 놈인가가 아니라, 그놈이 둔 수가 지금 내 목을 조이고 있다는 거겠지.”
“목을 조이고 있다 하심은…….”
“지도!”
“예!”
시비들이 다급히 뛰어가 커다란 지도를 들고 왔다. 너른 탁자 위에 지도를 펼치니 기다랗고 늘씬한 장일소의 손가락이 장강의 한중간을 짚었다.
“어떠냐?”
“……예?”
“이 매화도 말이다.”
장일소의 말에 새삼스레 매화도를 바라보던 호가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군인이라면 당연 전략적인 요충지가 될 만한 곳이지만, 무인에게야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더구나 저희는 수로채를 통해 장강을 완전히 손에 넣은 상태입니다만.”
“쯧쯧. 너는 여전히 싸움만 생각하는구나.”
“하면…….”
“이곳으로 얼마나 막대한 물자가 오가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장일소가 끅끅대며 웃었다.
“망할 삼 년 동안 매화도를 통해 강남으로 유입되는 물자의 양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지금 이곳이 막히게 된다면 숨통이 조이는 것은 바로 우리라는 의미지.”
“아…….”
“빌어먹을 놈 같으니.”
장일소가 이를 갈아붙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입꼬리는 기껍다는 듯 말려 올라가 있었다.
“아주 아프군. 아주…… 아주 뼈아파.”
이글거리는 그의 눈이 저 먼 곳으로 향했다.
머나먼 북쪽,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는 어느 산이 있을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