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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07화 (904/1,567)

907화. 어디 엿 한번 처먹어 봐라. (2)

인식이라는 건 묘한 측면이 있다.

사람은 의외로 평화를 평화라 느끼지 못하고 혼란을 혼란이라 느끼지 못한다.

평화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그 평온함을 특별하다 느끼지 못하고, 혼란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그 급박함을 이상하다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다.

장강참변이 일어난 지 삼 년.

처음에는 장강에서부터 시작된 커다란 혼란에 신음하던 이들도 언젠가부터는 그런 상황을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혼란 속에서도 안정은 존재하는 법.

사패련과 구파의 대립, 그리고 난립하는 사파들의 존재로 벌어지는 혼란 속에서도 세인들은 어떻게든 삶의 안정을 구축해 가고 있었다.

뜬금없이 퍼져 나온 소문이 발 없는 말처럼 장강 유역을 누비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가가 호북에서 철수한다는데?”

그 말을 들은 사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벌떡 일어났다.

“그, 그게 뭔 개소리인가? 당가가 철수한다니?”

“말 그대로네. 사천으로 돌아간다는구먼.”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삼삼오오 모인 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장강 이북에서 땅을 일구는 이들은 요 몇 년간 사천당가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왔는지 모를 수가 없다. 그들이 이곳을 지키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몇몇은 분명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당가가 갑자기 장강에서 철수한다고 하니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 갑자기 왜 말인가?”

“사천에 사파가 출몰한다는 모양일세.”

“뭐? 사천에?”

“그렇다는군. 얼마 전에 사천에서 사파들이 난립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해 갔다지 않는가?”

“이제는 사천까지…….”

“게다가 얼마 전엔 또 사파 놈들이 섬서도 들쑤셨다지. 이제는 섬서고 사천이고 안전한 곳이 못 되는 거야.”

“아아…….”

말하던 이들의 얼굴에 차마 말로 다 못 할 안타까움이 어렸다.

사천당가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천의 패자다. 저 사천에 사파들이 설친다면 당연히 당가는 사천을 지키러 돌아가야 한다.

“……걱정이구먼. 당가가 떠나면 어떻게 될지…….”

“그러니 말일세.”

“당가에 여력이 정말 그리 없는가? 사천이 문제라고 해도 아주 철수를 할 정도는…….”

“이 사람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듣고 있던 이 중 하나가 달아오른 얼굴로 역정을 내었다.

“사천당가일세! 사천당가! 이 호북에는 연고 하나 없는 그들이 지난 몇 년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우리를 지켜 주지 않았는가?”

“그, 그렇긴 한데…….”

“그럼 가는 길에 감사하다고 눈물을 흘리지는 못할망정, 뭐? 제집에 불이 났는데 집은 버려두고 우리나 지켜 달라고? 그게 어디 인두겁을 쓴 사람이 할 말인가?”

“그냥 너무 아쉬우니 하는 말이었지, 그냥. 뭘 그리 역정을 내는가…….”

말을 꺼낸 이가 의기소침해져선 어깨를 움츠렸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저 망할 사파 놈들을 책임져야 하는 곳은 따로 있지 않은가?”

그 말에 모두의 머릿속에 한 문파의 이름이 떠올랐다. 장강참변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쭉 그들의 자랑이었던 문파가.

“저 당가도 제 구역에 문제가 생기니 저리 천릿길을 멀다 않고 돌아가는데, 호북의 사람들이 이리 고생하는 마당에 그 망할 무당 놈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자빠졌단 말인가?”

“……누가 그걸 모르는가? 그 무당이 봉문 하고 코빼기도 비추지 않으니 하는 말이 아닌가?”

“그럼 무당에 가서 항의해야지! 솔직히 무당이 뭘 잘했다고 봉문 하고 들어앉아 있단 말인가? 게다가 듣자 하니 봉문 했던 화산도 섬서에 사파가 몰려오자마자 봉문을 깨고 나왔다더군!”

“그 화산이 말인가?”

“그렇다니까!”

화산이라는 이름을 듣는 이들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사실 호북 사람들에게 있어서 화산이란 굉장히 복잡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한때는 호북을 대표하는 문파였던 무당에 견줄 바도 되지 않는, 잊힌 도가문. 하지만 장강참변 이후로는 유일하게 저 사패련과 맞서 싸웠던 대단한 문파.

그리고 삼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중간 어디 즈음에 위치한 게 화산의 입지다.

“화산이 봉문을 깨고 나오다니…….”

“그러니까 하는 말이 아닌가? 솔직히 터놓고 말해서, 화산의 봉문이 어디 무당의 봉문과 같은가?”

“다르지. 다르고말고.”

화산은 스스로 힘을 갖추기 위해서 봉문을 한 것이다. 하지만 무당은 쏟아지는 질타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봉문 했다.

“지난 삼 년 동안 화산이 강호에서 활동했다면, 온갖 찬사를 다 받았을 걸세. 화산은 그 지랄 같은 장강참변에서 유일하게 정파의 자존심을 지킨 문파 아닌가? 그런데도 그걸 마다하고 힘이 부족하다며 봉문을 한 문파가 화산일세! 화산!”

“……그렇지. 대단한 문파지.”

“그런 문파도 섬서에 문제가 생기니 봉문을 풀고 사람을 지키러 나오는데, 저 망할 무당 놈들은 호북 사람이 죽어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으니. 에잉, 빌어먹을!”

당가가 빠져나간다는 공포가 무당에 대한 성토로 쏠리기 시작했다.

사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리 말할 수밖에 없다.

“어디 무당뿐인가? 호북의 중소 문파들은 지금 대체 뭘 하는 건가? 평소에는 무당의 속가라고 거들먹대더니! 무당이 없으면 속가도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하는 건가? 저 섬서의 속가들은 화산이 도착하기도 전에 악적들이랑 맞서 싸웠다고 하던데!”

“심지어는 봉문 한 종남의 속가들도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하는군.”

“대체 무당은…….”

본디 사람을 가장 크게 자극하는 건 불안감이다.

당가의 부재로 혼란이 가중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호북인들을 들끓게 만들고 있었다.

“듣자 하니 균현 사람들이 무당으로 올라갔다 하니, 조금 더 기다려 보세. 저들이 염치가 있으면 이젠 문을 열고 나오겠지.”

“……염치가 있으면 봉문을 했겠는가?”

“에이. 제기랄! 속만 터지는군!”

사천당가의 철수 소식은 장강을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따로 있었다.

* * *

“뭐? 지금 뭐라고 했나?”

“……매화도가 철수한답니다.”

다복상회(多福商會)의 수석 행수인 사마공(司馬功)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매화도가?”

“……예, 행수 어른.”

“아, 아니! 잘 있던 매화도가 왜 갑자기 철수한단 말인가? 뭘 잘못 들은 건 아니고?”

“아닙니다. 지금 소문이 파다합니다. 내일까지 선적을 받고, 그 이후로는 더는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 정비를 하려는 건가? 그런 거지?”

“……아주 발을 뺄 모양입니다.”

“아니! 왜 매화도에서 발을 뺀단 말인가? 돈을 아주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는데! 그리고, 그럼 거기에 만들어 놓은 시설은? 그것들은 다 어쩌고?”

“그것도 모두 버리고 갈 생각인 모양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사마공은 너무 황당하여 망연히 중얼거렸다.

저 매화도와 인접 부두에 천우맹이 얼마나 큰 공을 들였던가? 과거에는 허허벌판에 불과했던 곳이 이제는 호북 내 어떤 곳에도 뒤지지 않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아주 발을 빼 버리겠다고?

‘제정신인가?’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상인이니 강호 놈들의 생각을 다 이해할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니, 그럴 거면 장사를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데, 여기서 장사를 접어? 미친놈들 아니야!”

사마공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 행수님? 뭘 어쩌시려고…….”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사마공은 그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다행히 그가 머무는 지부는 매화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가 몸을 담은 다복상회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단이 원활한 선적을 위해서 매화도 근처에 지부를 설립하여 상단원을 주재시켰기 때문이다.

숨이 턱 끝까지 치밀도록 달려 부두에 도착하니, 이미 같은 소식을 듣고 몰려온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도주(島主)!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정말 매화도에서 화산이 철수하시는 겁니까?”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이리되면 저희는 다 굶어 죽습니다!”

인파에 둘러싸인 임소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망할.’

섬서까지 달려갔다가 쉬지도 못하고 쫓겨나 매화도로 돌아온 게 오늘이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시달리고 있으니 눈물이 날 수밖에.

아니, 아니지.

어쩌면 조금 기쁠지도 모른다. 그를 떨거지 산적 취급만 하는 망할 인간에게 시달리다가, 그래도 그를 도주 취급해 주는 이들과 함께 있으니까.

“다들 진정하십시오.”

임소병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사실입니까? 도주님?”

“그리되었습니다. 아쉽지만 매화도는 내일부로 장사를 접습니다.”

“그, 그럼 우리는 어찌하라는 겁니까?”

“매화도가 없으면 강남으로 물건을 나를 수가 없습니다! 저 수적 놈들이 아직도 미쳐 날뛰고 있는데!”

“화산! 화산은 뭐라 합니까? 이게 화산의 의지입니까?”

“자자. 다들 진정하시고.”

임소병이 손을 휘휘 저어서, 웅성대는 이들을 다독였다.

“저도 영업을 더 이어 가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강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여러분도 상황을 대충 아실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반발하던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저 사패련이 내부정리를 끝냈다는 것은 그들 역시 알고 있다. 그들이야 상인. 아무리 사패련이 패악무도하다고 한들, 그들마저 일일이 잡아 죽이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화도는 화산의 구역이다. 저들이 장강을 넘을 때 가장 먼저 노릴 게 분명한 곳.

“그럼 정말로…….”

임소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은 매화도가 아닙니까? 분명 화산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운영을 이어 나가려 할 것입니다.”

“끄응. 그렇기는 한데…….”

“그럼 그에 대해서는 천우맹은 아는 바가 없는 겁니까?”

“글쎄요.”

임소병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떠나는 입장에서 왈가왈부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지요. 다만…….”

“다만?”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르는 법 아니겠습니까? 본 주인이 제자리를 되찾겠지요.”

“본 주인이라 하시면…….”

“글쎄요. 저는 할 말을 다 한 것 같습니다. 밤이 되어도 쉬지 않고,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는 무조건 물건을 날라 드릴 테니 아직 못 다 실은 짐이 있으면 빨리 가져오십시오!”

그 말을 들은 상인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우, 움직여!”

“빌어먹을, 아직 창고에 짐이 그득그득하단 말이다!”

“자, 잠깐만, 짐을 옮긴다 치더라도 바꾼 물건은 어떻게 다시 가져오는가?”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삽시간에 혼란에 휩싸인 이들은 차마 임소병에게 무언가를 더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난장판의 한가운데서 임소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사파의 음모?’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음모를 꾸미는 걸로 따지면 그는 저 마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임소병은 앞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도시를 두 눈에 담았다. 천하의 누구라도 탐을 낼 만한,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상인들이 모여드는 상업도시.

‘세상에 이보다 더 거대한 미끼가 있나?’

저 청명이 정말 삼 년 전부터 이걸 생각했는지, 아니면 상황이 흐르다 보니 이렇게 되었는지는 임소병도 알지 못했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이 구강은 분명 수많은 이들을 휩쓸어 버릴 태풍의 핵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쉽긴 하지만.”

임소병은 입맛을 다시며 수하들에게 턱짓했다.

“재물을 미리미리 실어 둬라. 내일이 되면 바로 빠져야 하니까.”

“예! 녹림……. 아니, 도주님!”

“쯧.”

임소병이 부채를 활짝 펴 제 얼굴에 대고 살랑였다.

“도주라는 명칭이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아무래도 좋지.”

그의 시선이 강 너머로 향했다.

“이제 더 재미있어질 것 같으니까.”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혼란한 이들의 고성 사이로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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